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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래적 영광이 약속된 성도 (요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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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결론 부분에 와서 하 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우리를 구원하시고 어떤 자리에까지 이 르게 하시는가 하는 가장 아름다운 대목에 와 있습니다. 21절 이하에 나타난 바와 같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 므로 구원받은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대접을 받게 되는가 하는 사실을 언급하기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나가 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상상이나 생각 보다 훨씬 뛰어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그 믿는 바 신앙의 가장 핵심되는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으 면, `예수를 믿어서 천국에 가게 된 것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해방된 것, 그리고 주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다는 것 등을 말한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설명 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17:22절에 보면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 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는 말씀에서 영광이 궁극적인 목표로 제시되지 않고, 하나의 전제 조건으로서 출발 선 상에서 필요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 영광은 완성시켜야 할 목표인 동시에 그것을 근거로 출발하는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영광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가장 절정에 달하는 대목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 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합니다. 21절을 보십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여기서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는 말씀은 미래적인 이야기입니다. 아직은 약속이고 미래적이라는 것입니다. 23절에서도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는 주님 안에 계시지만 아직은 `우리 안에 있다'는 식의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하나 됨의 사귐에서 하나님 안에 있어 온전한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미래적인 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영광이 우리로 하여금 출발케 하는 근거인 동시에 `온전한' 영광이 또한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같은 미래적 영광의 온전함에 대한 부분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론>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잘 설명해 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 에 힌트를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엡4:7절을 먼저 보십시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리고 엡4:11-13절을 또한 보십시다.

"그가 혹은 사도로,혹은 선지자로,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 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 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왜 이 구절이 힌트가 되느냐 하면 `온전함을 이룬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 니다. 우리 성경에는 지금 12절에서 "...온전케 하여.."가 나오고, 또 13절에서 `..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 원어의 뜻은 조 금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17:23절에 나오는 `...온전함을 이루어..'할 때 의 온전함은 `perfect'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엡4:12절에 `..온전케 하며..'라 고 할 때의 온전케 한다는 것은 `perfect'라는 뜻이 아니라, `equip'라는 뜻입니다.

equip란 무슨 일에 맞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에 적응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예를 들어 야구 선수가 야구 선수답게 되며, 권투 선수가 권투 선수답게 되는 것과 같이 어떤 일에 쓸모있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equip의 뜻입니다.

그러나, 엡4:13절에 있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할 때의 온전함은 perfect입 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똑같이 `온전'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앞의 12절의 온전은 `거 기에 맞추어 나가는 것으로서 훈련되고 교정되어 맞춰 나가는 것이고, 뒤의 13절의 온전은 정말로 완성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말 성경 번역이 참 잘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12절에서 `온전케 하며' 하는 말은 온전함을 이 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여 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실제적인 사용은 `위골된 뼈를 맞춘다'는 뜻에 사용됩니다. 즉, 접골해서 뼈를 온전히 맞추어 간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갈6:1절에 보면 이와 똑같은 단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 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서 `...바로잡고...' 라고 하는 단어가 위골된 뼈를 맞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 에서는 restore(복구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팔이 부러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팔을 다치면 제일 고통 당하는 데가 어디입니까 목이 고통을 당합니다. 팔이야 자기가 다쳤으니까 아파도 할 말이 없지만 기브스를 해서 목에다 거니 목이 아픕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것이 무엇일까요 얘들이 말하기를 수염이랍니다. 왜냐면 철면피를 뚫고 나올 정 도이기 때문이랍니다. 두 번째로 강한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은 머리털이랍니 다. 석두를 뚫고 나오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철면피와 석두를 바치고 있는 것이 목입니다. 생각하면 불쌍한 일입니다. 목에 목걸이 걸어주는 것 이외에 대접받는 때 가 있습니까 부러진 팔을 거는데 그냥 거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석고를 붙여서 걸 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해서 팔이 회복되고 팔을 다시 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목이 아프다고 팔을 잘라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편하지만 달아 메고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온전케 한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위골된 뼈를 바로 잡아서 자 기 기능을 정당하게 활용케 하는 것이며, 그 일을 할 줄 모르는 자를 훈련시켜 그 일에 합당한 자로서, 그 일을 제대로 하는 자로 만들어 내는 것을 온전케 한다고 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엡4:12절에서 말하는 온전케 한다(equip)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케(equip)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몸을 세운다'는 표현은 건축용어입니다. 이 말은 엡2:20-22 절에 그 의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 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 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지금도 건축중입니다. 다시말해 예수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많은 시간 을 할애하는 것이 훈련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가장 큰 핵심 부분입니다. 구 원얻은 이후 계속적으로 해당되는 일은 언제나 완성을 향한 훈련입니다. 이를 위하 여러가지 사건을 만나고 많은 시간이 할애되고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신앙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면 예수 믿는 순간과 천국 가는 순간만 손붙잡고 있고 그 중간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기쁨을 이야 기 하면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 얼마나 기뻣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고, 또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내가 어떻게 기쁨으로 맞이할 것인가 하는 것을 주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 중간은 어떠하며 지금은 어떤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시작과 끝은 있는데 그 중간이 되는 과정이 없습니다. 신앙의 과정이 무엇때문에 있어야 하 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저 있다면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시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는 몸 버려 피 흘리시기 까지 고난의 십자가로 구원해 주셨으니 최소한의 보답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 는 심정으로 교회도 나오고 전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합니다. 이것이 소위 `주를 위해서!'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우리 신앙의 일반적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주를 위해서!로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신앙이 주를 위한 것이기만 하다면 교회 안에 어떠한 어려움도 생기지 않도록 하나 님께서 틀림없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항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말썽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일이 일사분란하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 모 두가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인데도 일사분란하게 일 이 진행되도록 밀어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란 우리가 주를 위해서 무슨 일만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는 곧 신자된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곳이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들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좋은 일이나 어려운 일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들이 훈련되 어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그렇게 쉽게 주를 위한 일이 이루어 지지 않고 우리 자신들이 충분히 훈련된 연후에 일이 성사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비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가장 큰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 는 가장 큰 비밀은 십자가일 것입니다.

