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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대교회 사람들 제 5 강 (행 0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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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8까지의 이 내용에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물질계, 이 세상이 언젠가는 그 역사와 존재가 끝날 날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종말은 오게 될 것이고, 그날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질 것이다. 돌연한 종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점진적으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이 세상의 종말은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끝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곳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기 때문에 끝을 내시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처소, 본향으로 약속된 나라가 올 것이며, 완성될 그 나라를 준비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언제 끝날 것이냐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이 세상이 언제 끝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도래할 나라를 준비하는 것만이 우리의 책임이다.
영원히 주어질 나라에서 우리의 수준, 우리의 모습을 준비하며 그 나라를 건설하며 그 나라에 불러들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아들이는 일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도대체 살아서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기다려야 하며 어떤 일들을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펼쳐보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상세한 조목들을 확인해야 된다.
마태복음 28장은 사도행전 1:8을 확대해서 설명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
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여기에서 세 가지 명령이 떨어진다. ①제자를 삼으라, ②세례를 주라, ③가르치라. 이 세 가지를 우리는 대 위임령이라고 한다. 이 셋 중에서 오늘은 먼저 제자삼는 일부터 살펴보려고 한다.
‘제자를 삼으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태튜어(mathematics)’라 한다. 옛날에는 제자가 되면 그 스승의 집에 들어가서 먹고 살면서 평생을 그와 같이 했다. 부자지간의 밀접한 관계 버금가는 관계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제자라는 말의 의미가 많이 희석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제자,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야 하는 증인이 되는 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어서 우리에게 맡긴 커다란 명령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 속에서 보통 신자들은 전도를 하라, 예수를 전하라,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지금 마태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거기에는 전도하라는 단어를 쓰지않고 제자를 삼으라고 했다. 이렇게 쓴 이유는 주께서 그의 나라를 건설하시며 그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른 우리들을 훈련하시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는 것이다.
‘전도를 한다’는 것과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아주 다르다. 전도는 보통의 경우 선포적일 수밖에 없다.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고 증언하기를 바라는 내용들을 그에게 말이나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나의 존재와 삶의 모습과 모든 것을 바쳐서 상대방을 설득하라는 책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이 제자삼는 일이 없어진 것이라고 본다. 현대인들이 가장 바라는 신앙의 형태는 교회생활에 참여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상태는 신앙의 내용을 듣고 즐기고 돌아가지 그것으로 어떻게 각자의 생활 속에 녹아 내렸는가를 점검받는 일은 거부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내 인격과 삶에서 어떻게 녹아 내리고 있는가를 점검받는 것을 싫어한다. 디도서 1장에서는 교회에 있어야 할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
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
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
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5-9)”
디도를 바울이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장로들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 장로들을 세우는 이유가 저들로 하여금 생명된 말씀의 진리, 신앙의 내용들을 지키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장로는 어떤 사람을 뽑느냐 할 때에 성령이 충만하고 신앙이 좋고 하는 이야기를 쓰지 않고 아주 실제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장로는 그가 갖고 있는 신앙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알아 가장 사랑하는 자녀에게 이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가르치는 자라는 뜻이다. 장로의 기준으로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가장 실제적인 생활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그랬을 때 그의 말이 권위를 갖는 것이다. 교회는 그러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하고 불신자가 있는 세상에 나아갈 때 신자란 바로 그 입장에 서는 것이다.
‘저들은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이며 이 세상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살지 않는 자들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그들의 양식으로 갖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보는 자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생명의 도전을 진리의 자극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에 가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나누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
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
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
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
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17-20)”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배부르고 등 따뜻하기 위해서 공부 열심히 하고 권력 붙잡고 돈을 긁어 모은다. 그러면 신자들은 어떠한가 그것으로도 성이 안차서 예수까지 믿는 자들이다. 왜 예수를 믿는가 하면 배부르려고 믿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길이 아닌 길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저들과 똑같은 길, 똑같은 목적을 두고 똑같은 짓을 하는데 세상 사람들의 총, 칼과 저들이 가진 모든 권세 위에 예수까지 믿어서 기도까지 하며 그 일을 이루려고 한다. 성령까지 받아 남을 해치고 자기가 성공하려 한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독교가 부흥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말씀의 흥왕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흘러 넘쳤다. 그런데 언제나 기독교 역사에서 재미있는 것은 그 부흥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예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달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역사학자들은 어떤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습관화해야 한다고 한다.
