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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살길 (암 0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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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멸망되지 않고 영생을 누리도록 하나님의 독생자 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면한다. 세상에는 물론 두려움이 많이 있 다. 하나님의 진노에 벌벌 떠는 두려움이 있고, 하나님의 참 자녀들에게 속 한 "양자의 영"(롬 8:15)과 연관된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두려움이 있다. 그런 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소심하고 불신적인 공포심이건, 경건하고 신앙적 인 개인의 경외심이건 그것들이 "두려움"인 것은 변함이 없다.

이 두려움은 죄를 방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성도 나 불신자의 심령적 상태에 적절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이같은 두려움은 하나님 의 거룩에 정신을 기울이고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 를 깨닫게 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불신자들의 경우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성 령의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 지 않는 한 저항을 받고 놀림을 당한다. 반면 성도들의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마음에 쌓아두고 영원히 구원의 기 쁨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아모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악독한 행위들을 노여워하신다고 선언했 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외심을 겨냥한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아모스 는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본문 전체에서 이스라엘 백 성들이 믿음과 회개로 새롭게 주님께 나와서 두려움을 내쫓는 온전한 사랑을 체 험했다는 암시 조차 없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며 그 사랑 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온다(요일 4:18).

이 역설의 진리는 본문의 대조법에서 거듭 강조된다. "이 말을 들으라" (1절)는 구절은 가장 통렬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을 소개하고 있다(3:1, 4:1).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첫째 부분은 망해버린 이스라엘에 대 한 애가(2절)이고, 둘째 부분(4-17)은 특정한 구성은 없지만 멸망을 목전 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간곡한 호소이다.

여호와를 찾으라는 주제는 8절에서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묘성 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 이 여호와시니라." 이스라엘은 시 23편의 기자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편의 기자와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 구원 을 청하지 않았다. 본 문맥에서는 두 갈래의 메시지가 서로 교차하고 있다. 하 나는 간악한 이스라엘이 반드시 받게 될 멸망의 불가피성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촉구되는 회개와 구원의 긴급성이다.

I.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죽은 교회의 상징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당신들의 관을 들여다 보고 당신들의 영적 상태가 과연 어떠한지 를 직시해 보십시오. 머지 않아 당신들의 육체적 상태도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 다. 이스라엘이여! 계속 그런식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당신들의 장례식 임을 아셔야 합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2절). 이스라엘이 "처녀"라 불리운 까닭 은 순결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 서 이스라엘은 "처녀"이다. 그러나 이 상태가 끝나게 될 것이다. "다시 일어나 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이스라엘은 구 약 교회의 한 "교단"으로써 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현대 교회에서 주시는 경 고의 말씀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사도 요한은 사데 교회에서 보내는 편지 에서 하나님이 죽은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오해의 여지가 없이 이 렇게 피력하였다. 물론 이 말씀은 1세기 소아시아 교회 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 의 교회들에게 해당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 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 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 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 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1-3).

교회사는 한때 번창했다가 지금은 아주 사라진 교인들과 교단들의 기념비 들로 가득차 있다. 이들은 불변의 거룩한 말씀이라고 믿었던 그들 나름의 독특 한 교리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들은 그런 교리들을 고수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 이 갈라지는 것까지도 불사했던 교인들이었다. 왜 그들이 사라졌는가 우리는 여 러가지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교회에 붙어 있지 않았 다." "작은 일들에 마음이 쏠린 시대였다." "교회 건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 다." 결국 한 마디로 교회 소멸 이유를 말한다면 계 2:1-3:22에 기록된 일곱 교 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밝혀졌듯이 하나님의 축복이 거두어졌기 때문이다. "귀 있 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3:22).

그럼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교회들은 어떠한가 본문의 메시지 는 죽고 없어진 교회가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를 향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겉으 로는 퍽 번창했었다. 요즘 교회들도 상당히 많이 번창한다. 그런 교회 내에는 여 러 종류의 프로그램들과 기관들이 잘 짜여져 있고, 갖가지 활동들이 많으며, 주 일 예배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은" 교 회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교회 출석 인원이나 헌금의 통계로 본다면 결코 그 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의( )와 인 ( )과 신( )"을 추구해야 한다(마 23:23).

