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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에 무지한 자들 (요 11: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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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자이면서도 예수를 믿고 사는 문제에 대한 실상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 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과 놀라운 축복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 로 잘 모른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평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두가지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로 인하여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을 직면 하고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우리가 전도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예수를 믿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 가까운 사람 이란 남편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나아가서 가까운 칙천이나 친한 친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는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이 틀림없이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여겨집니까 이에 대한 우리의 생각중 하나는 보통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한 번 나타나 보이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간섭 앞에 항복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놀랍게도 나사로를 죽어 썩어진 시체 가운데서 일으키신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전해들은 자들이 항복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 습니다. 저들의 생각은 진리와 거짓 중에서 자신들이 거짓에 속해 있을지도 모른다 는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거저 진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을 뿐이었습니다. 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때때로 신자들마저 의에 주린 것이 아니라 의가 없는 축복에 주려 있을 뿐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셔야 합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하여 인간이란 진리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하고 감각이 둔한 자들인가 하는 점을 추적 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본문 47절을 보십시다.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즉, '예수가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과 진리 앞에서 영원한 진리를 선택하고 생명을 선택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흘러가지 않고, 단지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이 일을 풀이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는 자꾸만 큰 기적을 행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편을 들고 있고, 큰일이 난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네들이 이겨야 되겠다는 것이 문제 였던 것입니다. 인간이란 욕심이 있으면, 그 욕심을 위해서 좌우를 보지 않고 오 로지 목적 달성을 위하여 고집만 피우고 앉아 있는 죄인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이 나타난다고 하여서 인간의 고집이 꺽여지고 사태가 호전될 것이라는 상상에서 빨리 벗어나야 된다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는 것 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어려움에 부 딪히기만 하면 더욱더 현저히 볼수 있는 일들입니다. '이 일만 해결해 주시면...' 하면서 얼마나 쉽게 약속을 하고 장담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서 쉽 게 나오는 종교 스타일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전혀 이익이 없다 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 와야만 그렇게 간절해 진다는 겁 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자식이 학력고사를 보았습니다. 아이의 점수가 234점입니다.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자식만 붙여 주신다면 바치겠습니 다!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무에서 유도 만드시는 분이신데 234를 순서를 조금 바꾸어 324로 숫자의 앞 뒤칸을 바구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습 니까 바꿔만 주신다면 이 아들을 바치겠습니다.' 하도 안탑깝고 답답하여 넉두리 같은 기도이지만 문제는 언제나 우리의 말이 그렇게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 나 이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은 이것입니다. '이미 내가 그 자식을 받았다 그 점수 그대로!' '아닙니다! 바꿔 주셔야만 바치겠습니다' '아니다 이미 받았다!' 여러분 결국 요는 무엇입니까 바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치는 것은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한 떡밥이었고, 정작 내가 필요한 것은 점수인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기적이 필 요한 것입니까 기독교가 이렇게 기적과 이익으로 범벅되고 점철되어 우리에게 오 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독교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 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를 믿고 있다는 데 대하여 놀라야 됩니다. 우 리는 원래가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기적과 놀라 운 일을 행하셔도 우리는 그분의 편에 설 수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자 신은 이에 완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 때문에 자신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나중 까지 살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훨씬 무디고 무지한 족속들입니다. 그런 데도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 앞에서 그토록 모를 수 있을까 하면서 간단히 생각하지 마시기 바 랍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이요 바리새인입니다. 그 시대에 종교적으로나 애국심으로 나 사회적으로나 무엇으로도 초일류급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 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을 샘플로 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종종 내가 하나님 을 믿고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이런 자리에 감히 나아올 만한 사람이 되었 다는 것에 대하여 즉, 이 큰 기적에 대하여 쉽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 서 그 다음의 요구들을 해댑니다. 말하자면 쓸데없는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못난 자식일수록 부모에게 불만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잘난 아들일수록 이렇게 얘기 하는 법입니다. 