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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증인3 (행 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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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주님은 우리에게 전도하라, 교화하라, 신자를 만들라 하지 않으시고 제자를 삼으라 하시는가 사람에게는 구원보다는 더 깊은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그의 인격이 되고, 그의 사상이 되고, 모든 면에서 그가 드러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를 삼으라는 내용 속에 구체적으로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세례를 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9,20을 다시 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
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우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야 한다. 제자를 삼은 뒤에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과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오늘은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왜 제자를 삼는데 수반되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려 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피려는 세례를 주라는 내용 속에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성경에서 세례를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한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 몸으로 연합한다. 성경이 하나가 되었다는 얘기를 할 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과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신자끼리도 한 몸으로서 하나가 되었다는 통일성에 관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세례를 주라는 뜻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 몸으로 가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한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 그의 지체로서의 연합, 통일을 말한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몸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라. 그래서 ‘하나’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가 통일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지금의 역사를 끝내고 우리에게 약속된 나라가 언제 시작될 것이냐 하는 시간과 기한은 우리가 정할 것이 아니지만 그 나라는 반드시 온다. 우리는 그 나라에 초대되고 있고 그 나라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이 하셔야 할 부분이 있고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증인되는 일이요, 모든 사람을 제자 삼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일이다.
이것은 지금 어떤 목표를 향하여 우리가 해 나가야 될 일이지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해야 될 일이라는 것은 지금 완성되어 있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세례를 주라는 것은 세례를 줌으로써 제자를 삼는 일이고, 제자를 삼아서 이제 완성시켜야 하는 일의 시작이며 과정이고 방법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받는 것은 복된 일이지만 이제부터 새로운 과제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를 그 몸으로 부른 이 세례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의 말씀을 보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
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유대인들의 집짓는 법은 주춧돌 대신 모퉁이 돌을 놓고 거기서부터 벽을 양쪽으로 짓되 그 큰 돌을 의지하여 건물을 지어 나간다. 밑에 주춧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쪽 코너가 기초가 되는 셈이다. 그 모퉁이 돌이 주님이시다. 그분을 의지해서 거기에서부터 이어져서 그리고 거기에 부름받은 모든 신자들이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이 지어져 간다는 말은 부름을 받아 모퉁이 돌과 연합을 한 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까지이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
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
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2-13)”
우리가 짓는 집에 주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모퉁이 돌이 되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성경은 부름받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고 연합하여 훈련을 받는 이 일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목적이 있는가 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성도들 간에도 하나이다. 이 하나된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
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
로 세우느니라(엡 4:15-16)”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됨을 지키는데 성령의 열매가 동원된다.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고 하나님이 무리를 완성시키려고 하는 목적지는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을 벗어나 영적이고 초월적인 어떤 경지에로의 초대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고 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훈련을 여기서 받는 것이다.
우리는 죄에 빠져 남을 물어뜯는데 익숙해져 있다. 내 마음에 선한 것이 없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에서 우리는 자기를 위하여 쳐 복종시키는 것을 비로소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교회를 요구하고 있고 제자를 삼는 문제에서 교회를 요구한다. 제자 삼으라. 그리고 세례를 꼭 주어 교회에 그를 불러 들이라. 신자들끼리 한 몸이 되는 훈련을 시키라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선한 의도는 있지만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처음에는 열심도 생기지 않고 결심도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겠다고 결심을 해도 되지 않는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열망은 있으나 절대로 의자에 앉지를 못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열심이 실제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들어와서 맨 뒤에 숨지 말고 사람들 옆에 끼어서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라. 이 훈련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을 훈련하는 곳이며 교회가 무엇이 분명히 유지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꼭 알고 넘어가야 한다.
교회는 이 두 가지가 꼭 유지되어야 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훈련을 받아야 된다. 두 가지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수권이다. 또 하나는 그 안에 부름받은 모든 신자들의 동등함과 다양함이다. 이 두 가지를 우리는 지켜야 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
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
로 세우느니라(엡 4:15-16)”
그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그에게서만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어 큰다. 우리 몸을 봤을 때 명령은 머리를 통해서만 떨어진다. 머리에서 명령하지 않았는데 팔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면 병에 걸린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의 최고 병이 무엇인지 아는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신앙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를 떠나서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뺏기 위해서만 교회를 이용하고 있고 신앙을 이용하고 있는 일이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교회를 오고, 자신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마음에 어떤 불안감 때문에 헌금을 내서 때우는 것이 아닌가 오늘 우리는 우리가 세워 놓은 목표에서 기독교를 오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통수권을 인정해야 한다. 그로부터 만이다. 그가 하라고 한 것만을 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지니라’ 앞에서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많이 요구되었던 것이 성령의 열매이다. 힘써 지켜야 한다.
모든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뉘는 곳이니 나뉘지 말아야 한다. 싸워 나뉘기보다는 져서 연합하여야 한다. 교회는 이 훈련을 받는 곳이다. 빌립보서 2장을 보면 신자들의 동등함 신자의 하나 됨에 관하여 이런 요구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
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
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
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
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
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
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유일한 원리가 있었다면 복종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결국 신앙이란 믿음의 싸움이다. 신자들이 왜 주님의 요구를 묵살하는가 교회에서는 주님이 더 잘 아실지 모르지만 세상을 사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안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보다 지혜로우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우리보다 우리를 더 아끼시고 사랑하시며 선하시며 의로우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교회에서 돈내는 것은 쉽다. 사업하는 것이 쉽고 전도하는 것이 쉽다. 그러나 그것 말고 자신이 변해달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최고로 내건 것이 성품적인 싸움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 사람들은 세상을 목표로 살고 있지 않구나 하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악착스럽게 세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살지 말고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주 앞에 칭찬받을 사람으로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에 주님께서 요구한 이 문제들을 싸움의 내용으로 삼아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싸움의 내용은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하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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