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지혜 (잠 03:13-18)

첨부 1


이 두 본문은 지혜를 발견한 자들에게 그것이 부여해 주는 지 혜의 덕목(德目)들을 찬양하고 있다(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지혜 는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한 여인으로 의인화할 수 있다).

지혜의 신학(wisdom theology)의 전개에 있어 세 가지 구별되 는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A) 지혜는 인간의 통찰력으로서 일 반적으로 속담이나 간결한 금언이나 수수께로 표현되어 있다(예:잠 15:1). (B) 지혜가 의인화될 때(행운 부인, 자유 양 孃 처 럼), 그것은 창조주의 의지와 일치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성서 이후의 유대교(post-biblical Judaism)는 이러한 의미의 지 혜를 토라와 동등시하기 시작했다(시락서 Book of Sirach 참 조). (C) 마지막으로, 지혜는 본래부터 신적인 존재로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지혜를 나타내는 전문적인 용어는 휴포스타시스 (hypostasis, "본질"의 뜻)이다. 이러한 지혜는 지혜서 7:22-28, 특히 25-27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지혜는 히브리서 1:1에 나오는 선재하시 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고 있다. 요한복음의 서문에도 비슷한 사상이 깔려 있다.

잠언 3:13-18은 지혜를 발견한 자를 축하하고 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의 재가(裁可)를 받은 신중함과 통찰력을 말한다. 이 구절 은 히브리 시(時)에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흔한 요소라 할 수 있 는 방법 곧 일련의 병행 싯귀들을 병렬(竝列)시키는 방법으로 구 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각 절(節)이 그 자체로서 완전한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두 번째 싯귀는 첫 번째 싯귀의 의미를 알기 쉽 게 풀어 쓴 것이다. 어쨌든 지혜로운 자는 선하고 보상받는 삶의 방식을 발견한데 대해 다각적으로 축하를 받고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본 문을 포함한 시락서 이전의 지혜 전승은 이 지혜를 율법(토라)과 연관시키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대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나게 된 이 양자간의 관련성을 오늘 본문에 적용시킴으로써 마치 본문의 내용이 "하나님의 율법(이를테면, 십계명이나 산상 설교)을 지키는 자가 축복받는 삶을 누릴 수 있는 현자(賢者)이 다"라는 것인양 착각해서는 안 된다. 둘째, 욥기나 바울의 신학 이 분명히 밝혀주고 있듯이, 이러한 인생관은 한계를 지니고 있 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혜의 신학에는 로마서 5:1-5과 비견 할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지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기 때문에 잠언 3:19-20에서 하나 님이 "지혜로"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 나 이것은 지혜서 7:25-27에서 말하는 신학적 관점과는 다르다.

지혜서에서는 지혜란 창조에 있어 하나님의 대리자이신 선재하는 존재를 지칭하고 있다. 선과 악은 모두 응당의 보상을 받게 마련 이라는 간단한 원칙은 사물의 본성에 근거하고 있다.

지혜서 7:7-11에서 독백하고 있는 화자(話者)는 비록 역사적 인물인 솔로몬은 아니라 하더라도 현자인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 께서 지혜를 구하고 있는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는 점에서 지혜서 의 본문은 잠언 3:13-20을 넘어서고 있다. 지혜서에서는 지혜란 성공적인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제 2주제:히브리서 4:12-16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우월하시다는 것을 논증한 다음(히 1-2장), 저자는 히브리서 전반에 걸쳐 두드러진 주제를 시작한 다. 곧 모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월성이라는 주제이다(히 3:1-6). 히브리서 4:12-16은 하나님의 계시의 능력이라는 전혀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다.

히브리서 3:1-6에서는 기독론적인 논증이 권면의 역할을 하고 있다(이 논증은 3:12-19에서 발전되며, 특히 4장에서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보다 명확히 이해함으로써 보다 많이 충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것은 틀림없이 세례 식 때의 신앙고백의 내용이었을 것이다-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 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이 신학자 (히브리서 저자-역주)에게 있어서는 중심적인 모티프(motif. "주 제")이다(예:4:14-5:10).

