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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에 오시는 예수의 모습 (사 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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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 왜 세속적인 축제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저는 회의에 빠 지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세상 사람들 의 축제는 너무나도 다르고 너무나도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오 신 예수님은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도저히 유대 민족을 구원할 왕이 아니셨습니다. 또한 그 분의 모습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의 모습도 결코 아 니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에서 구원 받은 기쁨과 은혜를 도외시 하고 흥청거리는 축제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여져 있었습니다.(마 2:)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어 서' 였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오실 때에 세상은 그를 알지 못 했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왔지만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환 영하거나 영접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무관심과 냉대와 멸시 그리고 무서운 음모가 이루어지고 있는때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는 몰 락해 버린 옛 유대 왕가의 이름없는 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을 뿐입니다.

메시아라고 하지만 오시는 그 분의 모습은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 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 서 그 분께서는 멸시와 천대, 따돌림,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는 그가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단순한 종이 아니라 '고난받는 종' 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그 종이,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로 오신 것입 니다. 아마 이것은 세속적인 견해에는 너무나도 맞지 않는 이야기일 것입니 다.

오늘의 세상은 힘과 권력과 자기 자랑과 자기 도취속에 사는 세상입니다.

외모가 위엄이 있고 풍채가 당당할 때 사람들은 그 권위에 위압 됩니다. 세 상은 그런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그는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라고 하였습니 다. 사막같이 마른 땅에 힘겹게 뿌리를 내리고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늙 은 고목에서 간신히 돋아난 약하고 가는 한줄기 생명, 그 누구도 눈여겨 보 지 않는 보잘 것없는 모습 그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은 예수를 세상에 보 내셨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를 믿었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았습니 다.

또한 오늘 이 새대 사람들은 무슨 이익이 보장되어야만 그것을 따르고 그것을 흠모합니다. 사람마다 이익을 추구하고 모두 자기의 영광을 얻기만 바랍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도 자신의 행복과 유익을 조건으로 하려는 사람 들이 많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 니하였도다.(사 53:3) 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습니다. 아무도 그 를 귀히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지금 이 말은 마치 문둥병자나 더러운 물건을 본 것같이 질겁을 해서 피해 버렸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 누가 그를 따 랐겠습니까 또한 오늘 이 시대는 이웃과 타인에게 무감각하고 냉담합니다. 극도로 자 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시대입니다. 다른사람 때문에 내가 짐을지는 일이 불 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 픔을 당하였다'(사 53:4)고 하였는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서 하나님에게 매를 맞는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탁치 않고 께름칙하여 세상은 그를 버렸고 사람들은 다 그를 떠나갔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증언하는 예수의 모습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이시 대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시는 그 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 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보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자가 되 겠는가, 하나님은 그 아들을 왜 그렇게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보내셨는가 하 는 것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그 분 은 만왕의 왕이시요 만 주의 주이시지만 지극히 비천한 종으로 오셨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의 모습'을 보게 됩니 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 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음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 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 고 하였습니다.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 랑은 그 뜻을 받들고 순종하는 종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불순종한 한사 람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게되었고 순종하는 한사람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사람은 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인류가 아무리 자기의 능력과 성공을 자랑하고 성취감속에 취해 있더라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역사와 그 문화는 결국 어디로 갈 것입니까 그 종국은 자기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참한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 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이끌어져 왔습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 고지를 받았을 때 무서워하 고 당황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못함이 없는 것을 믿게된 순간 그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7)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둔 겟세마네의 마지막 기도에서 '가라 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 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실로 '인간 예수'로서는 너무나도 어려운 결단이었을 것입니 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종으로 그 책임을 다하기를 원 했습니다.

