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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에 대한 기도 (마 06:13)

첨부 1


바로 앞의 간구는 과거를 다루며, 이 간구는 미래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자는 죄에 대한 고백이며, 후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한데서 나오는 탄원입니다. 최선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이 양자가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를 묶고 있는 악의 끈을 끊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의식을 더욱 강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하는데서 오는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새로운 욕망 속에서 우리는 먼저 빈번하게 찾아오는 죄로 유혹하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은 순전히 생래적인 양심만으로도 죄의 유혹이 무엇인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힘은 그 유흑에 항거하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용서받았다는 의식과 새로운 욕구 및 그로 인해 나타나는 사랑의 감정은, 우리 주변에서 반짝이는 기만적인 유흑들의 정체에 대한 파악으로 이어집니다.
용서받은 자는 영적 시력이 좋아져 이러한 유혹들이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실상은 우리를 파멸시키는 마귀의 세력임을 간파합니다. 사실 십자가의 기호가 그 더러
운 마귀의 진정한 정체를 드러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 마귀가 자기의 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용서받은데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이 낳는 새로운 동정심은 이 두리엘( Ithurrel:밀턴의 실락원에 나오는 천사로서 사탄의 정체를 폭로함)의 창입니다. 즉, 사탄의 정체를 파악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신을 용서하셨음을 믿게되고 그리스도를 사랑할 줄 알게 되었을 때, 그 매흑적인 유혹자를 보는 우리의 시각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때 햇빛 쪼이는 물 밑에 있는 물고기의 꼬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에게 자신익 죄를 가르쳐 주는 주요한 수단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용서를 통해 자기 행동의 결과에 대한 온갖 두려움에서 해방되면, 우리는 자기 행동의 도덕적 성격에 대해 고요한 마음으로 명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죄용서를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자각하게 될 때, 우리의 양심이 깨끗해지고 예민해져 순결에 대한 표준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결과 바르게 살고자 애쓰게 되면, 먼저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존재인가를 철저히 배우게 됩니다.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려고 시도해 보면, 급류의 세기를 알게 됩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순백색으로 빛나는 하나님의 순결 앞에서 자신의 모습은 더욱 검고 추하게 느껴집니다.
죄용서 받은 체험이 범죄적 성향을 단번에 깡그리 없애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믿음이 성결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가진 각 사람에게는 새 생명이 나타나 가나안 땅 여기 저기에 요새를 구축하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의 끈질긴 저항을 조금씩 정복해 나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성화의 과정은 점진적으로 느리게 전개되며, 악이 마음 속에서 제거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악은 혈관 속에 남아 있습니다. 핵심적인 죄악의 의지는 정화되지만 습성은 계속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영흔이 거듭남으로써 본질적인 저항력은 한없이 강해지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이 저항력이 약화됩니다. 또는 죄는 모종의 재발 경향을 남겨놓습니다.
한편으로 보건대, 반역죄에서 개심하여 깨끗함을 얻은 사람의 순결만큼 빛나는 순결은 없고, 그 사람의 순종만큼 확고 부동한 순종도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 궁극적 순결로 가는 도중에 죄사함을 얻은 당사자는 날마다 옛 자아의 쓰라린 잔재물과 투쟁해야 하며, 죄악과 싸워야 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죄악에 항거하고자 할 때 비로소 그는 죄악의 힘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과거 죄악을 애무할 때는 술술 매끄럽게 넘어갔던 그것이, 일단 자기 마음의 굴혈에서 쫓아내려고 하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과정은 그만큼 고되고 힘듭니다. 죄사함의 체험이 죄를 단번에 정복하지는 못합니다. 죄사함 받은 것은 죄에 대한 보다 깊은 인식으로 가는 길입니다.
죄용서에 대한 간구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간구가 전후로 배치되어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용서에 대한 간구에 뒤이어 유흑으로부터의, 유혹 중에서의 보호를 비는 간구가 나읍니다. 후자는 자신의 연약성과 타락하기 쉬운 성질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나오는 기도입니다.