히브리서 3:1-6의 배후에는 민수기 1:7-8이 있다(RSV에서는 "나의 온 집을 맡은" entrusted with all my house 이라 번역 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인용하고 있는 70인역 LXX 에는 "충성된" faithful 즉 "신뢰할만한" trustworthy 이란 의미 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상을 통 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는 선지자들과 모세가 대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는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오늘의 본문이 매어달리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계시가 어째서 모세의 계시를 능가하는가 하는 것이다.

첫째, 비록 두 사람 다 하나님께 충성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충성된 아들인 반면 모세는 충성된 종이기 때문이다. 우월성의 둘째 근거에 대해서는 다소 재간을 부린 흔적이 없지않다. 저자 는 "그 하나님 의 온 집 (안)에서 (in)"충성된 모세의 충성을 말하고 있는 70인역을 축자적(逐字的)으로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사실상 그 집 위에(over) 군림하시는 분이시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귀(昇貴)되심 때문인 것이 분 명하다(히 1:3-4). 세째 대조는 다만 암시적으로만 나타나 있다.

즉 모세는 장차 나중에 언급될 것에 대해 증거했을 뿐이라는 것 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은 차후의 계시를 향해 지시(指示)하고 있다는 말이다(히 1:1-2도 참조).

저자의 논증은 부분적으로는 "집"이라는 단어의 의미의 애매모 호함에 의존하고 있다. 3-4절에는 "집"이 건물을 가리키고 있지 만(2절과 마찬가지로 광야에서의 장막을 가리킬 수도 있다). 6절 에서는 공동체를 의미하고 있다. 이 구절은 목회적인 관심으로 돌아가 끝맺고 있다. 교회는 만일 소망의 담대함을 끝까지 견고 히 잡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10:19-25도 참조).

11장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소망은 히브리서의 근본 주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과 비교될 수 있 다(히 3:12-19, 이 귀절에서는 시편 95:7-11과 아울러 민수기 14 장의 내용이 언급되어 잇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역경과 고난을 참아오고 있는 만큼(히 10:32-34), 교회의 목표는 "안식" 이라고 말할 수 있다(4장). 물론 "안식"이란 말은 장차 있을 구 원에 대한 하나의 비유이다.

히브리서 4:12-13은 그 "안식"을 이룩하기 위해 분발하라는 권 면의 진지성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이 귀절은 첫번째 주요부 (主要部)를 마무리짓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도 아니요,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로고스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드러내시고 심판하시는 활동력을 말한 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말씀의 폭로적인 역할이 오로지 인간적인 상황에만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밝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이 귀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의 안정성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전 성을 보장하고 있다. 히브리서에 있어서도 이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성 요소가 없다면, 교회가 안이하게 들어 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독교의 호소는 자기 합리화를 위한 사상의 근거에 그치고 만다.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10:17-30 지난 주일의 마가복음 10장의 본문이 제자의 직분과 가족사이 의 관계를 다루었다고 한다면, 오늘의 본문은 부(富)에 관한 말 씀들을 종합해 주고 있다. 마가복음 10:17-22(23)은 한 부자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자체로서 독립된 완전한 설화이다. 비록 마 태복음만이 그 부자가 점다고 말하고 있고(19:20) 또는 누가복음 만이 그가 "관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18:18), 기독교에서는 이 부자를 가리켜 "부자 청년 관원"(rich young ruler)이란 별명으 로 일컫고 있다. 마가복음 10:24-27은 단일(單一)한 말씀을 토대 로 기록된 것 같다. 그리고 이 귀절의 도입부에 해당되는 내용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沒理解)라는 마가 특유의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본문 전체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추기까지 의 단계를 정확하게 재생시킨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긴 하나 10:28-30(31)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 미 어려운 희생을 감수하였다고 역설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원래 는 독립된 말씀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편집자겸 저자가 28-30(31)절을 이곳에다 배치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이 귀절이 부 를 포기하는 것에 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요, 또 한편으로는 제 자들이 이 요구 상항을 충족시켰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 이다. 마가 자신으로서는 제자들의 몰이해를 거듭 강조하고 있는 만큼, 아마 마가 이전에 이 귀절의 편집 작업을 한 사람이 있었 을 것으로 본다.