현대 교회 생활의 피상적인 포장성에 대하여 헤르만 뵐트캄(Herman Veldkamp)은 드고아의 농부(The Farmer from Tekoa, p 153)라는 그의 저서에 서 이렇게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요란한 박수 소리 가운데서 어디로 가보아 야 조용히 피어오르는 성도의 삶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시끄러운 송축의 열 기 속에서 어디를 가봐야 예수 그리스도의 산 증언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온유 한 기도 생활과 믿음의 성숙한 내적 열매는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의 경제적 번영과 군사적 용맹과 포장적 영성은 나라를 구할 수 없 었다. 패배의 통계표가 이스라엘의 침통한 현실을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스라 엘 중에서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명만 남고 백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명 만 남았으니"(3절).

II.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4-17).

하나님은 다시 한번 교회에 도전하신다. 본 문맥은 이스라엘의 멸절 이유 들을 열거하고 회개를 화급히 촉구하면서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아모스 선지자 의 시선을 끌게 한 문제점들은 거짓 종교(5-6절, 3:14, 4:4-5)와 사회 불의(7절, 10-13절, 2:6-8, 3:15, 4:1)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중요한 측면들 을 살펴볼 수 있다. 이것들은 각기 우리들의 현 상황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 을 제공해 줄 것이다.1) 인조품 종교의 허구성(4-6절).

이스라엘에는 종교 활동이 활발하였다. 희생 제사와 십일조와 기타 헌물들 을 바치는 의식들이 즐비한 곳이 이스라엘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담 긴 약속들과 스스로의 종교적 행사들을 놓고 위로를 받았을 것은 당연하다. 이스 라엘 백성들은 길갈과 벧엘에서, 그리고 심지어 예루살렘 최남쪽에 있는 브엘세 바에서까지 예배를 올렸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경배해야 한다 고 명령한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따져보면 그들은 나름 대로 "진지한" 성도들이었다. 현대식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가끔식이나마 교회 에 출석하였다.

오늘날의 이름만 교인인 사람들이고 고작해야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형식 적인 헌금이나 하고 나오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안일한 종교생활을 택하였 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들에 간섭을 받지 않고 동시에 내 세에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 정도라고 판단되는 범위 내에서 신앙생활 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마음과 정신의 쇄신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 한 도전을 결코 주는 일이 없는, 형식에 불과한 종교 의식들을 지키면서 하나님 과의 관계가 양호한 편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담긴 약속들 은 선뜻 수락하면서 언약의 규정들은 백안시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언약 백성"이라는 특권 의식 속에서 신기루처럼 사는 존재 들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불신과 어리석음에 너무도 눈이 멀어 지옥으로 떨어지 면서도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 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항의할 것이 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어떻게 답변하실 것인지 알고 있는가 "내가 너희를 도 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시라"(마 7:22-23).

2) 회개치 않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8-13,16-17).

아모스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 같지가 않 다. 본 문맥의 마지막 두 구절(16-17절)은 패망한 이스라엘에 대한 첫번째 애 곡보다(2-3절) 더 절실하게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해 준다.

"모든 포도원에서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 라."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애굽에서의 유월절을 상기시켜 준다. 그때 주님은 애 굽의 장자들을 죽이시면서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그냥 넘어가셨다. 그러나 여기 서는 주님이 이스라엘을 "통과"하신다. 이번에는 잘못한 쪽이 이스라엘이기 때 문이다. 애굽에서는 희생제물의 피를 이스라엘의 문설주에 발랐다. 이것은 백 성들의 죄를 대속한다는 상징이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서는 대속의 피가 문설 주에 발라지지 않았다. 즉, 백성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 는 믿음을 소유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 하나님 이 죄라고 부른 것까지도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으로는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었다.

아모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영감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 의 예언들이 지닌 재앙의 불가피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역 이 부흥이기 보다는 심판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아모스는 축복이 없다 고 절망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무리 이스라엘이 간악하지만 하 나님은 그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으셨다.

3) 거저 주시는 복음(4,6,14-15).

