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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의 종들 (요 12:3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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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의 말씀들입니다. 그 동안의 공생애를 이제 마무리하시며 결론적으로 그 사역의 중심이 되는 것만 반복하고 확정하고 있 습니다. 그래서 43절 이하에서 앞에 나왔던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되는 것을 반복 하고 있습니다. 44절에 있는 것같이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다. 또한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다. 나는 빛이다. 내 말을 지 켜야 한다. 나는 구원하러 온 것이지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를 믿느 냐 안 믿느냐는 마지막에 중요한 문제가 된다.'하는 말씀을 반복하고 있음을 보 게 됩니다.

 복음서가 의도하는 것과 우리가 이해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문제를 본인의 결심이나, 본인의 판단과 결심으로 근거로 삼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 신 어떤 기적이나 어떤 가르침도 사실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 효력을 발생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처음 듣기에 좀 이상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잘 가르치고 기적을 이루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놀라고, 반하고, 항복했 다고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3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했다"고 성경은 분명히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서두에서 보면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했다 빛이 왔으되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세상을 지은 주인이 왔으되 영접지 않았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서가 굳이 밝히고 싶어하는 가장 중심되는 초점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늘 자신의 신 앙에 감동과 감사가 소홀히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37절에 있는 말씀 뒤에 이렇게 설명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사야의 말씀이란 바로 이어서 나오는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라는 말씀을 말합니다. 또 이어서 이사야 의 다른 예언을 이루려고 한 것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 눈을 멀게 하 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 닫고 돌이켜 내게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 대해 무지한 생각에 용기까지 얻어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수 님을 못믿게 하려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까'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약올리려고 예 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아니냐고 살기 등등해서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게 아무도 믿지 못하게 하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의와 진리와 사랑과 생명 을 보이셔도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반응할 만큼의 수준이 되지 못했기에 그런 결과 를 빚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결과가 있을 것을 아시면서 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까 그것은 자신 이 친히 죽으심으로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설득시키기 위해 설명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 리가 이렇게 해도 못 알아듣고 저렇게 해도 못 알아듣는 자들이라는 것을 밝히시기 위하여 공생애를 사신 셈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죽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죽 으러 오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앞에서 행한 어떠한 일도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것을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알게 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고 구원을 받는 유일한 방법으로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리시며, 죄인과 같이 취급 당하사 무덤에 가지 내려가시는 방법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말씀을 들으면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희망이 없 는 존재였단 말인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런 수준이었단 말인가 아니다, 나는 그래도 분명히 믿으려고 했었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지 않 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부언하고 있습니다. 요12:42-43;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우리는 바로 이 부언되어 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경험과 실상을 제대로 분석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마음 으로만 요구하지 않고 꼭 시인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봅니다. 대표적으로 누가복음 12:8-9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하나님의 사자 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왜 성경이 자꾸만 시인을 요구하고 있는가 그냥 마음으로 믿으면 그만 아닌가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치고 똑똑한 사 람 못봤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입 으로만 믿는다고 말하고 마음과 행동은 제멋대로 가는 사람들을 종종 볼수 있기 때 문에 이에 대하여 거부 반응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입으로 시인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즉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지적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롬7:14-20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 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 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 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 말씀은 인간에 관한 설명 중에 꼭 기억해야 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쉽게말해 사람이란 생각은 할 수 있어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은 주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인격적으로 표현 하면 사탄의 노예이고, 원리적으로 따지자면 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가 원하고, 마음 속으로 공감하는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사람이 정말 제대로 그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가를 보십시오. 사람은 종종 이 문제에 대하여 속습니다.

