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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언서 연구21 (잠 24: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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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의 보금자리를 노리지 말고
그가 사는 집을 망쳐 놓지 말아라.
나쁜 사람은 재난을 만나 망하지만
착한 사람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24:15)
인간의 역사는 선과 악의 싸움의 역사이다. 그런데 악이 선을 이긴다는 데 인간역사의 비극이 있다. 마땅히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는데 현실은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인간역사에는 진리와 평화가 없다. 진리와 평화가 없으니 사람들은 불신과 미움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선이 악을 이기게 되어 있다. 그래서 착한 사람의보금자리를 노리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카인은 아벧을 죽였다. 그러나카인은 하느님의 역사에서 밀려나고 "셋"이 새 역사의 주인으로 등장했다. 카인의 후예는 살인과 복수의 위협 속에 살게 되었으나 셋의 후예는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
인간사회의 멸망과정에 나타난 첫번째 징후는 폭력과 불법이 난무하는현상이다. 그리고 거짓선지자들이 판을 치게 된다. 그래서 난세가 되면착한 사람들은 숨어 버리거나 희생당하게 된다. 선인과 의인이 없는 사회는어둠의 권세가 주관하게 된다. 이런 세상의 마지막은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그것이 민심을 억제하고 불의를 정당화하는 최후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처에 거짓선지자와 위선적 지성인들이 등장하여 온갖 요설로 사람의 마음을 혼란케 하여 백성을 어리석게 만든다. 그러나 착한 사람은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이 인류의 경험이다.
(24)
"원수가 넘어졌다고 좋아하지 말고
그가 망했다고 기뻐하지 말아라.
야훼께서 그것을 못마땅하게 보시고
네 원수에게서 노여움을 돌이키신다"(24:17-18)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신명기 32:35) 그래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마태 5:43-)고 말씀했다.
사도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로마 12:19-20)고 말했다.
원수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 주라는 것은 예수의 교훈이요 사도들의 권면이다. 그러므로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에 대한 반역이 된다. 원수를 이기는 길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다. 그것이 성서의 진리이다.
만일 원수의 불행을 통쾌하게 여기고 기뻐한다면 하느님께서 못마땅하게 보시게 된다. 또 그것은 원수를 이기는 길이 되지도 못한다. 또 하느님께서도 원수 갚으시는 일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원수의 불행을 마음속 깊은 데서 동정하고 위하여 기도해 주신다. 원수 갚는 일은 하느님께 맡기라 하셨으니 그대로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순종이다. 만일 원수의 불행을속으로 좋아한다면 원수 갚으시려던 하느님께서 그 뜻을 돌리키게 된다. 얼
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25)
"재판할 때 공정하지 못한 것은 옳지 않다.
죄인을 죄없다 하는 사람은
백성들의 저주를 받고, 뭇민족의 비난을 받는다.
죄를 바로 가려 내는 사람은
칭찬을 받고 복도 받으리라"(24:23-25)
건전한 사회를 이룩하려면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 정의를 구현하는데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길은 재판을 바로 하는 일이다. 죄인을바로 찾아 내고 무죄한 자를 죄인으로 몰아붙이지 않는 일이다. 그래야 백성들이 안심하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재판이 정치도구화된 사회에서는불의와 폭력이 다스리게 될 뿐이다. 그래서 사법부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다.
재판이 공정치 못한 사회는 백성들의 저주를 받게 된다. 그것은 민란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세계인의 비난도 받고 웃음거리도 된다. 한 때영국의 한 기자로부터 우리나라는 모진 비판을 받았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 통에서 장미꽃을 찾는 것과 같다." 얼마나 부끄럽고 모욕적인 비판인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말은 30년이 지난 오늘에도적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5공 처리문제, 10월 유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아직 우리들은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진정 복있는 민족, 칭찬받는 민족이 되는 길은 재판에 있어서만은 정의가 구현되는 일 뿐이다.
(26)
"바른 말 해 주는 것이 참된 우정이다"(24:428)
사람은 어머니 젖꼭지에서 입을 떼는 순간 부터 친구를 찾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친구와 가장 오래 살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친구 보다 다른 것을 더 소중히 여긴다. 혈족이라든지, 재물과 명예 같은것을 위해 친구를 버리는 수가 많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특히 사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귀한 존재는 친구이다. 친구의 도움이클 수록 사람의 사회생활은 향상되고 안전해진다. 그러므로 친구끼리 나누는 우정은 영원해야 한다. 친구를 배신하는 것은 친구가 원수로 변케 하는 일이다. 친족끼리는 싸워도 친족이지만 친구 사이는 싸우면 원수가 된다.
참된 우정은 친구에게 듣기 싫은 말이라도 바른 말을 해 주는 것이다.
친구의 패망을 보면서도 무관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정이 아니라 친구를이용하며 산 증거이다. 친구가 친구인 것은 서로 믿는 것이다. 서로 믿는사이이기 때문에 친구의 패망을 좌시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말씀했다.(요한 15:13) 또 그렇게 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했다. 가장 큰 사람도, 예수의 친구가 되는 길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데 있다. 그러므로 참된 우정은 듣기 싫어하는 말도 바른 말은 들려 주어야한다. 이것이 성서의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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