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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2 (요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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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사건으로 출발합니다. 범인을 잡아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현장법이니까 죽여야 된다는 율법을 들고서 덤벼들었습 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죽이라고 그러면 사랑을 선포한 자로서 자기 올무에 빠질 것이고, 놓아 주라고 그러면 모세의 법을 어기게 되므로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올무에 걸리도록 되어있는 고소할 조건을 찾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풀어나가시는 방법중 핵심으로 잡으셨던 것은 그들 스스로 죄의 노예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확인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인 시 키느냐 하면 너희 손에 비록 필요하고 옳은 것이 쥐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선 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범한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 로 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손에 옳은 것을 쥐고 있으 면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손에 쥔 것이 옳은 것이라고 해서 옳은 일을 행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머리가 똑똑 하다고해서 무조건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 찬가지입니다. 손에 쥔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 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큰 오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에는 우리가 남과는 무언가 다르기 때문에 주었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시기를,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지 받은 것을 액자 에 넣어 놓고 길이 보존하고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도 이 싸움은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 신앙 생활에 많은 오해와 착각과 무지에 헤메이게 만드는 요소인 것입니다. 다시말해 많은 신자들이 내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 제, 즉 내가 옳은 것을 했다는 것이 모든 일의 가장 결정적인 척도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옳다는 것을 밝히는 순간 누군가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란 생존 경쟁입니다. 생존 경쟁에서는 내가 모두 옳고, 내가 괜찮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법인데, 여기서는 내가 반드시 한 사람을 낙오시키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 법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 하여 다른 사람을 낙오시키고 죽인다면 이미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 리가 터득하고 가진 방법이라고는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의 노 예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속박을 당한다는 생각을 쉽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죄를 저지르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그 반대로 말합니 다. 죄를 짓는 것은 죄의 노예이기 때문이고, 성경에서 자유라고 할때에는 우리가 죄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유란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치 못하는 자 리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케 되어, 드디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나를 봉사시킬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 은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속박 당하는 것에서 탈출하여 마음껏 죄 를 지으라!고 그럽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본능적으로 죄에 익숙한 사람들이고 원래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쪽으로 가있는 것이 자연스럽고, 죄를 안 짓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그 러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죄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정공법만 쓰는 것이 아니라 제갈공 명같이 매복도 하고 온갖 계략을 동원하여,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끌어 내어 멀 어지게 하는 방법이라고 하면 무었이든지 다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자유라는 문제에 있어서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은 지 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 앞에서 실수하고 있는 것같이 형식주의, 외식주의, 거짓된 마음들에서부터 나는 그렇게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나온 것이 전부가 아니 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런 죄를 안 짓겠다, 위선은 안 하겠다는 것이 전부가 아 니라 탈출하여서 나아가 진지한 것과 아름다움과 경건함과 거룩함에 봉사하도록 부 름받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일들입니다. 또한 죄에 자신을 팔아 먹 지 않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오늘 나에게 맡겨진 인생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항복해야 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정당하게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놀라야 할 일은 정당하게 된다는 것도 아직까지는 먼 일이고, 정당하다는 것이 오히려 죄 가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너희들은 다 가면을 쓰고서 외식하는 죄인들이다 하지만 난 아니다'라고 하는 것까지도 정죄하는 것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생각은 남을 정죄하는 것 이상으로는 결코 조금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 니다.