내용의 전달 이전에 습관의 전달, 규칙의 전달이 더 급하므로 형식의 전달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형식주의라는 것은 늘 경계를 해야 하지만 형식의 전달이 없으면 내용은 훨씬 더 형식보다 끊어지기 쉽다.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 그들의 신앙을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철저한 의식과 규칙으로 그들에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주의는 문제지만 유대인으로 하여금 유대 민족주의의 신앙이 끊어지지 않게 이어온 유일한 방법이다. 형식주의는 무섭지만 내용주의는 더 무섭다.
전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요구들을 가장 원색적으로 펼쳐야 하는 규칙과 명령으로서의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그 신앙은 자신의 것으로 굳어지지 않는다. 자녀에게 이웃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원색적인 규칙들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성경책이 보이도록 들고 다니라. 그것이 우리를 굳게 만들고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형식주의를 반대하면 내용주의라는 우리의 실력을 무시한 지점까지 끌고 간다. 그러다 보면 신령한 내용들을 고수하는데 손해를 봤다. ‘나는 내용주의자다’ 하면서 많은 형식들을 놓아 버렸고 그 형식을 놓자 그 안에 담을 내용마저도 떨어뜨린 지점에 와 있게된 것을 정직하게 돌아볼 때가 되었다.
설교를 듣고 마음으로 감동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흘러나올 최소한의 원색적인 규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2차, 3차적인 더 높은 차원으로 나가는 것은 더 안된다.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큰 문제는 그 내용이 무엇으로 가야 하느냐는 놓친 채로 열심히 했다는 것밖에 없다는 것으로 본다. 그 감동만이 남아있지 감동한 것으로 내가 바라보는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진전되어지는 것으로 적용된 것이 없다. 늘 그 수준이다. 교회생활에 익숙하고 성경 내용에 익숙한데 사람이 커 가는 것이 없다. 그 목표 지점을 향하여 다가가는 것이 없다. 형식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우리가 가진 내용들을 머리에서 머리로 전달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고 말한다.
제자를 삼으라.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각자가 결정해야 한다. 세상을 살기 위해서 기독교를 들먹이지 말고 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세상을 꿰뚫어 지나가는 사람의 실력과 지식을 이제 겸비해야 한다. 그것이 제자된 사람이다. 우리에게 습관으로 젖어야 한다.
본문 중 여기 ‘증인’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에서 ‘증인’은 헬라어로 ‘마르테르라’인데 이것은 영어의 martyr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martyr는 순교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증인이 되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 사실, 자기가 항복한 그 내용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거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심각한 싸움에 그 심각함이 없어졌다는 것이 현대교회의 큰 병이다.
배가 불러서 그렇게 되었다. 배가 불러지면서 교회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놓아 버렸다. 교회는 치장하기에 바빴고 사업을 하기 시작했고 업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선교가 어떤 국력의 신장같이 교회 실력의 한 모습이 되었으나 사랑하는 마음,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진리의 진리 됨의 폭발력은 많이 희석된 느낌이다.
이것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하면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목숨을 건, 뼈를 깎는 싸움이 아닌 남은 힘의 싸움들이기 때문이다. 잉여분에 관한 것이다. 전도도 선교도 교회에 나오는 것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체력, 경제력, 정신력의 잉여분에 관한 것으로 하지 그것이 없으면 쓰러질 정도로까지의 문제로 충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수준이 낮아서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분명히 그 수준에 와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은 책망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부여받은 명령과 부름받은 일이 얼마나 복된 것이며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 하나의 존재가 얼마나 많은 이웃들 앞에 커다란 문제인가 마태복음 5장으로 결론을 내려보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
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
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
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말로가 아닌 행동으로 이 행동은 또 종교화된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을 의미한다. 말은 곡물을 재는 그릇이다. 말을 뒤집어 놓고 등불을 켜서 그 속에 넣어두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을 비취게 하기 위하여 불을 켜서 가장 높은 자리에 놓는다.
신자를 삼으면 하나님께서 그 신자를 모든 어두운 곳 위에 갖다 놓고 비취게 하기 위해서 그를 빛으로 부르신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왜 우리 자녀가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한 인간이 한 세상 생활,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생활한다는 면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시켜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것밖에는 우리의 자신있는 근거가 없기 없기 때문에 공부,공부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
우리는 신자로서 부족하다.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자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주를 믿으며 주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신자답지 못하다. 우리는 빛인데 연기 외에는 내지 못한다. 완전공해이다. 우리의 특권, 우리의 사명, 우리의 영광된 소망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제자를 삼으라. 이것이 갖는 엄청난 내용들을 다시 되돌아 봐야 한다. 우리는 짧은 인생살이에서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인 것을 놓치지 말고 오늘 배부르기 위해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 때문에 우리의 중요한 목표들과 복된 내용들을 놓치고 사는 것을 부끄러운 줄을 아는 원래의 신자된 자의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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