시험은 두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로 유도하는 환경이고, 하나는 그 환경에 의해 유발되는 욕망입니다.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자기 영흔 깊은 곳에서 죄를 미워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마음 속의 가연 물질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불꽃(스파크)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불길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불꽃(스파크)은 물론 부싯깃도 있어야 합니다. 물이나 돌위에 떨어지는 불은 이내 꺼지고 맙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 는 인간이 만드는 것입니다.
본문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이 간구는 세상이 유흑으로 층만해 있는 위함한 장소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스는 ‘실험 (experimen), 시도(attempt), 시련, 시험(triaI, test), 유혹(tenpta tron’을 뜻하며, 여기서는 죄, 또는 믿음과 거룩함으로부터 타라으로 유흑하는 외부 조건이나 정신상태인 시험으로, ‘유흑’을 의미한다
“들게 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습헤로는 ‘데리고 들어오다(가다),-안으로 인도하다, 이끌다’를 뜻하며, 여기서 가정 과거이지만 명령으로 기능하며, 완전한 구원을 요구한다.
매일 당하는 시험(눅8:13)뿐만 아니라 이 지구 위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계3:10) 종말론적 고난과 인간을 타락케 하는 시험(막13:22; 계2:10)에 대한 기도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로 요약된다.
이 간구는 문자적으로 ‘우리를 유흑에 들어가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번역할 수 있으며, 즉 ‘우리를 유흑에 빠지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시험이나 유흑을 당한다. 아무도 이것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시험이나 유흑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유흑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 또는 유흑으로 이끈다는 사상이 없다. 단지 사탄과 그 속임수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시험과 싸운다. 때때로 그것은 너무 교모하게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시험을 심지어 깨닫지 못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디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다(고전 10:l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인지하고 그것을 능히 이길 힘을 얻고 하
존 번연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나의 여행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은 아주 위험한 나라들을 거쳐가야 하는 여행입니다. 곳곳에 함정과 덫이 놓여 있으며, 길을 따라 가노라면 절망의 구렁텅이, 옆으로 펼쳐있는 초장, 의심의 성, 과오의 산, 넓은 문, 죽은 자의 호수, 허영의 시장을 만납니다.
유혹은 도처에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유혹을 받는 입장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때가 없습니다. 집에 있을 때나 외출했을 때나 일을 할때나 놀 때나 막론하고 우리가 시험에 빠져들 수 있는 경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S.L. Roberts).
시험은 뱀과 같이 옵니다. 뱀이 어디에나 모든 장벽이나 방벽을 넘어, 모든 모퉁이와 구석으로 그 길을 찾아내는 것같이 인생이 시험을 떠나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가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 곳에 나타나며, 우리 자신 안전하다고 생각
할 때 나타납니다(M.D). 이 교활한 사탄의 시험을 경게하십시요.
성경은 죄로 유흑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시험자 사탄과 부귀와 명예와 영화 등 세상에 있는 것들과 그리고 우리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사탄은 세상에 있는 부귀와 명예와 영화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을 자극하여 죄에 빠지게 합니다.
사탄은 또한 가난, 역경, 환난, 박해 등을 퉁하여 시험으로 몰아넣고 죄로 유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을 직면할 때, 항상 사탄과 세속적인 것과 나의 욕심, 이렇게 삼각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고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하나님께 불복종하도록 유혹하여 인류를 타락시키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욥을 시험했습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군증들 중에서, 제자들을 통하여, 게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조롱하는 무리들 중에서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방해하는 시험을 했습니다.