엡3:9-10절을 보십시다.

(엡 3:9-10)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 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 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비밀이 교회로 말미암아 알려진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그 리스도의 비밀은 십자가와 교회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갑자기 교회가 등장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 생전에 언급하셨던 말씀을 상기시켜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몸을 버려 너희를 구원한다!' 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교회를 만드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왜 교회를 약속하셨을까요 우리 를 온전(equip)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완성(perfect)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엡2:20-22절을 보십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 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여기서 미래 지향적인 목표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거하실 처 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전부 무엇으로 묘사되어 있습니까 `주 안에 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21절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그 성전은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지어 져 간다고 합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와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가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고 완성을 향하여 지어 져 가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어져 가고 있다'는 이 대목에서 미래지 향적입니다.

그런데 이 `지어져 가는 것'의 목표는 곧, 앞에서 살핀바와 같이 온전함입니다. 엡 4: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 람을 이룬다'고 할 때에 그 목표가 어디입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게 무엇을 허락하셨다고 했습니까 교회를 허락 하셨습니다. 온전하고 완벽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내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의 머 리로서으 그리스도입니다. 우린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 자리에 들어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구원을 얻을 수 없듯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 의 지체로 붙지 않으면 완성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십자가 붙어 있는 건물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서 말하는 교회란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그의 지체로 세상에서 부름받은 무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다른 새로운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지, 이런 눈 에 보이는 조직체를 교회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영적 조직체입니다. 그러면 왜 우 리가 눈에 보이는 조직체의 교회를 갖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유용한 최소한의 조직과 형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교회의 머리가 누구냐 하 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의 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체된 우 리가 머리되신 주님으로부터 우리를 어느 수준까지 요구받습니까 주님이 만족하시 는 수준까지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부단한 훈련이 다가옵니다. 그러니 이것이 기쁜일입니까 슬픈 일입니까 물론 기쁜 일입니다만, 어떻게 보면 대단히 힘들고 괴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절대 신자 자신이 만족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 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분량까지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것 하나 하고 나면 그 다음 쉬게 하시고 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 다음 코오스 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민학교 졸업하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중학교가 기 다리고 있습니다. 중학교가 끝입니까 그 다음은 고등학교, 그 다음은 대학교, 대학 나오면 끝입니까 더 귀챦은 사회가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앞날에 과거에 해왔던 것 때문에 가만이 있어도 되는 순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근 차근히 당신이 만족해 하시는 수준에 이르도록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엡4:12에 나 오는 온전케 되는(equip) 과정인 것입니다.

