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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시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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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인 주기도를 연속해서 묵상하는데 지난 주일에 이어 두번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는 부분을 생각하겠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란 말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먼저 “이름”이란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렇지만 이름이란 단순히 누구를 부르기 위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인격을 말하고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존재(Being)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2:19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동물들을 이끌어 오게 하시고 이름을 지어주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동물들을 구별하는 호칭을 주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동물의 존재에 대한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이름에 관해서는 이보다 훨씬 더 진지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같은 사람의 이름이 바뀐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었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요나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이들의 이름이 바뀔 때는 그들의 삶의 의미와 목적까지도 바뀌었습니다. 이를테면 사울이 바울로 바뀔 때는 자기를 하나님앞에서 큰 자로 생각했던 교만을 없애고 자기를 하나님앞에서 지극히 작은 자로 여기는 겸손한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할 때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인격이 마땅한 대우를 받게 하라, 즉 인간은 하나님의 인격에 마땅한 대우를 해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은 하나님의 인격에 마땅한 대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격에 마땅한 대우를 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거룩”이란 말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원래는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아무리 가깝지만 엄연히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까운 것은 가까운 것이고 존재가 다른 것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은 인간과는 엄연히 다르다.”란 뜻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피조물은 어떤 것이라도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란 것은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의 일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랬을 때 인간세상에서는 불평등이 생기고 한 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는 억압이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힛틀러 치하에서 나치독재에 저항했던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을 묘사해서 “절대타자(絶對他者)”라고 했습니다. 바르트가 하나님을 “절대타자”라고 전혀 타협불가능한 한 어조로 아주 강력하게 표현한 이유는 바로 히틀러가 하나님의 행세를 하던 역사적 정황에서였습니다. 바르트는 독일국민이 히틀러를 마치 하나님처럼, 구세주처럼 생각하려고 하는 풍조가 일던 상황에서 “하나님은 절대타자이시다.” 즉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자리에 갈 수는 없다고 강력히 히틀러독재체제를 비판했던 것입니다.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 존재가 상당히 많습니다. 인류역사 속에 나타난 수 많은 독제자들이 다 이런 범주에 속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행위도 바로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강요할 때, 즉 자기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며 섬김을 강요할 때 이것도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인간과 구별되는 존재이며 모든 인간은 평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류의 평등정신이 벌써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마져도 제자들과 나란히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이름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그런데 감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섬기도록 강요합니까 어떤 경우에 교회에서까지 직분의 고하를 의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집사는 평신도보다 높고 장로는 집사보다 높고 목사는 장로보다 높고...”하는 식은 주기도앞에서는 불경에 가까운 의식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과 구별되는 존재인 것이고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는 평등한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기도하라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여기지 말라는 의미와도 연결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14편 말씀은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약 6년전, 지금은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인종분리정책으로 백인들이 흑인들을 엄청나게 억압하고 있을 때 이 인종차별에 대해 싸우던 한 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제가 통역으로 동행하면서 함께 광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그 때 80년 광주사태를 자기 나라의 스웨토(Sweto) 사건과 같은 맥락에 두었습니다. 스웨토사건이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정권의 억압에 대해 봉기한 흑인학생들을 무차별 사격으로 수천명이나 살해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과 광주사태를 나란히 연결하면서 그 목사님은 이 일들은 “하나님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지 “하나님이 엄연히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저지를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기록중에 하나인 유태인 600만명 학살은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독일 나치주의자들이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했으면 절대로 이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무시하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얼마전에 94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한국에 온 적이 있습니다. 이 작가는 요즈음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이 일본의 조선식민지는 결국 조선에 유익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에 저지른 만행을 참회하지 않고는 다른 아시아나라와 공존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한 드문 일본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분이 아마 85년엔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시인 김지하씨를 찾아와서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인터뷰의 내용은 “히로시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여 히로시마에 대한 동정을 받자는 것이었습니다. 김지하 시인은 질문을 받자 말자 대뜸 극렬하게 저항하듯이 “일본은 히로시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 전에 30만 남경학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일본에 끌려간 20만 조선정신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먼저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남경학살이란 것이 무언인지 아십니까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하고 부녀자를 모조리 끌어내고서 일본군인들이 줄을 서서 강간을 하고서는 마지막 군인이 칼로 살해하는데 그 숫자가 30만명이란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면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수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인간이하의 삶을 살도록 억압받는 현장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고 기도하라고 할 때 무조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올리고 찬양하라는 의미만을 뜻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수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회에서 인간이하의 삶을 살아가도록 억압하는 현장을 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과 창녀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행동의 이면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바로 종교인으로 가장 의롭다고 자처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인이라고 규정지어 놓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규정지어 놓은 사람 만을 예수님은 가까이 하고 사랑했습니다. 때로는 그들의 심성이 바리새인들의 심성보다도 더 낫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보다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가슴을 치는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은 더 어여삐 여기시고 받으시며, 바리새인들의 과시하듯이 바치는 헌금보다는 과부의 엽전 두 닢을 하나님은 더 기꺼이 받으신다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시던 예수님의 그 심정이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이 버린 사람들을 하나님은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오늘 읽은 시편 말씀에도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도다.”하고 또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했습니다.

주기도에는 인간의 인권과 존엄성이 망각되지 않도록 구하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주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는 마태복음의 문맥은 바리새인들의 신앙관념을 통렬히 비판하는 것과 맥을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주기도가 들어 있는 6장 9절 전과 14절 이후를 읽어보십시요 전부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통렬한 비판이 담겨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리나 죄인이나 창녀들의 인권을 빼앗고 자기들만 의롭다고 스스로 자신을 찬양하는 바리새인들을 옆에 두고 주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고 기도하라고 일렀습니다. 여기에서 주기도는 “이들의 인권이, 이들의 존엄성이 망각되지 않게 하옵시며...”하는 메아리(Echo)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계시는데 인간이 함부로 심판하지 말라는 뜻도 있지 않겠습니까 생태계 파괴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않는 인간행위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인권적 차원외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인간의 행동이 너무나 많은 것을 봅니다. 생태계파괴도 그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정원에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마구 나무를 자르고 꽃을 꺾으면 엄청나게 화를 낼 것입니다. 만약 내가 정원에 있는데도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그런 짓을 하면 나를 무시한 것으로 여겨서 화가 머리끝까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후 보기에 좋다고 하신 이 생태계를 우리는 마음대로 잘라내고 밀어부치고 해서 지금 엉망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만드신 이 정원에 엄연히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기도해야 하는 주기도에 대해 정확하게 적대되는 행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순절은 인간이 거만하게도 하나님의 자리를 점유한 것에 대한 참회를 의미합니다.

혹시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까 남이 나를 섬기기를 바란 적이 없으며 남이 나를 섬기지 않는다고 억압한 적은 없습니까 혹시 우리는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계시는데도 마치 하나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것 처럼 행동한 적이 없습니까 깊은 참회가 있는 사순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점유한 것에 대한 참회의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199

5.

 3. 12 사순절 둘째 주일 부산진교회 박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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