사탄은 욥이나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으나 수많은 사람들을 유흑하여 죄에 빠뜨리고 멸망케하거나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이 잔악한 사탄의 시험을 경계하십시요.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너희는 마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유흑이 가득찬 이 세상에서 항상 시험에 들지 않도록 주의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이 간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환경을 주과하신다는 인식을 표현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운명을 정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명확한 것은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관하시고 시험거리를 만들기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아담을 시험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몰아 넣어 시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나아가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몇가지 실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관하시고 시험거리를 만들기도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시험한다는 것은 죄로 유인하는 자극물을 제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차적인 의미는 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악의적으로 유혹거리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이차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야고보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했습니다(약1:13, 14).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악이 우리를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확실히 우리를 시험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넘어질 수도, 설 수도 있는 어떤 외적 환경을 조성하는 한에서만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험거리를 보내시고 시련을 보내십니다. 어떤 시험이 유흑이 되느냐 아니면 시련이 되느냐는 시험을 보내는 자의 의향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악의로 유혹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비로 시련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보내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유혹거리로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보내는 시련을 우리를 하락시키는 유흑거리로 만들지 맙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욥, 광야의 이스라엘, 그리스도의 경우와 같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시험을 하거나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시험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늘기도합시다.

3. 이 간구는 우리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의식을 표현함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무수한 시험과 시련을 받아 파멸되거나 치명상을 입습니다. 우리가 강하다면 시험이 많다는 사실이 그토록 우리의 삶의 큰 난제로 등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간구를 드리는 것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간구가 언뜻 보기에는 시험을 면하고 싶은 소원을 피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이 간구가 그러한 의미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및 성격의 전체 요소와 모순이 됩니다.
그러나 이 간구에는 그러한 소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시험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자각만이 우리가 시험을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만일 우리가 게으름이나 고생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험을 회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육신의 고통을 회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육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탄하고 안락한 길을 원한다면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탄탄대로만을 걷고자 한다면 아직도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종들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약1:2).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연약성을 바로 이해한다면 죄로 유흑될까봐 두려워할 것 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불신 혹은 자기가 넘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드린다면 바람직한 일입니다.
기독교의 원수나 또는 위험과 격돌한다는 것은, 때로는 용기가 아니라 만용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오직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가 그것을 요구할 때,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유흑받기 쉬운 길목에 방치해 두는 것은 용기일 수 없습니다.
피해야 할 때는 피하고, 대적해야 할 때는 대적하고, 감당해야 할 때는 감당하고, 참아야 할 때는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대적하고, 정욕은 피하고, 자기 몫의 짐은 지고, 환난과 핍박은 참아야 합니다.
시험을 피한다는 것은 시험에 대항하는 가장 유력한 전략입니다. 앤드류 풀러는 ‘마귀와 교류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의 작업장에서 피해 가시요’라고 말했습니다. 새겨들을 말입니다. 피해야 할 때 피하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참된 지혜의 용기 입니다.
시험이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l)사탄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공격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연약한 부분이나 약점이 있습니다. 아킬레스의 건이란 신화가 있습니다. 아킬레스의 어머니가 제우스에게 ‘아킬레스가 불사신처럼 그 몸에 칼이나 창이나 불이 해하지 못할만큼 강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제우스는 ‘네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아이를 테베강에 완전히 집어 넣었다가 꺼내라 그러면 소원대로 되리라’고 그 비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킬레스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자마자 발뒤꿈치를 잡고 강물 속에 깊이 집어 넣었다가 꺼내었는데 그 아이가 강에서 나오자 마자 몸전체가 무쇠처럼 되어서 어떤 칼이나 활이나 창으로도 뚫을 수 없는 강력한 몸을 갖게 되었습니다. 불사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묻지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부분은 약하여 있었으며, 어머니가 붙잡은 발뒤꿈치였습니다. 그 약점 때문에 아킬레스는 패리스의 독화살을 발뒤꿈치에 맞고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말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다는 것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에 약합니다(딤전6:10; 수7:21).
-어떤 사람은 식욕에 약합니다(창25:34).
-어떤 사람은 이성에 약합니다(삿l6:1이하).
-어떤 사람은 명예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호기심에 약합니다(창3:1이하).
-어떤 사람은 게으름에 속수무책입니다(잠I0:4; 6:I0).