이 부자의 신분은 밝혀져 있지 않다. 또한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끊고 다른 곳에서는 병행구를 찾아 볼 수 없는 "선 한 선생님이여!"하고 부르고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행동의 계기 가 된 사건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혹 이전에 예수님을 만났다 거나 그 분에 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을까 이 부자의 질문은 전형적인 유대교식 질문이다. "영생"은 양 (量)의 문제도 아니요, 불사(不死, 즉 영원불멸)와 혼동할 것도 아니다. 물론 영생은 불멸을 내포할 수 있을지 모르나 오히려 그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가까운 생명의 질(質)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자는 영생을 "유업 으로 받는 것" (inheriting)에 관해 말하고 있다(한글 개역에는 이러한 의미가 명확치 않다-역주). 다시 말한다면, 영생은 그가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업이요 선물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부자의 질문에 답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자신의 도 덕성을 부인하시거나 유죄성을 인정하시는 것음 물론 아니다. 오 히려 예수님은 어떤 선한 사람에게서 영생을 배움으로써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반박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돌팔이 선생이 되기를 거부하고 계신다. 어떤 종류의 지혜는 지혜로운 자에게서 배울 수 있겠지만,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나온다.

그 다음 예수님은 그에게 십계명을 가리키신다. 비록 보통 순 서대로는 아니나 십계명 중에서 몇 가지 계명을 인용하신다. 어 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생략되어 있 는 "속여 취하지 말라"는 새로운 계명이 하나 나타난다.(마태복 음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에, 마태는 이 병행 구에 그것을 첨가시키고 있다.) 예수께서 인용하고 계시는 계명 들은 모두 인간 관계와 관련이 있으며, 예수님에 대한 마르크스 주의적인 교재(敎材)라면 아마도 첫자리에 두었을 "탐내지 말라" 는 계명을 생략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 부자들에게 율법을 상기 시키시면서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근본적인 성서적, 유대교적 확신을 표명하고 계신다(참조:신 30:15-16, 겔 33:15). 예수님의 대답은 다른 어떤 것을 노리 기 위한 전초적인 작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행하 는 자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믿고 계셨다. 예수님은 또한 이 부자가 이 계명들이 요구하는 바 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계신다. 누구든 노력만 하면 대체로 율법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는지의 여부는 별도의 문제다. 어쨌든 예수께서 이 사람을 유대교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시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는 그 부자의 반 응에 대해 예수께서 놀라셨는지의 여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예수님은 이러한 반응을 문제 삼지 않으셨다. 대신 예수님은 모 든 것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움켜잡고 있는 그 부자가 한 가지를 소홀히 하고 있음을 간파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라고는 말 씀하시지 않았다. 만일 예수께서 이 야심만만한 자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그것을 성 취하고자 행동에 착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대신 다 만 세 단계에 걸쳐 그것을 암시적으로만 제시하신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나서 제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가난해진 자는 하나님 앞에서 부유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하늘에서"란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완곡한 어법이다. 이 말씀은 그러한 자가 죽은 후에 부하게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사람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오로 지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의지하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신뢰감이다. 물론 그러한 자는 진정 가난해지겠지만, 그러나 예 수님은 가난이 필수조건이라고는 생각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요 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이다. 만일 그 부자 가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대로만 했던들 그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였을 것이다(10:15,지난 주일의 "복음서" 주제 참조).

마가복음 10:23-27은 이 기사에 대한 해설이다. 부자는 하나님 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들어가는 자들도 더러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이러한 기적마저도 가능하기 때 문이다. 예수님은 부자들에게 아무런 원한도 품고계시지 않는다 (원한은 커녕 오히려 예수님은 이 부자를 사랑하셨다고 했다, 21 절). 예수님은 야고보서 2:6-7이나 5:1-6과는 달리 말씀하고 계 신다.