다시 엡2:20절을 보십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집 짓는 법은 모퉁이 돌을 근거로 합니다. 이쪽 모서리 돌을 하나 놓고 거기서부터 양쪽으로 벽을 이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짓습니까 주춧돌을 먼저 놓습니다. 기초를 놓고 그 위에 지어나가는데 이스라엘식은 돌을 하나 놓고 거 기서부터 그것을 기초로 해서 양쪽으로 벽을 이어가며 집을 짓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이 건물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도 그것 과 맞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요구하기 위하여 머리로 와 계시는 것입니다.

지체인 우리가 잘못하여 엉터리로 짓고 망치면 머리되신 그분께서 바로 지어질 때까 지 다시 짓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만족하는 수준에 이르도록 그러시는 것입니 다.

엡4:15절을 보십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 리스도라" 여기서 우리의 성장의 목표를 얼마나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까 바로 이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16절에 어렇게 부언하고 있습니까 "그에게 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 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는 그렇게 하여 자라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완성을 위해서 그 과 정으로서 허락하신 곳이 교회입니다. 만일 나 혼자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 교 회 안에 들어 오면 일 하나를 하려고 해도 옆 사람하고 맞아야만 되므로 신경이 많 이 쓰입니다. 다리 하나가 길다는 것은 다른 하나가 짧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어느 한 쪽만 유별나도 안되는 것입니다. 서로 맞추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앞서도 안되며 너무 뒤쳐져도 안됩니다. 모든 것을 함께 해야 됩니다. 바로 거기서 인내를 배우고, 겸손을 배우고, 또한 못할 줄 알았던 일이 되는 것을 보고 믿음의 분량이 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것을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훈 련시키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좀 오래하신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를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말라! 깊이 알면 알수록 시험받고 신앙 생활이 어려워진다. 분명히 그것은 일리 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시험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회사에서 고급 간부가 되면 집에 와서 부인에게도 말 못하 는 일들이 있습니다. 혼자 고민해야 하는 일들이 있고, 사람을 쓸 때가 있고, 잘라 야 할 때가 있고, 이쪽과 편이 되기도 하고, 저쪽과 편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일은 혼자 삼키고 혼자 욕을 먹어야 되는 때도 있지 않습니까 고급 간부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달게 받아 들여야 만이 고급 간부로서의 자질을 구비하는 것입니다. 쉽 게 무너지고 감당치 못하게 되면 고급 간부의 자리를 내 놓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 다. 또한, 이런 일들을 하나 하나 겪고 감당함으로 유능하고 노숙한 고급 간부가 되 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교회 활동에 깊이 참여하다 보면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직면하게 됩 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들을 우리에게 짐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훈 련을 위하여 그리고 그 분의 엄청난 계획을 위하여 우리를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것은 어떻게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무릎 꿇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일을 당하게 하십니다. 한숨밖에 쉴수 없는 일들을 당하게 하십니다. 꼼 짝없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릴 수 밖에 없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일을 교회 안에서 당하게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누구 때문이라고 따지면 따질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목사가 잘못해서, 어느 신자 하나가 잘못해서, 밖으로부터 이단 풍 조가 들어와서, 이런 식으로 이유가 있고 따질 수도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누구 의 잘못이냐를 따지기 전에 문제는 그 일을 지금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쁜 음 식을 먹었기 때문에 식중독에 걸렸는데, 무엇때문이냐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여 튼 걸린 것은 걸린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몸살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몸살을 해야 되는데 가장 중심 부에서 몸살을 해야 되는 분들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기가 저지른 일도 아니고 자 기가 그것을 해결해서 월급받는 일도 아닌 일에 밤잠을 못 자고 고민해야 되는 것입 니다. 그래서 이것이 힘들고 싫어서 나는 더 이상 교회 일에 깊이 들어가지 않겠노 라는 다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유학 가기 싫다는 것과 비슷한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유학 가는 것이 왜 어렵습니까 자기 나라 말로 해도 어려운 공부를 남의 나라 말로 그것도 접시 닦으면서 벌어서 공부하려 하니 생각만 해도 갑갑합니 다. 그래서 안 가는 것이 자랑입니까 난 이번에 하바드에서 오라고 했는데 안 갔어 이게 자랑입니까 오라는 데가 없어서 못갈 뿐이지요. 그것이 고통스럽지만 나중에 는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게 됩니다.