사람들은 반항과 거역과 항거로서 자기들이 강자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역사는 반항하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하 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의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십 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높고 영광스런 보좌를 버리고 오신 주 님, 비록 사람들 눈에는 초라하며 보잘 것 없고, 멸시를 받을 수 밖에 없으 셨으나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이루려고 오신 고난의 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챤의 참된 모습과 그 사명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오시는 그에게서 '제물 되신 자'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기의 힘과 실력과 업적과 자랑에 취하여 살면서, 동시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번민속에서 고민하면서 삽니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문제 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걷잡을 수 없이 발생합니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고하니 그에 역 행하는 비리와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오히려 더 자꾸 생겨나고 있는 듯 합니 다. 한마디로 훨씬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렵고 심각한 사회적인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라고 하였습니다.(렘 8:11) 이것은 근본적인 치유의 길을 외면한 거짓치료를 책망한 예언자의 말입니다. '정말 이대로 좋 은 것이냐, 진정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느냐, 참으로 평강이 있는 것이냐 라 고 할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여야 합니까 겉으로는 눈부신 발전을 보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손도 댈 수 없는 심각한 문제들이 얼마나 많습 니까 그 해결의 길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누군가가 이 시대를 구원하는 제단에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과감히 자기 몸을 불살라 제단에 태워 없애는 그러한 용기와 또 그러한 자격이 있는 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가 과 연 그가 누구입니까 모든 문제들의 치료는 '심상히 고쳐주며 평강하다고 말하는' 거짓 의원들의 속임수로는 않됩니다. 이것은 그 누군가가 제단의 희 생물이 되지 않고서는 않되는 일인 것입니다.

인간을 사망으로 몰아넣는 죄 문제의 해결은, 그 댓가로써 피흘리는 희생 없이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히 9:22)고 하였는데 누가 피흘릴 것이며, 또 자기가 피를 흘림으로써 남을 구 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자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말만으로 되는 것이 아 닙니다. 큰 소리를 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피흘리는 제물 그 자 체가 되야만 합니다. 죄는 반드시 죄의 값인 사망으로 치룰 수 밖에 없습니 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물로 오셨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 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 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 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 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말의 참된 뜻은 여기에 있는 것 입니다. 그는 우리가 받을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것을 그가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가 찔린 것은 내 허물 때문이었고, 그가 상한 것은 내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내 대신 징계를 받으셨기에 우리가 오늘 평화를 누리고 삽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셨기에 우리는 모든 질병과 고통에서 놓임 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사람들이 극단의 이기주의자가 되어 자기의 욕심과 욕 망을 채우려고 남을 희생시키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험악한 시 대에 우리 크리스챤의 사명은 예수의 대속적 고난을 생각하고 거기 감사 감 격하면서 그의 뒤를 따르는 것 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 다'고 하였습니다. 속죄 제물이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성서는, 그리스도가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 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 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었다.(벧전 2:21) 고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히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 밖에 무엇이 있겠 습니까 셋째로, 오시는 그 분에게서 우리는, 남을 위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진 대 속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일찌기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부딪치는 것은 '그 짐을 누가 질 것이냐' 하는데 대 한 문제입니다. 대책도 없고 책임질 자도 없습니다. 도무지 그 누구도 짐을 질 생각을 하지않습니다. 아니할 뿐만 아니라 못합니다. 못할 뿐만 아니라 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이 짐을 지워야 합니까 우리들 스스로는 도저히 질 수 없는 짐들, 국가도 감당못할 어려운 짐들, 메어 줘 보앗자 무 거워서 질 수도 없는 짐들 아닙니까 사람들의 짐이란 결국 '죄의 짐'입니다. 사명과 책임과 보람을 성취하는 짐이라면, 그것은 영광이요 기쁨일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짐이 문제인 것입 니다. 죄의 짐만 벗어 놓으면 다른 짐들은 능히 우리가 짊어지고 갈 수도 있 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겁고 고통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죄의 짐을 하나님 께서는 모두 고난의 종이신 예수님께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양과 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라고 성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은혜스러운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신 그 분은 내 짐을 벗겨 주시는 구 주이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 오시는 주님은 우리의 짐을 벗겨 주시는 짐꾼으로 오십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죄 짐을 벗겨 주시면 우리에게 어떤 짐이 지워진다고 해도 기쁘게 홀가분하 고 유쾌하게 짊어지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크리스챤의 사명 은 남의 짐을 서로 짊어지는 성실한 짐꾼들이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 이 그가 우리에게 보이신 삶의 길입니다.

평화의 왕이 오시는 기쁜 성탄절에 지금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만한 아름다움도 없어 보이는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높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 들이 우리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요한은 그 모습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 신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요 1:14)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영광이요, 그것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주와 역사와 세계를 구원할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 리가 당면한 현실의 문제도, 종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순종과 희생과 대속자 로서의 사명을 알게될 때 참된 구원과 해결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 합니다. 이렇게 오시는 주님을 진정으로 맞이하며 부족하지만 그 영광스런 사명에 참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런 은혜와 기쁨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 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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