자시 자신이 선한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선한 사람일 것이라고 오해는 사람들 이 의외로 많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가운데 술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병에 걸렸습니다. 간도 안 좋고, 위장도 안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술을 안 먹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심만 단단히 하였을 뿐이지, 여전히 술 에 취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친구는 꼭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안먹기로 했 다'고 말입니다. 즉, 먹기는 먹었는데 마음 속으로는 안먹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 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친구는 마음 속으로 술을 안먹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옛날에 마음 먹고 술을 먹을 때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자꾸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똑같이 먹고 말았습니다. 옛날에는 먹기로 작정을 하고 먹었고, 지금은 안 먹기로 작정을 하고서 가서 먹었기 때문에 지금이 옛날보 다는 그래도 낫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늘 속고 있습니다. 매일 먹고 있는데도 끊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술을 안 먹겠다고 매일 생각하고 있는 그것 으로 자신이 훨씬 나아진 줄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가 옳은 일에 공감하고 좋은 결심을 했다는 그것 으로 이제는 괜챦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란 자기가 스스로 결정한 것을 자기가 지킬 만큼 자기의 주인이 되지를 못합니다. 죄란 이토록 우리를 기만과 착각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한 죄가 자존심이라는 형태로 우리를 사로 잡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이렇게 이야기했 습니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지 아느냐 그걸 먹으면 하나님 과 맞먹게 되니까 하나님이 못 먹게 한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는데 왜 나는 모르나'를 찔러 주엇을 때 따먹은 것입니다. 맞먹으려고 말입니다. 그래 서 드디어 맞먹게 된 데가 있습니까 죄와 악에 대해서 눈을 떳을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세상 사람들이 신자를 괄시할 때 이 세상 일에 대하여 절반도 모르 는 어린애들이라고 괄시합니다. 불쌍히 여깁니다. 이것이 세상이 우리를 측은히 여 기는 것인데, 우리 신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부딪치기만 하면 스스로를 이것밖에 모 르는 불쌍한 사람인 것같은 이상한 열등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에 대 해서 아는 것이 무엇이 자랑입니까 죄라는 것 중에서 그 안에 빠져보지 않고서도 알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 처절해지고 손해보고 슬퍼지고 괴로 와진 그것이 무슨 자랑인지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죄를 많 이 알고 있는 자들이 즉세하고, 모르는 사람은 바보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 까 그러니 우리는 이상한 수법으로 우리의 자존심을 자극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자존심을 어떻게 건드리는 또 다른 전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무식하고 무지한 어린애 같다는 것으로 자극합니다. 다시말해 죄를 지은 사 람이 훨씬 지식적으로 뛰어난 사람이고, 죄를 안 짖는 자는 아무것도 못 배우고 인 생을 도대체 잘 모르는 사람같이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죄가 우리를 묘 하게 유혹하고, 묘하게 괄시하여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 리는 그와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일종의 양보랄까, 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한 신자가 불신 친구에게 이렇게 한 번 괄시를 했습니다. '야, 술은 왜 먹냐 그 렇게 써기만 것을!' 그러자 그 불신 친구가 이렇게 응수합니다. '써 얘들은 못먹 어. 약이야 약!' 그러니 갑자기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들은 어른이 되고, 이 쪽은 아이가 된 것입니다. 이런 희안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술 먹고 주정하는 것 이 어른이 되는 이상한 세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사 빛을 비추고 생명을 제시 해서 혹 우리가 마음으로 공감을 해도 그 곳으로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 리는 누군가에 의해서 억제당하고, 방해받고 있고 어떤 명령 앞에 꼼짝 못하는 존 재로 있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42-43절 말씀인 것입니 다.

