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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암소같은 여인들 (암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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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은 언제나 달가운 것은 아니지만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별명 은 흔히 당사자의 모습을 아주 영악하게 표현해 주는 경우도 많아서 정이 들 수 도 있다.

우리들은 학창시절 선생님들에게 별명을 지어준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 다. 성경에서도 가끔 별명을 사용한다. 장난이나 희롱을 위해서가 아니고 관련자 의 모습을 서술하기 위해서이다. 주께서는 별칭의 용어를 아주 세심하게 선택하 셨다. 예를 들면 헤롯을 "저 여우"(눅 13:32)라고 불렀다. 주님은 자기 자신 을 예언의 언어로 표현하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시 22:6)고 하셨 다. 또한 주님의 제자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받았는 데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서 그들의 열정을 가르킨다(막 3:17).

이런 별명들은 그냥 내뱉는 말들이 아니고 성령의 영감에 따라 지어진 이름 들이다. 이같은 별칭들은 본문의 색채를 가미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우리들에 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자들을 보고서 "바 산의 암소들아"라고 한 것도 역시 우리들을 가르치기 위한 영감된 말씀이다. 아 모스는 이스라엘 여자들의 처신에 대해 끄집어 지적할 사항이 있기 때문에 이러 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는 결코 그들을 모욕하기 위해서 이같은 별명을 택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한심한 형편을 알리고 개혁할 희망으로 부득불 싫어하 는 표현을 인용하였다.

흥미롭게도 시 22:12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남자에게 쓰여졌다. 여기서 는 남자들을 "바산의 황소들"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메시야를 적대하는 자들 의 자만심과 세력을 대변해 주는 동시에 그들의 악행에 대한 주님의 의분을 표 출하고 있다.

아모스의 예언이 지닌 문맥에서 볼 때 한 사회의 부녀자들을 "바산의 암소 들"이라고 부른 것은 죄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심각한 말로 들려야 마땅하다. 아 모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무시하는 소위 교양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에게 더 힘주어 말하고 있다. 아모스는 그들을 비웃지 않는다. 그의 말은 상스 러운 언어가 아니다. 그가 드러내고 싶은 점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한 특정 계 층에 대해서 노하시는 이유들이다.

I. 이들은 사치를 사랑하였다.

이스라엘의 부패에 여자들이 끼친 영향이 이제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 여 자들은 "암소들"로 불러졌다. 이것은 사마리아의 멋진 여성들에게 아첨하는 말 이 아니다. "바산의 암소들"이란 그들이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세련되지 않았 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숙녀들은 미끈하고 잘먹는 부유층 들이다. 이들은 물질을 만능으로 삼고 사는 자들이다. 그래서 사치의 새김질 을 잠시도 쉬는 때가 없다. 그들은 점점 더 많이 가져야 한다. 이들은 더 갖 기 위해서 가난한 자들을 얼마든지 억누르고,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 해 없는 자들을 압제한다. 이 여인들은 재정적 안정과 안일한 삶을 누리려는 남 편들의 목표를 그대로 수락한다. 이 여인들은 남편들처럼 도덕적으로 영적으 로 타락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 성취를 위해 "힘 없는 남자"를 짓밟 는다. 이들은 사치를 사랑한다. 그래서 "바산의 암소들"이다.

그럼 이런 부인들이 어떻게 가난한 자들을 억압했을까 아마 십중팔구 간접 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부인들은 "막후"에서 영향을 끼쳤 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래서 이 영향은 왕권의 "배후 세력"이었다고 도 볼 수 있을만큼 막강한 힘이었다. 아모스의 표현에 의하면 부인들이 자기 남 편들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고 명한다. 그러니까 아 내들이 남편들에게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입장이다. 오늘 날 경우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음주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 주색의 욕정을 드러 내는 명찰이다.

우리는 여기서 죄와 죄책에 대한 세 가지 교훈들을 일방적으로 적용시 킬 수 있을 것이다.1) 죄는 항상 손보다는 마음의 문제이다.