부모님이 '얘야, 나는 너에게 따뜻한 밥 한 번 못해 먹였구나', '아니요, 저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 다.' 이것이 잘난 자식들 입니다. 부모님이 계셔서 자기존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근원적이고 대단한 것입 니다. 그 다음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느 상황 속에 있나를 보십시오. '하나님, 왜 이것을 주지 않고 저것을 주지 않습니까'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우리가 영적으로 중생하였 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며 축복이며,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계셨으며, 우리 앞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행하셨어도 몰랐던 자들이었으며 모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너 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 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지금도 자신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밝은 태양 빛으로 저녁 노을로, 부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파도로 하나님의 솜씨가 어디에나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찬 송가 가사처럼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때 하늘에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솜씨 우주에 찼네...'그렇습니다. 그 무엇을 보아도 놀랍 고 경이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매를 드는 순간이라도 거기에는 아름다 움이 있고, 애정이 있고, 사랑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분명한 손길 들, 분명한 간섭, 그 작품을 보고 하나님을 연상할 수 밖에 없는 모든 것을 보고도 우리가 했던 것은 파괴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산에 가셨다가 짐승들이 흐트러뜨려 놓은 어떤 자국도 더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짐승들이 만들어 놓은 어떤 작품이든 더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갑자기 깨끗하지만 라면 봉지 하나라도 보시면 어느 곳보다 그냥 앉을 수 없는 자 리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갑자기 그 물을 마음놓고 마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 니다. 이렇게 인간은 부패와 오염의 장본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대의 공해 가 누구입니까 인간입니다. 덩치에 비해 인간만큼 많이 먹는 동물이 있을까요 인 간만큼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요 인간만큼 쓸데없이 살이 찔까요 인간은 죄악 덩 어리이며 어떻게 어렵게 살아 왔으며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서 얼마나 무감각한가를 이루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같이 답답함으로부터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까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감격을 우리가 놓치는 날이면, 바로 그 다음에는 그저 사소한 감격들을 요구하 느라고 스스로의 특권들과 감격들과 감사할 평안의 마음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서 왜 오늘 내 자식을 안 일으켜 주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왜 내 아내를 빼앗아갑니까 왜 우리 아버님을 중풍병에 누워 계시게 합니까 날 사랑하신다면서요 그러면 제 발 그 사랑을 보여줘 봐요! 하나님은 뭐든지 하실 수 있으시지 않습니까 제발 빨 리 좀 어떻게 해 줘봐요! 우리는 이런 소리를 겁없이 막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가 어디서 일어났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저 시궁창 속에 서, 죽음의 시체더미 속에서, 그의 피묻은 손으로 씻겨지고 움켜 잡아져서 이 자리 에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사소한 문제에 넘어지기 일수 입니다. 누가 어디서 하나님의 그림자를 보고 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만 그때부터 펄펄 뛰면서 '아니 하나님 왜 저는 안보여 주십니까'하면서 쓸데없는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서 우리가 정 작 갖고 있던 소중한 축복들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꼬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너 방언 받아 보았니 너 아플 때 하나님이 꿈에 나타 나서 아프냐 하시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적이 있니 없지, 넌 아니야' 그러면 서 그 속삭임에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예수 믿고 살아가는 길이 평탄하거나 어떤 기적들을 끊임없이 첨가시켜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고 성경은 설명하지 않습니 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나타내시자 이에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모여서 궁 리하더니 마침내 죽이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난 이후 무슨 문제에서 이익을 볼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가 않 습니다. 오히려 훨씬 고달픕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난 이후에 갑자기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고 사업이 일어나고 만사가 형통해 지던가요 예수 믿은 것 때문에 그 런 것들이 바뀌는 일이 있다고들 하는데 내게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대 개는 큰 변화가 없든지, 혹은 더 어렵기만 하기도 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문제를 풀어야 됩니다. 고후4:7-10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하여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 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 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신자에게는 이중의 인격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이중의 생활을 하게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 속에 있는 보배입니다. 또 하나는 그것을 싸고 있는 질 그릇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의 완성은 부활의 몸을 입을 때입니다. 분명히 우리의 영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 몸은 더럽습니다. 이원론을 말하 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은 깨끗한데 육체가 더럽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가 옛날에 우리를 지배하던 그 원리에 너무 젓어 있어서 주인이 바뀌었 음에도 불구하고 신경쓰고 긴장하지 않으면 저절로 옛날 일을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긴장하여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으면 속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더러운 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내버려 두면 죄를 짓습니다. 