신약에서 말하는 복음의 골자는 예수님의 피가 죄인들을 위해 온전히 충분 하며 일회적으로 종결된 희생적인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리 는 아모스의 설교에서 아직도 더 드러나야 했다. 그래도 아모스는 구약의 모형 과 그림자들이 주는 빛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6절)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더 없이 명료한 초청이다. 이것은 곧 삶에로 의 초대이다. 이 이외의 것은 벧엘에 있는 자유주의 성직자들의 매끄러운 사역 들을 포함하여 모두 죽음으로의 초대이다. 구원의 길에는 중립이 없다. 회의주 의자들은 그들의 의심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위선자들은 그들의 외적 경건으 로 구제될 수 없다. 주님이 당신의 구주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당신 은 영원한 지옥에서 상실될 것이다. 구원에로의 부름은 아모스 선지자의 반복 적인 권유에서 더욱 간절해진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 라...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4,6,14). "나 를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개인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자신을 야훼라 고 계시하신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처음부터 그를 믿는 백성들에게 사랑을 쏟으 셨다. 이 하나님은 또한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죄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 에 사람들에게 "악이 아닌 선"을 구하라고 요청하신다.

위에서 살펴본 세 가지 측면들, 즉 거짓 종교, 회개치 않은 죄에 대한 하나 님의 심판, 복음에로의 초청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갖는 사역의 긴 장 요인과 난점들을 생각해 보게 한다. 아모스의 사역은 이 점에서 매우 교훈 적이다. 만약 어떤 사역자가 회중으로부터 자기 메시지에 대한 거부를 받았다 면 그 사역은 아모스를 닮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만일 자신의 사역 에서 격려와 인내를 통계상의 성공에다 묶어둔 경우였다면 회중들로부터의 적극 적인 반응의 결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기진한" 사역자들의 대열에 곧 끼이 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모스 선지자는 자신의 사역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의 사역은 비록 은혜와 승리의 약속을 제공하긴 했지만 대체로 심판을 강조하 는 사역이었다. 이렇게 볼 때 아모스의 기대는 사도들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내려 오는 복음 설교자들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아모스는 구약의 모형과 그 림자들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 활하신 구주 예수에 대한 충만한 계시와 오순절 이후의 성령의 부으심으로 그리 스도의 완취된 승리와 그의 임박한 재림을 선포한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아모스 로부터 오늘날의 사역을 위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사람들에 따라 언제나 상반된 반응을 일으킨다. 이 세상은 복음 메시지를 듣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죽는다. 이 세 상은 복음을 거부하게 되어 있다. 복음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최대의 변 화, 곧 어둠에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나오기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구 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 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들에게는 생명으로 좇 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후 2:15-16). 어떤 이들은 복음을 듣고 자란다. 그 러나 어떤 이들은 시들어 버린다.

사역의 신실성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 는데 있다(고전 2:4).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그러나 자라나게 하 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고전 3:6). 메시지를 듣고서 그리스도를 따르려 고 나아오는 자들은 사실상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 는 사역의 결과이다(요 6:44, 요 3:6-8). 이것은 택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 이 서게 하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뿌리를 두고 있다(롬 9:11). 사역 의 신실성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완벽하게 성취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하나 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신뢰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속 목적의 승리는 보장된 것이다. 아모스의 입장에 서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8세기 이후의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아모스 는 믿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내다보았고, 주께서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을 알 았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두 강림 사이에서 살고 있다. 즉, 십자가와 부활 이 후의 강림과 세상 끝날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에서 산다. 그러므로 구원 의 메시지의 사역은 사도 바울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이다. 은혜 의 복음은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향기"가 되어 현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인류 에게 퍼져 나갈 것이다(고후 2:14).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이기셨다. 그리스도 는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엡 1:22)이시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모두 자 기에게로 모으시기 위해서 다시 오신다(살전 4:16-17).

아모스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진리를 선포하였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 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섰다면 그는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즐거워했을 것이 다. 한편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죄 속에 빠져 계속 죽기를 고집했다 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은혜로운 구원의 목적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 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따라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을 알았다 (롬 11:5). 그는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갱신될 것 을 알았다(암 9:11-15). 아모스는 또한 때가 되어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사망 의 그늘"이 "영원한 아침"이 될 것도 알았다(8절).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된 메시야이시다. 예 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돌아가셨다. "가라사대 내가 은 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 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다른 이로서 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 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 하면 살리라!" (찾다/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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