남편들은 실제의 착취를 행하고 아내들은 막후에서 모략을 꾸미고 일을 공 작한다. 남편들이 "손의 죄"를 행한다면 여자들은 그런 행위, 곧 악덕과 환락 의 동인이 된다는 점에서 꼭 같은 죄가 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 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여성들에 대해서도 이 말은 그대로 적용된다.

2) 내적 품위가 없어졌을 때에도 형식상의 외모는 바른 모습을 지닐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 라"(1절)고 말하였다. 가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 부 인들은 사실상 사라가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썼던 주( )라는 말을 사용한 셈이 다(창 18:12, 벧전 3:6). 그렇지만 사라가 가졌던 경건의 모습은 없는 자들이었 다. 다시 말해서 이들에게는 경건하게 들리는 외형적인 언사는 있지만 하나님 의 뜻에 순복하는 내적 헌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우리가 말할 수 있는가 아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남편에게 순 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엡 5:22). 부부관계에서 가장 중시해야 하는 것은 하나 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의 계책을 돕고 부추기 지 말고 반대했어야 했다. 남자를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주인이 하나님 의 뜻에 순종하는 일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3) 간접적으로 공범이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직접 어떤 가난한 자를 법에 넘긴 일이 없는 아내라도 남편 과 공모했으면 죄가 된다. 한쪽에서만 시작했더라도 공범자들의 전원이 유죄 를 받는다. 도주용 자동차를 모는 운전수가 유죄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간 은 훔친 물건을 자기 천막 밑의 땅 속에 숨겼었는데 이 행위는 그의 가족 전체 를 공범자들로 연류시켰다(수 7:24). 베냐민 지파도 기브아 사람들이 레위인 의 첩을 강탈하고 죽였을 때 함께 연류된 것으로 간주되어 벌을 받았다 (사 19-20장). 해결되지 않은 살해 사건의 경우에는 어떤 의미에서 공동체 전체 가 책임을 졌다(신 21:1-9). 그런데 이 경우에는 해당 공동체의 죄책이 살해 자 체가 아니고 가해자측에서 집행될 수 없는 공의를 위한 것이다. 한 개인의 죄 때 문에 받는 연대 책임은 공의의 집행을 확보시키는데 의의가 있다. 정부의 사악 한 정책을 반대하지 않거나 그릇된 아들의 죄를 증언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죄 에 동참하는 일이다. "바산의 암소들"은 그들의 남편들이 저지르는 악행을 말리 기는 커녕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더 크게 하라고 부축했다.

본문에서 우리는 결혼 관계가 악행의 온상이 될 때에 무슨 일이 생기게 되 는지를 또한 엿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결혼은 "경건한 삶을 서로 돕 는" 터전이다. 결혼은 사회나 가정을 가진 개인들을 파괴하거나 억누르라고 생 긴 제도가 아니다. 우리들은 사마리아의 지배 계급들의 결혼에서 엡 5:22-24 나 벧전 3:1-7의 말씀에 언급된 품위나 은혜를 찾아볼 수 없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들은 악용되고 가정은 하나님이 아닌 황금의 맘몬신 을 섬기는 곳으로 둔갑되었다. 일상 생활의 모든 면에서처럼 결혼에서도 우리들 은 성경의 반립( )교리에 직면하게 된다. 즉, 결혼관계에서도 빛과 어둠, 그 리스도와 마귀, 하나님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이 대조된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 든 사고와 행위, 모든 야망과 인간 관계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 이 우리들이 받아야 할 또 하나의 도전이다.