우리의 정 신과 육체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깜짝 놀라는 것은 저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아파치의 북소리같이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악한 일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생한 영혼 에 우리의 육체가 제어당할 만큼 육신이 약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직도 어제까지 펄펄 뛰던 그 몸뚱아리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신자를 하 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놓으시려고 세상에서 모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기적으로 쉽게만 만드시지 않고, 그 문제들에 정면으로 부딪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겉사람이 후패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겉사람이 후패하므로 속사람 이 날로 새로와 지는 것이 신자들을 하나님의 계획이요, 신자가 걸어야 할 정로인 것입니다. 우리의 겉사람이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의 멧시지를 받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가 원래 어떠한 죄인이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는 우리가 죄인이므로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원래 있었던 어느 부분의 부속품 을 갈아 끼우듯이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와 지는 것입니 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독특한 점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다른 종교들의 목표는 인간의 자기 완성입니다. 따라서 진 화론적이며, 희망적입니다. 부족한 것에 무엇을 채워서 인간의 어떤 완성품을 만들 어 나가는 노력으로서 도를 깨우치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 다. 완전히 현재의 것이 죽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고장난 자동차를 수리해 내듯이 고쳐 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용광로에 넣어서 현재의 모습을 없애고 새 차를 만 들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어떤 것에다 이식시키고 접붙이는 작업으로서 기독교를 가질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 성 품과 옛 습관들을 그런대로 하나씩 덕지덕지 붙여 놓고서 새로와 지는 것이 아닙니 다. 완전히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인식시키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을 중생시키신 다음 옛날의 구습을 좇는 몸뚱아리를 그대로 놔두신 것입니다. 옛 성품과 옛 사람과 새 사람과 새 성품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 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변화되고 바뀌어져야 할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날마다 확 인케 하시며, 이 문제로 싸우고 죽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과 옛 성품을 그냥 덮어 놓고 뛰어 넘어가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과 거의 처절함과 그 망막함을 모르기를 원치 않으시며 우리가 바뀌어져야 하는 그 정 도가 어느 정도인가를 모르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자녀와 성도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깨어나는 것을 원치 않으시 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참다운 감격과 감사가 있으며, 은혜의 은혜되심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예수님을 모르고 지내던 때와 거의 다르지 않게 삽니다. 달라져야 된다는 생각은 저 뒤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도 많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신자의 생활이 전체적으로는 승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종점은 언제나 그렇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매맞기도 하고 연단 받기도 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자기 고집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잘 하는 줄로 알고 힘껏 뛰어나가 보면 그것이 바로 자기의 육체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 인생 전부의 경험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에 있는 한은 계속 그 충돌이 있고, 그 아픔이 있고, 그 실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우리를 핍박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칼을 들 고와서 잘라가고, 총을 들고와서 내 목숨을 앗아가고 명예를 잘라가도 우리의 보물 은 결코 잃지 않는 자들입니다. 승리가 바로 이러한 실패 속에서 피어나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중적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갖고 있던 것으로 완성되는 자가 아니라, 새로운 나라가 있으며 새로운 가치가 있으며 새로운 것을 것을 준비 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같은 신분의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와 우리를 바 라보는 세상에게 증거되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항복이 있고 깨어짐이 있고 죽음이 있고 고달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옛사람과 새사 람의 싸움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기적대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서 오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을 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길은 결코 편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모든 인간들을 위하여 다니신 발걸음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 둘 곳이 없으신 길이었으며,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반 당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신자의 길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르며 겪어야 하는 이같은 이중적인 생활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것은 고전6:4-10절을 보 시면 더욱 확실해 집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 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 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 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 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로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처음에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 우리가 하는 이 사도의 직분을 방해받지 않으려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 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고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 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이 나와야 말이 맞습니까 참으로 힘들고 괴롭고 더럽고 못 참겠고..이런 식으로 나가야 보통 되어지는 말인데, 그 다음에 이렇게 나갑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라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앞 부분에서 말하던 방향과는 전혀 딴 방향으로 가지 않습 니까 앞 부분에서는 분명히 일종의 자폭적인 울분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 같지 않 습니까 '우리는 고생했다. 