즉, 마음으로 믿는 자가 있으나 드러내서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십니다' 라고 그러면 내가 예수 믿는 것 에 대하여 반대하던 자가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므로 그 옛 주인이 제거되 지 않고서는 그런 말과 행동을 감히 옮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아오실 때에 마음 속으로 '나는 아직 구원받은 하나님 의 자녀가 아니야'라고 하더라도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임이 분명합니다. 우 리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대목입니다. 내가 공감하고, 확신이 있으면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된 것이고, 아직 확신이 없고 의심이 있으면 난 아 직 아니라는 식으로 자기의 존재와 위치를 확인하려고 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가장 무식한 부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는 예수를 믿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죄악에 사로 잡혀 갔듯이 지금 여러분 스스로가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확실한 것이며, 또 그것 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을지라도 여러분은 하나님께 잡혀 나와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고 여러분 스스로가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왜 이런 오해와 착각이 있을까요 그것은 사람이란 끝없이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라고 생각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향해 '당신은 죄인입니 다!'라고 말해 주었을 때, '난 아니오!'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 실 때에 모든 인생이 분명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 자신들은 '죄인으로 불리울 만큼 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생각과 느 낌과 실제는 엄청난 차이가 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분명히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어딘가 보이지 않는 힘, 어떤 신비한 힘인 성령의 능력에 이끌리어 나오기도 하며, 또한 죄악의 검은 손길에 붙 잡혀 세상으로 가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란 무엇입니까 결코 설득 당하고 납득 당하고 공감하므로 항복해서 믿은 것이 아 니라는 것이 성경의 강조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주인 이 바뀐 것입니다. 마귀에서 하나님으로 우리의 주인이 바뀌므로 구원을 받은 것입 니다. 여러분, 주인이 하인과 상의해서 노예를 파는 것을 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주인의 권한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에 팔렸던 자였습 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산 그의 소유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 는 대상이 된 이상하고도 신비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기적과 축복의 자이에 들어와 있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신자들 중에 자기는 믿고 결심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성경이 하는 이야기는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먼저 주를 사랑해서 구원얻은 사람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주를 향 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 쪽에서 우리를 선택하사 거듭나게 하시고 영혼을 소생시키시므로 영안이 열리고 영적인 지각이 터져 아버지 가 누구이며, 주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주를 향한 사랑을 불어 넣어 주셔서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열심과 정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내서 얻은 위치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당연한 열 심이요, 우리의 위치에 걸맞는 수준을 위한 근신과 훈련과 노력인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이 참 신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주님 생시가 아니라도 좋사오니 꿈에라도 한번 나타나셔서 보여 주십시오!'라고 소원하게 되는 것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집사님이 용한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당신은 나와 길이 다른 사람이 오. 당신 속에는 존귀한 분이 계시는 군요. 당신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점궤를 볼 수 없소'라고 말해주어서 기뻐서 돌아와 교회에 와서 소문을 내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 집사님들이 자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을 받아보려고 떼거 리로 몰려 갔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이러는 겁니까 실감이 아나서 그러는 겁니다. 왜 실감이 안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해력과 결심으로 우리의 운명 이 결정된 자가 아니라, 나와는 상관이 없이 옛날 주인과 새로운 주인과의 싸움에 서 새 주인에게로 붙잡혀 온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다 못해 무당 에게라도 아니, 귀신에게라도 가서 '당신은 신자요!'라는 확인을 받고 싶은 것입니 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의 신자됨을 그렇게 확인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의 확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드디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분명하고 좋은 구원의 확신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과거에는 도무지 꿈에도 상상치 못한 자였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면 죄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오늘날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내가 진짜냐 아니면 가짜냐 하는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리러 나온 사람이라면 진짜 신자가 거의 확실하다 고 봅니다. 신앙이란 장난삼아 나오거나 호기심에서 올 만큼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것이 공부라고 한다면, '예수 믿으라!'고 말하면 '나 공 부할께!'말하지 예수 믿지 않는 법입니다. 그만큼 예수 믿는 일은 타고나면서부터 거부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왜냐면 죄 가운데서 났기 때문입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큰 거부감 없이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다는 그 자체가 너무도 큰 변화요, 기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의 능력과 노력으로 되어 질 수 있는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를 끊임없이 혼동시키는 마귀의 의심케 하는 전략에 빠져서 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늘 의심하면서 살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최상 의 전술입니다. '넌 오늘도 딴 생각을 했지 않느냐 넌 오늘 예배하는 시간에 늘 장사하는 생각만을 했지 넌 지난 일주일 동안 수수익 계산하느라고 설교를 다 놓 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네가 신자라고 넌 정말 아니야!' 그러나 여러분 그것으로 물러설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오늘도 교 회 갔단다!' 이것이 답입니다. 이 말도 안되는 내용들이 훨씬 시간이 지나가서야 바로 이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쉬운 내용이 아닙니다. 내 행위와 노력과 결심 등으로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에 늘 실패하고 넘어져 혼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의 기적으로 불러낸 새피조물 입니다. 이제 새로운 사람입니다. 물론, 아직은 그런 결론을 받기에 너무 송구스럽 습니다. 바로 그런 송구스러움이 있기에 이 구원이 은혜요,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구원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 달라 는 기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 받은 자들이 나아가야 할 바른 길입니다. 아직도 이 길에 들어서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괜한 의심과 혼동속에 빠져 스스로가 보기에도 한심한 모습에 무력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새사람의 나아가야 할 길로 힘차게 나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 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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