II. 죄에 합당한 벌이 임한다(2-3).

주님은 다가올 심판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밝히신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 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2절), 주님은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 가 없으므로"(히 6:13)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신다. 이것은 "모든 다투는 일에 최 후 확정"(히 6:16)이다.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자들을 그리 하리 라"(4:2). "바산의 암소들"은 이제 물고기들이다. 이스라엘은 양어장이고 앗수르 는 낚시꾼이다. 이 비유는 앗수르의 왕이었던 에살하돈(Esarhaddon)이 이집트 를 이긴 승전을 기념하는 센자리(Senjirli) 비문에서 그 배경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이 비문에 보면 에살하돈에 포로된 왕들의 입술에 묶여 있는 줄들 을 붙잡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정복된 백성들이 낚시꾼들의 낚시 바늘 에 걸린 물고기 처럼 끌려간다는 것이다! "바산의 암소들"은 "성 무너진 대로 말 미암아" 끌어내린 후에 "하르몬에 던지"울 것이다(4:3). 아마 이 말씀은 아르메 니아(Armenia)로 잡혀간다는 뜻인 듯하다.

III. 이들의 행동은 교회를 위한 교훈이다.

우리들은 "바산의 암소들"을 대낮에 드러내 놓고 악행을 일삼는 자들로 생 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 보통 사람들이다. 하기 야 이들은 확실히 사회에서 출세한 자들이다. 영향력도 있고, 여기저기 수익성 이 높은 투자도 하면서 인생을 여유있게 보내는 팔자핀 부유층들이다. 대부분 의 서민들은 이런 사람들의 팔자를 부러워하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한다. 이런 부 류의 사람들이 또한 교회를 다니고 있다! 그들은 교회의 기둥들이었다. 게다 가 정규적으로 형식을 밟아 올리는 예배를 꽤 좋아하고 희생제물과 낙헌제를 올 렸다. 그런데 우리들의 경우처럼 그들의 종교는 일생 생활과는 거의 무관한 것이 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헌물도 바치고 예배도 보아 드렸으니까 자기들 이 할 바를 했다는 위안감 속에서 사업에 열중하였다. 문제는 사업과 기타 일 상 생활에서 그들이 구식이라고 말하는 정통 신학의 윤리나 좁아졌다고 멸시하 는 진실된 선지자들의 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교회주의"(Churchianity)이다. 이 런 교회주의는 현대 소비 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바산의 암소"들 문화로서 교회 생활의 독충이다. 교회주의자들은 외형적으로 보면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 다. 예의도 있고 신사적이며 예배에 충실한 편이다. 그러나 입술로만 하나님 을 가까이 접근하고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아무리 겉으로 신앙생활을 잘하 는 듯해도 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된다. 이것은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 다. 십계명의 첫번째 계명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행위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 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 20:3). 그리고 계명 중에서 가장 크고 첫 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라고 하나님께서 지적하셨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 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7:37-38). "바산의 암소 들"은 그들의 이웃들을 제 몸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마 22:39). 그런데 이보다 먼 저 그들은 마음과 몸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이들의 죄 는 우리들에게도 가슴 위에 손을 얹게하는 도전이 된다. 그럼 이들이 어떻게 처 신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 자신들과 교회에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찾아 보자.1) 그들은 가끔씩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 이 금송아지를 섬겼던 장소였다. 그들은 여로보암 1세의 죄를 껴안은 셈이었다 (왕상 12:26-33).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방침이 아닌, 자신들의 방법에 따 라 섬겼다. 하나님이 또 "우상 금지"라고 말하면 그들은 "아니오!"라고 답하 고,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라고 말하면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신 ( ) 신학이 예배를 좌우하였고 성경을 제쳐 놓았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 가 된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까지도 인간이 결정하였다. 하나님을 경배하 는 것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 상에서 조성된 이론과 학설들을 찬양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벧엘과 길갈의 경 배는 성경도 믿지 않고 교리도 그리스도도 없는 20세기 신학들을 붙잡고 사는 현 대교회들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벧엘에 가서 범죄"하라는 말씀은 우리 시대의 공허한 종교에 대한 하나님 의 견책이다.

2) 그들은 여러가지 의식들을 행하였다.

