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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다섯 가지 확신2-사죄의 확신 (요일 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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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인간의 관계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고 그 양심은 바르게 살라고 스스로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양심대로 사는 일이 불가능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스스로가 정한 양심의 법도 지킬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하신 하나님의 보실 때 인간은 더 큰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죄에 대하여 집착하는 모습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죄의 소욕이란 얼마나 집요한 것입니까 이정범 전도사님의 간증입니다.
간경화로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옛 친구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영접시키고 지속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며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되었습니다. 병이 치료되자 그는 하나님을 떠나 속히 세상 죄악에 빠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은 재발되었습니다. 눈물로 회개하고는 두손 들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병을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병이 낫자 이 사람은 다시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다시 병이 재발되었습니다. 부인을 통해 그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염치가 없어 전화를 드릴 수도 없었다며 지금 그는 복수가 차서 사경을 헤매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분이 특별하게 나쁘다기보다는 인간의 죄와 세상에 대한 소욕이 얼마만큼 집요한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히 제 자신 속에도 그와 같은 죄에 대한 집착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름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재산을 탕진했고, 가정도 파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노름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스톱하고 노름하고 싶은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생각과 마음은 비슷한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른 것입니다. 생각은 의식이고 마음은 본능입니다. 노름을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것은 생각이고 하고 싶다는 것은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늘 생각을 하지만 대부분 마음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바울도 로마서에서 자신의 죄성을 그대로 고백합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5-24)
선을 행하고 싶은 생각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할 수 없는 약함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출발하면서 반드시 해결하여야 할 문제는 죄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를 죄로 지적하시며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법이 그렇습니다. 죄는 인간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은 말씀을 통해 구원 얻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사죄의 축복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깨닫고 확신을 얻으시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죄에 대한 인간의 태도
①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눈만 뜨만 죄짓고, 하는 일마다 죄뿐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걸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밥먹듯 죄 짓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에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바람 피우는 것, 술과 노름에 빠져 인생을 탕진하는 것이 자유입니까 죄를 밥먹듯 하면서도 죄책감이 전혀 없는 죄에 대한 고통도 없습니다. 그는 죄에 대한 고통이 없는 만큼 중증에 걸린 사람입니다.
오늘날은 죄가 관영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작은 죄는 죄로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도, 죄를 다스리는 사람도 죄를 죄로 생각하지 않는 죄악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변명하기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②죄로 인하여 민감하고 반응하며 고통하는 사람들
죄의 소욕 때문에 인간은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고통을 받습니다. 죄에 대하여 민감할수록 죄책감이 심합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죄지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를 평가절하하여 미천한 자신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타인의 죄에 대하여도 정죄의식이 높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죄인이라고 소리치는 양심의 소리를 덮어버리고 자신의 죄를 속이는 위선에만 급급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죽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가장 열성적으로 외치는지 아십니까 실제적으로 간음한 사람입니다.
부정직한 사람이 정직을 더욱 강조하게 됩니다. 철저한 위선입니다. 남들이 보고 저렇게 죄인을 정죄하는 모습을 보니 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아예 꿈도 꾸지 않겠구나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가증히 여기십니다.
③죄인으로서의 자기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
죄에 대한 가책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그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고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이 용서하십니다. 용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또 스스로에 대한 용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도둑이 도둑질 해놓고 자기를 용서한다면 그 용서가 무슨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까 죄를 용서하시는 분에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규정하신 분이며 죄를 심판하실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9)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만이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의원이 쓸 데 있는 것과 같이 죄인이라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2.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인간을 죄인으로 보시고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에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득죄하리이까” 했습니다. 간음은 불륜의 남녀가 서로에게 짓는 죄이기 전에 하나님 앞에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모든 죄가 다 기록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에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예수 그리스도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제사장이십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흘리기 위하여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죄 없는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3.성도가 가져야 할 사죄의 확신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습니다. 기도하면 응답 받고 회개하면 용서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를 대신 감당하신 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사랑을 준비하고 죄인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자에게 선언하십니다.
“네 죄를 사함 받았느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를 못 믿는 것은 가장 큰 불신앙입니다. 자식이 무슨 죄를 지었을지라도 부모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벌써 일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뇌리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지존파 살인사건입니다. 가진 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미움으로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 죽였습니다. 범죄의 전모가 드러났을 때 전국민은 경악하고, 분노했지만 그들의 부모가 애절하게 호소했던 말이 있습니다.
“백번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일평생 감옥살이를 해도 좋으니 살려만 주시면 사람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내 아들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이 어미의 잘못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값을 예수님이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은 얻은 것입니다. 그가 피로 값주고 사신 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는 다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분을 믿었다면 그가 베푼 용서도 믿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가 용서받기 위해서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간 일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또 용서받았으므로 용서해야 합니다. 죄책감이 인간으로 하여금 의를 행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치 않으려는 불신앙이요, 교만입니다.
사단은 속이는 위선의 능력이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의(義)를 가지고 용서와 타협하도록 자꾸만 유혹합니다. 우리는 사죄의 은총을 믿어야 합니다. 용서받기 위해서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피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므로 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받고 용서받게 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남을 죽이지만 죄에 대한 가책은 자신을 죽입니다. 가롯 유다의 자살은 바로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구원 얻은 자에게 가책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구원 얻은 감사와 감격의 마음을 가지고 충성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본받기를 원하는 믿음의 선진들도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감격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의 신앙 여정에 있어 불신앙의 모습을 여러 번 보이기도 합니다. 이삭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다윗은 간음한 사람이요, 충신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베드로도 세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제자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충성스러운 주의 일꾼을 죽인 복음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였습니다.
그들은 죄를 안 짓고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충성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죄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고백하고 용서받음으로 죄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용서받은 뒤에는 용서의 감격을 가지고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불신앙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죄도 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는 타인을 또 용서해야 합니다. 내 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용서받았기 때문이요, 그 사람의 죄를 위해서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도 구원하시고 그의 죄도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가롯 유다는 죄의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그 후에는 죄의식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숨기지 말고 다 고백해야 합니다. 작은 죄도 고백해야 하고 남에게 도저히 알릴 수 없는 엄청난 죄도 하나님 앞에는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그 뒤에는 어떤 죄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용서받은 자로서 죄를 이기는 신자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갓 예수를 믿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회식이 있어 그가 속한 부서 전직원이 다함께 식당에 갔습니다. 식사가 나오고 맥주가 따라 나왔습니다. 그는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부장이 가득히 따라 준 맥주컵 그 앞에서 다 쏟아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부장님,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자네만 예수 믿나 나는 교회의 장로고, 저 사람은 집사, 저 사람은 권사야. 자네만 잘 믿는 척하지마.”
“그래도 저는 안 마시겠습니다.”
죄를 알면서도 짓는 것은 사단에게 진 것입니다. 죄를 모르고 짓는 것은 속은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구원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죄를 이기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 지적하시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죄를 죄 아니라고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매일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죄에 대한 면역이 생기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매일 같은 죄를 짓더라도 그날 씻어내야 더 두꺼워지지 않습니다.
작은 죄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큰 죄에도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죄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입니다.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구원파의 논리입니다. 죄는 피흘리기까지 미워해야 합니다. 죄와 더불어 우리 주님은 죽기까지 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찬가지의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지게 한 배후에는 사단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죄 짓는 자신, 죄 짓는 이웃, 죄 가운데 고통받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연약해서 죄를 지을 때마다 용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믿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나 용서해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용서의 주님을 확신하시고 사단과 싸워 이기는 승리의 삶을 언제나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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