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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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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을 앞두고 인권 주간이 설정된 일은 우연한 일만은 아닌 것으 로 생각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깃들여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 그것도 아무래도 인간들이 어떤 모양이 로든지 상실하고 있는 진정한 인간됨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하나님의 경륜과 의지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일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권이라는 말을 현대 사회에서 중요시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그 기원을 유엔에서 채택한 '세계 인권 공동 선언'에서 찾아야 할 것 같 습니다. 그것은 1948년 12월 10일 프랑스의 파리에서 모였던 유엔 총 회가 이 '인권 선언'을 결의하고 그것을 세계에 공포한 일입니다. 그 러니까 이제 벌써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왜 그런 선언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 배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까지 인간들이 한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인간다운 대 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도 많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눌림받는 사람들, 착취 당하는 사람 들,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면서도 말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억울 하게 피해를 당하면서도 말 한다미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 사회에서 무시되고 소외된 사람들,약자,무력자,가난한 자,패배자, 실업자.. 이 러한 무수한 무기력한 인간 군상들이 한결같이 인간 대우를 못받고 있 다 함은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때로는 부자가, 때로는 권력을 가진 자가, 때로는 더 많은 지식을 소 유한 자가, 때로는 우수한 기술이나 수완을 가진 자가 자디르보다 약 하고 무력한 자들을 사회적으로 깔아 뭉개는 경우를 우리가 세계 도처 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안보를 최우선시하는 나머지 인권이니 자유니 하는 것은 좀 접어 두었다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고 합니다. 때로는 그 런 말들이 어느 구석에라도 나오기만 하면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는 하지만,그러면서도 우리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바로 인간을 인간으로 살기 하는 운동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약 성서의 복음서 기자들 중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가장 민감 하였던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런 사람들을 "잃어버린 자"라고 표 현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사회 현실에서 망각되고 있는 사람, 별로 대 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사람, 멸시와 천대와 구박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리와 죄인들이라 고 누가는 가끔 기록하였습니다. 이 설교에서는 그러한 부류에 속하고 있는 세리의 두목 삭개오라는 인물을 주목해 보기로 합니다.

인권문제를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두가지 면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아 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는 우리 자신이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경우 요, 다른 하나는 우리가 가해자의 경우입니다. 그 둘이 어느 쪽이든 모두 복음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피해자일 경우에는 운명을 체념하면서 무시된 채 엎 드려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인간 의 존엄성을 자각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일체의 열등감이나 좌절감을 과감히 불식하고 자신의 인격의 값이 소중하다는 신념을 되찾아야 합니다.남이 가져다 가 내게 안겨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것을 자신이 간직하고, 자신이 개발하고, 자신이 보유할 줄을 알아야 합니 다. 신앙이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자각 현상이요, 자기 발견이며, 주체의식의 회복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말로 바꾸면 이른바 인간화요, 성서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새로 나는 일이요, 거듭 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행을 당한 자들을 돕는다 할 때에 그것은 우리의 자랑도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 자신이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길이기 에, 결국 그것도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인간화를 위한 불가결의 행위임 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크리스천들이 다시 발 견해야 하는 인간화의 길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의 초점을 다시 삭개오의 설화에로 돌려 봅시다.

유대의 경건한 지도자급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 당하고 있는 사람, 그 가바로 삭개오입니다. 세리장이므로 유대인 동족의 이익보다는 유대인 의 적인 정복자 로마 정권에 기대어 그들을 돕는 역할을 한 자입니다.

그는 돈은 많았으나 유대 사회에서 고립된 자입니다. 아무도 유대인 중에서는 그를 인간으로 대우해 주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에 그는 부자이면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실은 잃어버린 자였 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인간에서 관심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해도 조금은 이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그리스도 께서 그의 겉치레를 보셔서 그런 것이 아니요, 그의 영혼의 고독을 보 셨기 때문입니다.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 따위를 불구하고 나무에 올라가 예수의 얼굴을 뵙고자 하였던 그의 외로운 영혼의 짙은 몸부림 을 예수께서는 보셨기 때문입니다.

멀리멀리 안정된 보금자리를 떠나 허랑방탕한 잃어버린 자도 있는가 하면,멀끔하고 점않게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교만과 냉담 과 편파심과 무관심 속에서 잃어버려진 자도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그리스도에게 발견되어져야합니다. 모든 인권을 되찾아야 합니다. 복 음은 바로 우리의 안과 밖의 이런 이런 잃어버려진 자를 찾아 인간화 를 이루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오셨다고 발기 말씀하셨습 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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