주님은 통렬하게 이들을 나무랐다.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 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당시의 희생제물 들은 매년제였고(삼상 1:3,7,21) 십일조도 해마다 한번씩만 올리는 것이었다(레 27:30). 누룩 넣은 빵은 어떻게 보면 누룩없는 빵을 개선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 른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번제로써 꼭 써야한다고 명령하신 것은 누룩없는 빵 이었다(레 2:11, 7:12-13).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 은 오히려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 이상으로 해 드린다고 생각하였으므로 하나님 이 불평하실 것이 무엇이냐는 태도였다. 하지만 아모스 선지자가 지적하는 것 은 아무리 그들이 갖가지 의식들을 과외로 더 드린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는 사실이었다. 만일 그들이 예배의 빈도수나 그들이 드리는 십일조의 가치가 하 나님께 감명을 주었다고 생각했다면 하나님이 실제로 요구하신 것이 무엇이었 는지를 되새겨 보아야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외형적이고 더구나 비싼 전시 품들을 별로 원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시 51:17)이었다.

3) 그들은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였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 이들의 즐거움이었 다(마 6:1). 우리 주님은 주는 일을 "은밀히"하라고 가르쳤다(마 6:4). 그럼에 도 상당수의 우리 교회들이 아직도 이 말씀을 무시하고 누가 얼마를 내었다고 광 고한다. 심지어 헌금을 내는 자들의 이름이 명판에 새겨질 것을 약속하면서 건 축 모금을 하는 교회들도 있다. 기독교의 자선속에서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 은 갖가지이다. 하나님의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헌금을 각출키 위해 끌어대는 심 리 작전이나 상업적인 프로그램들은 열거하기 조차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런 수단에 의한 헌금들은 "바산의 암소들"이 자랑삼아 내놓는 헌물처럼 주님 의 신실성에 대한 배척이다(마 6:1-18). "은밀히"하는 일에는 마음에 자세나 손 으로 행하는 일이 있어 다같이 남의 눈에 띄이지 않고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 으려는 각오가 선행되어 있다. 이런 자세가 그리스도인의 선행에서 믿음 생활 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교만은 언제나 남의 인정을 희구한다. 그래서 선전을 생 명처럼 여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주님 안에서 은밀히 숨어 있으면 서 주님의 때에 받을 보상을 기다린다(벧전 5:6). 사마리아 여인들에게 결핍 된 것은 심령의 은혜였다. 그들의 행한 외형적 선행들은 모두 자기 의( )를 부 채질해 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다.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 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5).

이스라엘이 이같이 전락되었다는 사실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은 일찌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었고 그들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들 을 체험한 나라였다. 그런 큰 축복들이 내던져진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 가! 그런 생명의 선물들을 내팽겨친다는 것은 너무도 큰 낭비일 뿐이다. 물을 무 서워 하는 한 학생이 있었다. 그는 끝까지 수영장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였다. 그 는 차라리 앞으로 익사하는 일이 있더라도 수영은 안 배우겠다고 고집하였다! 이 처럼 세상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의와 자기 만족의 시궁 창에 익사되는 편을 택한다. 그래서 "바산의 암소들"도 그런 식으로 끝나고 말 았다. 주님은 결코 인간들이 잘못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 의 자멸 행위나 악인들에 대한 그의 의로운 심판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하나님 이 아모스와 같은 선지자들을 보내는 까닭은 심판의 선언을 통해 우리들을 우울 하게 만들고 절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은혜 를 끼치려는데 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우리들의 영혼을 일깨워서 하나님 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곧 수많은 영 혼들을 계속 사랑하시지만 죄인에게는 반드시 벌을 내리시는 분이다(출 34:7).

하나님은 죽음 대신에 생명을 선택하라고 권하신다. 이것이 모든 심판의 예 언이 지닌 역설이다. 예수님은 곧 망하게 될 예루살렘을 향해 다음과 같이 애곡 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 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 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 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마 23:37-39). 주님의 이름으 로 오시옵소서. (소/여자/신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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