우리가 부름받은 것은 생명을 만들어 내고 물에 빠진 자를 건져 내고, 흑암에 있 는 자를 풀어 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작 '너희들은 흑암에 있구나!'라고 외치면서 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은 '여기에 빛이 있으며, 영원한 양식이 있으니 이리로 와보라!'하면서 해답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하는 말이 저들을 지적하며 질책하는 것만 으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빨리 이 말씀을 잊어버립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 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 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 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 이라"하는 이 말씀을 곧잘 잊어버리고 판단하며 지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느 곳에 가서라도 똑똑하거나 훌륭한 사람이라는, 그런 것을 내 세우지 마십시오. 방금 말씀이 그렇게 살것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께 열심과 진심을 바치는 차원에서 공부 하는 것은 늘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난 당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오. 그 래도 난 당신네들 보다는 괜챦은 사람이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공부에 전 력하는 사람은 전혀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인간 스스로가 깨우쳐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 혜라는 말이 없으면 기독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린 늘 충돌을 합니다. 다시말해 스스로의 자아를 세워놓고 그 위에다 기독교의 진리를 뽑 아서 내 안에 집어 넣으려고만 합니다 자아는 그대로 남겨 두고서 진리만 알고 있 으면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옳은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여러분이 옳은 신자가 되려면 여러분의 자아를 십자가 앞에서 허물고 그리 스도 앞에 엎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굴복되지 않은 싸움은 결코 끝이 난 싸움이 아닙니다. 예를들어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논쟁으로 굴복시켜 본 적이 있 습니까 사실 논쟁은 상대방에게 분노만 일으킬 뿐이지 결코 이익이 없습니다. 사 람은 결코 이성적인 존재라기보다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객관성을 가지 고 있더라도 그것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감정적으로 좋 다 싫다를 판단 내리기를 더 좋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아가 살아 있는 한은 사람의 이 그릇된 감정에 휩쓸려 자기가 편한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기 쉽상인 것입 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기뻐하느냐 않느냐가 아 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정으 로 옳은 삶을 살기 원한다면 감정에 잘 치우치는 자아 를 허물고 그리스도 앞에 철저히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부분이 우리 신 자들이 가장 넘기 어려운 문턱 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8장의 결론은 이렇게 맺어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냐 너희의 행하 는 것이 무었이냐 너희는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라 하고,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 지라고 하면서 어찌 그가 보내신 이의 말을 거부하느냐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 고, 내 편이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가 너희 자신을 변호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시니까 예수님을 책 잡으려고 왔던 그들이 반대로 꼼짝없이 궁지에 몰렸습니다. 이렇게 되었다고 유대 인들이 항복한 줄 아십니까 오히려 기가 막히게 빠져 나갔습니다. 요8:48절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하면서 말꼬리를 돌려 빠져 나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굵은 척도의 기준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었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자기 변명을 하기에 급급하는 존재들인가 하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설교를 듣다가 '아이구, 내가 목사님께 무슨 섭섭한 일을 했었나' 하면서 자신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는 것같은 말씀에 아주 고통스러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목사님의 그 말씀은 일반론적인 말씀이었지, 나를 개인적으로 공격하 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지...라는 생각을 하고서야 즉시 자유함을 얻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설교를 듣다가 혹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를 점검해 보십시오. ' 저 목사님이 왜 나를 지적하면서 그러시는가'하면서 곧 이어 개인적인 악 감정이 생기시거든, 그것이 교역자의 매너 때문인지, 여러분의 어떤 죄성에 찔리는 것인지 를 꼭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책임져야 할 일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인간이 어떤 죄덩어 리인가를 찌르지 않아 세상적인 용어로 '간이 부은'신자들을 많이 만들어 놓고 말 았습니다. 죄에 대한 지적이 오히려 개인적으로 악 감정과 싸움으로 가는 분위기만 조성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훨씬 아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속이 썩어가고 있는 어떤 부위를 잘라 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 로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잘라내는 일입니다.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주사를 맞 을 방법이 없으며, 안 아프게 수술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결론>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피로 죄성의 자리에서 끌려 나온 신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그 더럽고 추한 죄악 속에서 방황하실 필요가 없는 사람들 입니다.

성경은 신자들을 향하여 남자답게 강건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죄의 멍 에를 메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들을 보면 전부 연약하고, 다시 죄의 멍에를 지고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죄 아래서 노예 생 활을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죄가 주관 할 수 없는 약속을 받은 특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죄의 노예가 아니 라고 손을 흔들고 거절하기만 하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들을 주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그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까 교묘한 사술에 속아서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심판의 칼을 들고 서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꺽으십시오. 칼을 꺽고, 무릎을 꺽고, 여러분의 곧은 목을 꺽고서 회개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가 여러분에게 있기 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과 만족과 평강을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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