누가복음 6:20, 24은 비뚤어진 현상태가 장차 종말론적으로 역 전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도덕 적인 선이나 가난의 상태를 낭만화하시지도 않는다. 부는 이 세 상에서의 권력과 안정(安定)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 의 상황에 관한 모호하게 하며 하나님께 대한 가탄없는 신뢰를 훼방하기 십상이다.

설교를 위한 해석 제 1주제:잠언 3:3-20,지혜서 7:7-11 오늘의 이 본문은 우리들을 지혜로운 자 곧 현자(賢者,sage)에 게로 안내한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층을 대표하는 세부류의 인물들-제사장, 선지자, 현자-가운데에서 기독교 공동체와 가장 덜 친숙하고, 가장 미미한 영향력을 끼치고, 또 가장 연속성이 적은 부류의 인물들이 곧 현인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자들이 미미한 인물들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은 여러 문화권과 종교에 서 찾아 볼 수 있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 기 때문도 아니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서도 현자들은 왕의 자문역을 맡았으며 또한 백성들로 하여금 평 화와 번영과 장수와 행복의 삶을 살도록 촉구했던 것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 지혜와 현자들에 대한 관심이 결핍되 어 있는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직도 현자라는 용어는 상궤(常軌)를 벗어난 삶의 스타일을 지닌 뭔가 이상하고 고립되어 있고 괴벽스러운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다시 말해서 보통 때에는 우리들 사이에서 또는 우리의 사회적 체제 속에서 발견되지 않다가 위기를 당할 때면 느닷없이 나타나는 괴 짜 도사(道師)들과 같은 인물들을 연상하게 된다는 말이다. 게다 가 그들의 이미지는 매우 늙수그레한 반면, 현대는 젊은이들의 시대이다. 뿐만 아니라, 현자들은 개혁자도, 변화의 매개자도 그 리고 기존 제도들을 마구 뒤흔드는 과격한 목소리의 소유자도 아니다. 차라리 현자들은 보편적이고 무시간적인 경귀(警句)와 우화와 속담들을 말하는 자들이다. "백 번의 치료보다는 한 번의 예방"(An ounce of prevention is worth a pound of cure), "진 수성찬 차려 놓고 싸우느니 나물먹고 물마셔도 속편한 게 상팔 자"(Better a little in peace than plenty in turmoil),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Fools rush in where angels rear to tread), "구관이 명관"(When in doubt, take the old path).

이상의 몇 가지 예에서 보듯이 현자들의 말에는 사물의 당위성 (當爲性)에 관한 것이나 예언자적인 시대 징조의 판단에 관한 것 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현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연구한다.

즉 그들은 구름과 비, 새들과 나무들, 생쥐와 인간들에게 있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연구한다. 하나님께서 지혜로 땅 을 창조하시고, 총명으로 하늘을 창조하시고, 또 지식으로 바다 를 창조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묵상하 노라면 생명과 조화를 이루고 평정(平靜)을 누리는 삶의 비결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지혜의 길을 추 구해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인간의 역사상 바로 이 시절이야말로 그렇게 해야 할 이유들이 여러 가지로 마음 속에 떠오르고 있다.

첫째, 피조물들을 관찰하는데서 얻는 많은 교훈들을 통하여 현 자들은 미련스럽고도 자멸적인 행위로 자기의 환경을 파괴해 온 인간에게 교훈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는 말은 옛날 이스라 엘의 어느 한 현자의 충고이다. 요즈음 같으면 아마 이렇게 말하 는 것이 저절하리라-땅으로 가보라.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로 만 들어진 것이다. 하늘에 가보라.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총명 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바다로 가보라. 그것은 하 나님의 지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너는 거기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둘째, 지혜는 누구나 활용할 수 있다. 그것은 소수의 전문가들 의 특별한 전유물이 아니며, 희한한 종교적 체험을 한 자들의 독 점물도 아니다. 경청하고 관찰하고 묵상하는 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