-어떤 사람은 시기심이 많은 것이 약점입니다잠14:30).
-어떤 사람은 의지가 약합니다.
이 마지막 문제에 대하여 한 말씀하겠습니다. 어느 학자는 ‘사탄이 지금까지의 많은 공작에서 가장 성공한 것 중에 하나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주일 예배는 기독교인의 우선 순위에서 제 1순위 입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은 남편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친구의 결흔식 등으로 인하여, 주일 예배 참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생을 산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나의 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서 주의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이 연약한 부분들을 노립니다.
(2) 시험자는 우리의 약점 뿐만 아니라 강점도 공격합니다.
우리의 강점도 심한 모욕이나 괴로움을 받을 때, 두려움이나 위험을 느낄 때, 방심할 때, 기타 이와 유사한 일로 인해서 급격히 약화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해졌을 때 시험이옵니다.
모든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자만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보시요.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잡히신 예수님이 있는 집 뜰에서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었으나 자기 생명의 안전을 위하여 아내를 부인하는 신실치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온유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이 고조에 달했을 때, 화를 내므로 그 온유함을 잃었습니다.
엘리야는 기도와 용기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나 이세벨의 위협에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으나 육욕때문에 간음과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대표적인 인물들의 이와 같은 실례는 우리의 자신감에 경종을 울리고 우리의 강함을 자랑하거나 자만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항상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합시다.

4. 이 간규는 우리의 최고 소원이 성결이고 최대의 두러움이 죄악이라는 인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가운데 이것만이 소극적인 간구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슬픔, 손실, 가난, 질병, 죽음으로 이끌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가 어찌 이러한 내용들로 우리외 기도를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수는 없습니다.
이 간구는 오직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그가 요구하는 한 가지는 외적 행복이 아니라 내적 성품인 성 결입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십니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유흑되지 않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5. 우리는 시험에 대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을 받는 것과 시험에 드는 것을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시험을 받는다’는 말은 죄의 유혹에 노출되는 것, 즉 죄를 행하도록 자극하는 요소에 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의미의 시험은 모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를 모면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험에 든다’는 말은 죄의 유흑에 동의함으로써 시험거리를 포옹하거나 그 안에 빠지는 일보 전진한 단계를 의미합니다. 이 간구는 포로가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어느정도 의식하고 있는듯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야할 것은 시련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고 시험을 통과해 벗어나도록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시련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삶의 모든 현장, 모든 단계, 모든 관계, 모든 직업에는 죄로 이끄는 유흑물이 가득하며, 또 언제나 가득합니다.
어떤 주어진 환경이 그 대상자를 시험하느냐 못하느냐는 그 대상자가 어떤 존재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대상자 속에 어떤 흡수력이 전혀 없다면 그 시험(유흑)이 달라붙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시련을 면하게 하여 달라는 기도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을 극복하고 통과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유익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인격에 유익한 영향을 미칩니다. 적을 죽일 자에게 죽임을 당한 적의 힘이 건너간다는 옛속설은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이겨냈을 때도 잘들어맞는 말입니다.

-시험의 극복은 진리 파악에 도움을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의식에 유익한 영향을 줍니다.
-그것은 미래에 유익한 영향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의 면제를 바랄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 강해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가 이렇게 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능히 그곳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의 도가니에서 벗어나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흑암의 골짜기에서 벗어나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그 곳을 통과할 수 있기를 구해야 될 것입니다.
.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표본입니다.
-주님의 생애는 우리의 귀감입니다. 그는 아들이라도 시험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힘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는 시험을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울 수 있습니다.
이 간구에서 우리 자신도 범죄한 모든 사람들과 동일한 인간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정욕을 가지고 있고, 그들처럼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한 동기에서 이 기도를 을리는 자는 시험이 닥쳐을 때 최선을 다해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입니다.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전장에 나가는 군인은 적군의 힘과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길 승산이 매우 높습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자만 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패배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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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로 들어오시면 브니엘 성경연구소 홈페지를 방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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