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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대교회 사람들 (행 0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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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8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신 것이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천국 도래와 세상 역사의 끝이 지금이냐고 물은 것이다. 그 때 예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다만 그때까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오늘은 이 말씀이 의도하는 바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 가장 대표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바로 구원관이다. 그들은 이미 선민으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유일한 대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심정과 같은 것이다.
자기들은 구원이 필요한 자가 아니라 구원을 얻은 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언제 실현시켜 줄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빨리 주께서 주의 나라를 임하게 하여 자신의 옳음을 확인시켜 주고 원수들이 빨리 멸망받는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거기에 대하여 주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고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증인이 되는 일이다’ 라고 대답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의 나라가 임하심이 이때니이까”라는 질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또 그에 대한 대답이 왜 ‘증인’이라는 말로 등장하느냐 하는 것을 파악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질문과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 된다. 제자들의 질문은 마치 이것과 똑같다.
학교에서 시험을 본다 할 때에 좋아하는 학생들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다. 지금 제자들이 말하는 ‘주의 나라가 임하심이 지금입니까’라는 물음은 그런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시험을 통해 자신들의 우수함이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자신들의 의로움과 저들의 불의함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것이 모든 인간들의 유일한 종교적인 본능이다.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 이것은 신앙심을 갖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적인 본능이다. 신앙 생활을 하는 것도 ‘옳음’을 갖기 위함이다. 기독교를 믿으면 내가 더 옳은 사람이 된다는 발상이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리다’라는 분별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은 “증인”이다.
성경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인간을 심판하시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마태복음 25:31-46을 보자.
나중에 주님이 오셔서 판단하시는데 한쪽에게는 ‘너희가 나에게 잘했다’ 하시고 다른 한쪽에게는 ‘너희가 나에게 잘못했다’고 하신다. 그런데 서로가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언제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놀란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너희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안한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구제를 했다, 좋은 일을 했다’ 하는 문제에 그친 것이 아니라 ‘좋은 일, 구제, 봉사, 헌신 등의 대상’에 더 관심이 많으신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눈에 안 띄는 자이고 도와줘도 별 볼 일없는 자이고 생색이 안 나는 자이다.
지금 주님의 대답은 옳다, 그르다가 아닌 대상에 관한 문제로, 대인관계의 문제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옳음도 그 옳음이 이론적이고 절대적이지 않고 누구에게 했느냐의 문제이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
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
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
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
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9-13)”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 관원들, 종교지도자들의 싸움거리는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였다. 그들은 왜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책망했다. 이것은 죄를 용납하고 함께 죄를 저지르는 공범죄가 아니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호세아 6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라’고 하셨다. 여기서 제사란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 옳음을 증명해 내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나는 옳다, 틀린 일을 행하지 않았다’ 하는 것보다 긍휼이 낫다는 것이다.
남을 멸망시키고 손해를 끼치면서 나만 옳다, 나만 죄를 짓지 않았다는 식으로의 옳음은 성경이 말하는 옳음과는 다르다고 주님은 지적하신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
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
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
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9-14)”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비유는 겸손이나 교만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의 의로움이 왜 평가를 받지 못하는가 그의 의로움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구별해서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렸다’라는 식의 의로움은 성경이 원하는 의로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의 의로움은 그의 의로움이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끼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옳다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여인을 죽이지도 않았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주께서 지금 모든 신자에게 요구하는 성경의 의(義)라는 것은 결국 그를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죄에서부터 돌이켜 살려내자는 싸움이 성경이 원하는 의로움이다. 이에 비해서 인간이 갖는 의는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린 사람입니다. 하나님 빨리 오셔서 내가 옳으니 상을 주시고 저 원수를 멸망시켜 주십시오’ 이것 밖에는 없다면 그것은 의가 아닙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6이하에 나온 질문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있는 제자들에게 ‘지금 당장에 네가 해야 할 일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디까지 증인이 되어야 합니까
그들이 심판을 요구하는 이웃들인 예루살렘, 유대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이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붙잡고 있는 로마를 넘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구하기 위해서 복음은 가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마저도 아시아로 가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그를 칼로 붙잡고 있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꺼내도록 인도하고 계신다. 이것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중요한 내용인 것이다.
성경은 내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내 이웃이 얼마 만큼 이익을 얻고 은혜를 입었느냐로 나의 옳음을 점검하라고 요구하고 있지 나의 옳음이 저 사람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끊임없이 들고 나온 것들을 살펴보자.
안식일 논쟁,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관한 문제, 죄인과 왜 식사를 함께 하느냐는 문제 등등이 모두 율법을 가지고 나오는 문제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
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4-15)”
모든 계명, 율법이라는 것은 전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의로움은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나는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재물을 훔치지 않았다, 살인하지 않았다’와 같이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이웃 사랑의 문제이다. 새벽예배, 철야기도에 아무리 열심히 참석했어도 그것이 주께 다가가는 열심이어야지 남을 판단하는 경지로 간다면 종교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
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
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
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
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1-5)”
지금 이 사람에게 손이 낫느냐 낫지 않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하시나 안하시나를 보려고 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기쁠 것인가 그가 불구에서 나아진 기쁨에 동참하고 그가 지금 불구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간데 없고 고치면 율법을 통해 고소해 죽이리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 유대인 중에 정치적인 한 집단으로서 분리파라는 유명한 정치, 종교적인 집단이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대로 경건하게 살자고 모인 정치적이기도 하고 종교적이기도 한 특별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들이 가진 의가 주를 향한 열심이 주님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옳음, 신앙의 가장 큰 핵심은 한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법을 지키는 마음이 아니다. 악하고 나쁜 길로 가지 못하도록 선한 길로의 안내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
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
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
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
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4)”
사도 바울은 고생고생해서 지금 이 시간까지 와 있다. 그는 죽으면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만날 것이며 지극한 영광과 상급 속에 영접을 받을 것이다. 그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지만 살아있는 것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빌립보 교회 교인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그의 고생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하기 전에 자신이 살아서 이익을 볼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고생의 길도 기쁨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말씀처럼 “내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우리는 그러한 “너희”를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 앞에 우리가 ‘나는 옳고 너희는 틀렸다는 구별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더 살아야 하겠고 더 나를 죽여야겠고 이들을 위하여 더 기도해야 되리라’는 입장에서 그들을 붙잡아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저들은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며 알지 못하여 요청하지 않지만 나는 알고 있기에 홀로 기도하며 안타까와 하며 ‘너 회개하기 전에 죽으면 안돼’라고 부르짖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생에 있어서 신앙의 정당한 방향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용서하며 얼마나 많이 용납하며 기도하며 안타까와 하는 자인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얻게 하며 긍휼과 자비를 펼치기를 기뻐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인격과 표정과 사람의 모든 것을 바꿔 나가도록 채찍질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방향이다. 그럴 때에 우리의 인생이 기적과 환희와 승리로 가득 찰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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