세째, 지혜는 선물이다. 이 경우의 지혜란 어떤 지적인 유희나 보다 똑똑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지혜는 신앙 공동체를 어떤 오후의 토론 그룹 안으로 억지로 비틀어 넣지는 않는다(즉, 지리멸렬한 지적인 토론의 대상이 아니란 뜻-역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할지어다." 이러한 지혜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에 대하여 개방된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선물(은 사)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혜는 삶의 스타일 및 행실과 또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웃 여러 나라들과는 달리 지혜와 의를 연관지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가 적 절히 역사하여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 준다.

요컨대, 모두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제사장은 거 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선지자는 의(義)로, 그리고 현자는 지혜에 로 우리들을 부르고 있다.

제 2주제:히브리서 4:12-13 오늘 "제 1주제"의 본문의 핵심적인 단어는 지혜(sophia, 소피 아)였는데, 여기서는 말씀(logos, 로고스)이 핵심적인 단어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능동적인 자기 계시를 나 타내기 위한 말이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 기 백성의 동기와 인격과 행위를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밝히시 면서 명석한 심판을 내리시는 일에 스스로를 제시하시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도덕성, 윤리적 진정성에 대한 강력한 진 술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떠받쳐주고, 위로하고, 연단시키 고, 기쁨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남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 씀의 삼중적(三重的)인 성격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곧 성서 와 복음 선포와 성육하신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요 1:14) 이시다. 그러나 어째서 하필 하나님의 "말씀"인가 성만찬에 관한 성서의 기록이 공동식사를 신성시하는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듯이,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에 관한 성서의 기록이 결혼을 매우 중시하는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듯 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란 표현도 구어(口語, spoken word)의 가치와 효율성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말한다 는 것이 건설 혹은 파괴, 치유 혹은 상해(傷害), 축복 혹은 저주 를 이 세상에 가져 올 수 있는 위력을 지닌 행동으로 간주되는 문화권에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임재를 그의 "말씀"이라고 일컫 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방 신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체와 형상에 갇혀 정적(靜的)이고 생명이 없다. 그러 나 우리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아무도 여지껏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다만 그 분의 말씀을 들었을 뿐이다. 다 시 말해서, 말이란 것이 공기를 통해 귀로 움직여 나가는 가냘프 고 단명(短命)한 것이지만 삶을 변화시키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도 그의 피조물을 완성에 이르게 하시면서 역동적(力動的)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회중들로 하여금 말을 음향의 세계에서의 하나의 사건으로 여기게끔 말에 대한 존중심을 회복하도록 도와 주는 일을 통하여 본문을 조명해 보는 것이 현명하리라 본다.

"쉬지 말고 지껄여 대라구." 중요한 건 자네가 무엇을 말하느 냐가 아니라 무엇을 행하느냐 하는 것이지." "누구나 말이야 할 수 있겠지만..." "막대기나 돌이라면 내 뼈를 부러뜨릴 수 있을 지 모르나 말은 결코 나를 해하지 못할걸."-이와 같이 말이라는 것이 경시되는 경향이 있는 사회에서는 말에 대한 존중심을 회복 하는 일이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말에 대한 이러한 경멸 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말로 인해 전혀 새로운 판국이 조성되고 또한 한 마디 말이 뒤죽박죽된 개념된 전전긍긍하던 순 간들을 명쾌(明快)하게 밝혀 주었던 경우들을 돌이켜 보라. 말의 실행력, 이를 테면 "나는 기어코 하고야 말겠어"라든가 "이것이 내 몸이니라"라는 등의 말의 실천력을 깊이 생각해 보라. "너에 게 내 말을 준다"(즉, "약속한다"는 뜻-역주)라든지 "침묵을 깨 뜨린다"는 등등의 말, 즉 "말하다"라는 말에 대한 의미심장한 동 의어들을 활용해 보라. 문제가 매우 중요한 경우, 남편이나 아 내, 부모나 자식, 또는 목사와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한번 돌이겨 보라. "여보, 사랑해요"하고 말하기보다 는 꽃이나 캔디를 사다 주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경험한 남편들 이 얼마나 많은가.