그래 우리는 못 먹었다. 그리고 헐벗었다. 죽도록 고생 했다' 이렇게 비장하게 나가다가 갑자기, '그러나 난 잘났다!'이렇게 나오는 것이 보통 순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그래 서 그 다음에서 분명한 이중성을 한꺼번에 넣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 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렇게 신자이 삶은 이중성을 지닙니다. 육체로 보는 것과 영으로 보는 것의 이중 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로 따지자면 예수를 믿어서 이익을 본 것이 별로 없습 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었더니 무엇이 특별히 잘되었습니까 흰 머리가 갑자기 없어 지셨습니까 혹 육체적으로 좋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분명히 달라지는 것 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으로 달라지는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육체가 이래도 저래도 상관이 없는 자리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인생이 꼭 호의 호식해야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리에까지 들어 가는 것입니다. 해탈했다는 뜻이 아 닙니다. '까짓껏 아무래도 좋다.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평생이다!'라는 식의 달 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허공을 치는 자가 아닙니다. 헛된 삶이기에 '애라 다 잊어버려라 부질없는 것!'라는 식으로 헛된 삶을 놓고서 무상 무념의 경지에서 가지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헛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 하나하나에 깃든 의미와 가치들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18-19세기 한창 식민주의 정책이 활발하던 때에 서구의 선진 국가들이 아프리키를 침투해 들어갔습니다. 가서 보니 다이아몬드 원광석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는 아 이들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것을 거울을 주고 바꿔 왔습니다. 바 늘을 주고 바꾸고 유리 구슬을 주고 바꿔 왔습니다. 완성품인 유리 구슬이 보기엔 훨씬 예쁘지요. 그러나 구슬을 주고 다어어몬드를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결단코 바보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이타주의를 외치고 박애주의를 외치지만 그것이 나를 다 없애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이상한 도 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세를 준비하는 자들이며, 영원을 준비하는 자 들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것을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긴장해야 할 것이 있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할 목표가 있고, 달려야 할 곳이 있고, 눈을 뜨고 봐야 할 것이 있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훨씬 세상 사람들 보다는 고달픕니다. 그러나 오히려 고달픈 만큼 고귀하고 가치있는 일 임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들의 싸움거리입니다.

여러분이 지나온 과거를 한 번 돌이켜 보십시오. 감사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억지로 감사하는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감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일 년 전만이라고 가만히 돌이켜 보십시오. 어느 것 하나 무의 미한 사건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지 여 러분들이 고통을 당했다는 것 때문에 여러분이 별 볼일이 없었다고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들은 그것들을 지나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한번 뒤집어 보십시오. 하나님 만큼 자상하시고 하나님 만큼 확실한 인도자는 없습니다. 그는 자비하시며, 인자하 시며, 사랑이 깊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최고의 축복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이 길 만큼 확실하고, 우리에게 가장 좋고 적합한 인생 길은 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다시 추적하여 새롭게 보시기 바랍 니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는 이 본문에서 보는 바와같이 그 지점에서 늘 혼동을 받게 됩 니다. 원하는 바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으면 언제나 100% 자기는 옳고 100% 책임 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투덜거리는 지경에 까지 이릅니다. '하나님이 있 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말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들으시라 이겁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알게 뭐냐 나 이 제 교회 안 나가!' 들으시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경한 자들 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고서 하는 자가 있습니까 우리는 감히 할 수 없는 말을 하나님 앞에서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태 껏 안 때리시고 기다리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훨씬 악당들인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기다리실까요 아직은 우리가 얘들 이라서 그러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참아 주시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잘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믿은 지 몇년이 되었습니까 수틀리면 언제나 '너!'하면서 덤벼 드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습니까 이젠 하나님 앞에서 그런 짓은 그만합시다 심판은 끝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 휼 속에서 여기까지 이르른 것입니다. 돌이켜셔야 합니다. 신앙은 그렇게 우스꽝스 럽고 유치한 데서 끝내서는 안됩니다. 수틀린다고 쉽사리 삐치고 안색이 달라지고 눈빛이 달라진다면 아직도 유치한 떼를 못벗은 것입니다. 그것은 피아노를 바이엘 만 치고 만 것과 같습니다. 그건 불행 중의 불행입니다.

<결론> 여러분이 지금 갖고 있는 축복들과 여러분이 지금 소유해서 마땅한 것들을 들여다 보십시오. 제발 이제 어른의 신앙이 되기를 결심하셔야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인내심과 참으심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는 길은 겉사람을 쪼개는 길이요, 그것을 없애는 길이요, 나를 항복시켜서 보배로 시선을 모으게 하는 길임을 인식하 십시오. 이 길은 내 생각처럼 쉽게 가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눈물이 날만큼 아 픕니다. 비명이 있으며,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그의 영혼이 만족할 때까 지 그 인간을 훈련시키고 다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길을 불행 하다고 이야기 하시렵니까 그것을 비참하다고 이야기합니까 아닙니다. 참 가치있는 길이라고 말 하는 것입니다. 수준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된 가치가 있듯이 신 자의 신자 된 수준과 가치는 본인이 아끼고 다듬고 쌓아가지 않으면 제자리 걸음밖 에 할것이 없습니다. 지난온 시간들을 다시 돌이켜 보시고 좀 더 하나님의 간섭하 심에 눈뜨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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