영적인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나 부름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 면 아무나 장로 됩니까 아무나 목사 됩니까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안됩니다. 그러 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더 깊은 자리에 초대하시거든 기뻐하십시기 바랍니다. 오 죽하면 야고보는 이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약1:2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바로 비밀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무슨 일 하자 그러면 줄 서서 합니까 아니요. 꼭 반대하는 사람이 있 고, 물귀신이 몇이 나오고, 그냥 성질 부려서 들이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일로 인해서 각자가 점점 크져 나가고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받은 사람은 그 사람대로 깊어지고, 물귀신 역활을 한 사람은 그 일로 손톱이 다 빠지고 하여 차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면 예수 그 리스도가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들을 볼때에 징그러운 송충이 보듯 해서는 안됩니 다. 놀라운 주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더 영광스러운 것으로 준비되어져 가고 있 음을 보아야 하며, 그것을 위한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들은 우리를 강하게 할 뿐이다!' 우린 실패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그것이 우 리를 강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실패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하여 도망 가기에 급급한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이 모든 축복과 성장을 위해 간섭하시는 그 모든 이유 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요17:23을 다시 보시면;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 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여기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 곧 원인이자 목표입니다.

사랑의 가장 큰 핵심은 대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에는 예의가 있고 대 접을 합니다. 무례하면 이미 사랑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데 무례해질 수 없 는 것입니다. 사랑은 동정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층이 나면 안 됩니다. 사랑은 대등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십니까 어떤 대 상으로서 우리를 요구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는 우리를 종이나 하인 정도로 여기고 교제하는 것은 싫어하신다고 하십니다. 대등 한 수준으로 우리를 대접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 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대접하시고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바로 이러한 수준으로 요구받는 자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 다. 인생에 있어서 어떤 난관이 찾아올 대에 그 난관을 헤쳐 나가는데 원조를 청하 는 대상으로 만으로 하나님을 요청하지 마시고, 사랑의 대상으로 요청하시기 바랍니 다. 이런 차원에서 여러분들의 신앙을 각자가 정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하나님 제가 교회도 나가고 십일조도 낼 테니까 제발 날 괴롭게 건드리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타협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이것이 우리 신앙에 제일 무서운 적입 니다. `제가 최소한 죄는 안 지을 테니까, 그 대신 저를 더 귀챦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우리 신앙에 최고의 문제입니다.

집에 있는 아이들이 어려서는 물건도 깨고, 잠자리에 지도도 그리고, 그리고 하지 말라는 짓도 하곤 해서 골치를 아프게 만듭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부 터 `다시는 밤에 이불에 쉬도 하지 않고, 그릇도 안 깨고, 조용히 가만히 있겠습니 다.' 하더니 그때부터 열 살이 넘고 스므 살이 넘어도 가만히 앉아서 아무 피해도 주지 않고 있기만 합니다. 그러면 그게 참으로 잘 하는 것이고 잘 된 것입니까 아 니지요. 그같이 답답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당연히 이제 는 제 구실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나이를 먹어 몸이 커지면 그 속에 드는 것도 자라 고 사람다와지고 가치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경륜과 나이가 이미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아이 적에 실수 하던 것만 안 하는 것으로 잘 하고 있는 듯이 말하고 있더라는 것입 니다. 이제 실수하지 않고 죄짓지 않을 테니까, 더 이상 간섭하지 마시고 평안하게 날 버려 주십시오. 이렇게 요구하고만 하고 있으니 이 멀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 러나 교회는 그렇게 우릴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가 여러 분의 성숙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신앙이 이제는 성숙되고 자라나 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성숙이 안되므로 훈련할 일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 다.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게 하심으로 비로소 자연히 훈련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개인으로 하면 결코 고쳐질 수 없는 나쁜 버릇과 성품이 교회 안에 들어와 여기 부 딪치고 저기 부딪치고 하는 가운데 고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하루 아침 에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서히 이루어집니다. 간단한 일도 제대로 이루어 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회의만 하는데 2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사람이 고쳐집니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고쳐지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속하게 일이 처리되지 않는 것 때문에 일방적으로 교회를 비방하지 마 십시오. 교회는 곧잘 같은 일을 하는데도 훨씬 골치 아프게 하는 곳입니다. 뻔한 일 을 가지고 모이고 또 모이고 인상 쓰고, 인상 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까 결국은 이맛살은 찌푸린 채로 입만 웃으면서 인내를 배우고 겸손을 배우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을 배우는 장소입니다. 부러지는 자를 걸어 맬 목이 있는 곳입니다. 혼자 면 열심히 하지만 넘어지면 아무도 거들어 줄 사람이 없어서 메뚜기 뛰듯 하는 곳입 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약속과 집념과 사랑이 항상 흐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다른 어떤 사람이나 그 무엇을 핑게치 말고 하나님의 부르신 그 부름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늘 충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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