회중들로 하여금 말의 진가를 올바로 인식하도록 도와 주고 있 는 목사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는 자이다. 결 국 우리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관련이 있다. 히브리서 4:12-13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해 "우리의 말"로 끝맺고 있 다. 비록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라는 구절의 변역으 로 인해 그러한 사실이 모호해지긴 했지만, 직역하면 "우리의 말 의 근거가 되시는 자의 눈 앞에"(before him unto whom is our Lord. 헬라어 원문으로는-이다-역주)라는 뜻이 된다. 우 리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명확한 분별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복음서 주제:마가복음 10:17-27 오늘의 히브리서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꿰뚫어 보시며 분별 하시는 능력에 대해 역설하였다. 이에 대해 오늘의 마가복음의 본문 이상의 좋은 실례는 찾아 보기 힘들 것이다. 마가는 이 기 사를 통해 전혀 모호한 점이 없도록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1)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현재로서는 이것만 알면 족하다. 이 사람 앞에 "부 유한"이나 "젊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이야기의 허두를 꺼내는 것은 그를 우리와는 동떨어진 어떤 특수 계층에 속한 자로 치부 해 버리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이 오직 하나님만이 대답하실 수 있는 질문을 하나 던진다. 예수님은 말문을 여시자마자 그 사람 의 주의를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리게 하신다. 예수님 의 권위는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 로 하나님 앞에 세우시는 능력에 있다. 예수님을 체험한 자들은 곧 하나님을 체험한 자들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미 그의 유전을 통해 알려진 하나님의 요구를 상기시키신다. 그 사람은 이미 율법을 지키느라 고 지켰지만, 그래도 여전히 만족이 없는 실망을 경험한 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도들이 온갖 형태와 방법으로 하나님을 갈구했듯이 그 사람도 하나님을 갈구하고 있다. 그는 이제 그가 원했던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청종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궁극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궁극 적인 대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대 답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양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도 그만 못한 대답은 시시하고 심지어 모욕감 마저 느끼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한다는 것은 가난이나 결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의 청산(淸算)쯤이야 아주 간단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도 역시 그러나 행위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닐 수 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 다시 말해 그 분 앞에 적나라한 모습으로 나서는 것이야말로 성서와 경험이 일컫 는 바 "온전하고 자유로운 생명"에로 나아가는 오솔길인 것이다.

그렇게 신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금세(今世)와 내세에서 결핍과 가난은 커녕 오히려 재산과 가족을 백배나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막 10:29-30). 그 사람은 "아니요."라고 말하도록 허용 되었다. 왜냐하면 부정할 수 있는 여지가 없이는 진정한 "예"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곧 우리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가는 우리가 이 이야기를 예수님의 사역의 뒤편에 방치해 두 어도 좋은 그저 한갓 재미있고 독립된 사건으로 간주하지 말 것 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다음 단락은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 자들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마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으로서, 어떤 사람(또는 사람들)에게 교훈 을 하신 다음 그 교훈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제자들에게 은밀히 그 의미를 부연, 설명해 주시는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인 수법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들도 염두에 둔 말씀인가 물론이 다. 그 때에 진리였던 것은 지금도 진리이다. 30절까지의 내용에 서 분명히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제자의 직분과 온전 한 삶의 조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과, 또한 마가의 스타일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확증해 주는 틀림없는 단서가 있다는 점이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기 에게 온 그 사람을 대하심에 있어 그를 골똘히 주시하면서 대답 하셨다(21절). 그 대답이 자기들에게도 해당되느냐고 제자들이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역시 그들을 뚜러지게 바라보시며 대답 하셨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27절). 달리 말한다면, 예외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