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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많은 여인 (눅 0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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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전도할 때 모범으로 삼기 위하여 대개 전도의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을 초대하게 된다. 이러한 방법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도의 용기를 가지게 하는 방법이어서 어느 정도 유익을 가져오게 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전도는 어떠한 방법이라야 하며 우리의 전도는 어떠한 사람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함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예수님께 나아 온 '한 죄 많은 여인'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4개의 복음서가 모두 다 취급하고 있는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이다.(마 26:6-13, 막 14:3-9, 요 12:1-8) 그러나 그 내용면에서 쉽게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마태와 마가는 문자적으로 같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다. 요한의 기록도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시기적으로 같은 이야기라고 본다. 그러나 누가의 것은 같은 사건이 아니라 같은 사건이 두번 반복된 것으로 본다. 공통되는 점이 있다면 주인의 이름이 시몬인 것과 여인이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것 정도이다.
이 사건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본문 앞에 기록된 33-34절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稅吏와 罪人의 親舊로다 !'라 일컬음을 받으신 분이시다. 오늘 우리가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서 들음즉 한 메시지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이다. 전도자가 만일 어느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면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다. 지식인을 대상으로 전도하면 무식한 사람들을 예수 믿겠는가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면 부자들이 부끄러워서 교회 못나가겠다고 한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라는 말은 그들을 가까이하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이렇게 비아냥 거리는 말을 들으시는 예수님께서 어느 날 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 가셨다.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이라 하면 예수님을 적대하는 시기에 예수를 자기 집에 모신 일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접대하는 일이 좀 소홀 하였다. 식사를 대접하려고 오시라 하였으나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마침 그 동네에 한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그녀가 올 때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향유를 쏟아 부었다. 당시의 기록으로 '죄인인 여자'란 창기를 말한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곁에 와서 눈물로 발을 적시며 머리 털로 씻으며 그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부었다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에게 이러한 사건이 벌어졌다면 여러분은 어떠한 반응을 보이겠는가 거룩한 여러분에게 거룩하지 못한 한 여인이 다가와 눈물로 발을 씻고 향유를 붓는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이시겠는가 말이다. 시몬은 마음에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 사람이 萬一 先知者라면 自己를 만지는 이 女子가 누구며 어떠한 者 곧 罪人인 줄 알았으리라.'(39)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행하는 일을 조용히 받아들이셨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여 '사단아 물러가라 ! 감히 어디에다 손을 대느냐 '라고 일갈 하였다면 바리새인이 그를 선지자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을 구원하는 일은 실패할 것이다. 당시 랍비의 교훈에는 여인들이 4규빗 이내에 다가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물며 창기와 같은 죄인의 경우에는 더더욱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한 당시의 규례를 모를리 없을 터인데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은 잠잠히 계셨다. 그 여인이 하는대로 내버려 두신 것이다. 이 여인의 행한 일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겸손 /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회개 /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헌신 / 자기의 머리 털로 씻고
-사랑 /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헌신 / 향유를 부으니
바리새인은 이 여인의 행위를 보면서 그녀의 중심을 읽지 못한 것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을 이미 읽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체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상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고민들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고민하는 삶은 어쩌면 정상적인 삶이다. 하이덱거는 사람들에게 세가지 고민이 있다고 말하였다. ① 물질에 대한 고민 ② 사람에 대한 고민 ③ 자신에 대한 고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재물을 가지려고 고민한다. 그것이 성공하면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고 고민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도 성공하게 되면 자기자신에 대하여 고민을 한다는 것이다. 첫째고민은 푸는 자가 더러 있다. 둘째고민도 푼다. 그러나 셋째고민은 아무도 스스로 푸는 사람이 없다. 사실 누구든지 심각하고 어려운 고민이란 자기 자신의 문제이다. 인간의 고민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고민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가 어떠한 고민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저울질 된다. 하나님은 고민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드셨다.
전도는 무엇인가 고민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의 고민과 함께 하는 것이다. 여인의 고민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의 빚진 자' 이야기 속에서 이 여인이 어떠한 심정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500 데나리온 빚진 자와 50 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는데 갚을 것이 없어 주인이 둘 다 탕감하여 주었는데 둘 중에 누가 더 주인을 사랑하겠느냐 하는 말씀을 던지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한가지는 두사람이 다 빚진 자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내가 무엇을 위한 존재인가를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여인은 자기가 한없이 큰 죄인임을 알았다. 자기의 문제를 안 이후 그는 더 이상 거기 머무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여인은 바리새인의 집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가 만난 것이다. 여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다. 눈물 머리털 향유 그리고 사랑이 그것이었다.
다른 한가지는 두 사람이 다 탕감을 받은 자라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용서받은 죄인이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더 주인을 사랑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렇다. 전도를 하는 것도 주의 사랑을 받은 사람 깨달은 사람이 한다. 용서의 체험을 가지고 그의 사랑을 한장의 전도지에 담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사람은 전도를 한다.
여인은 주님의 발 곁에서 눈물로 발을 적셨다. 용서를 구하며 용서를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태도이다. 바리새인 시몬은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은 참으로 귀한 눈물을 예수님께 쏟아 부은 것이다. 그녀의 가장 소중한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어 드렸다. 그리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다. 입맞춤은 사랑의 표시이다. 시몬은 주님을 위하여 행하여야 할 예의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기를 계속하였다. 향유까지 부어 드렸다. 이것은 용서받기를 바라거나, 용서받은 죄인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이다.
전도는 시간이 남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는 교인들을 교회당에 채우기 위하여 하는 것도 아니다. 전도는 그리스도 복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나타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여인은 500 데나리온 빚진 자처럼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였다. 그것은 갚을 것이 없는 채무자의 자세 그대로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 대하여 바리새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니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
이 말은 언듯 보기에 사랑이 용서의 원인이 된다고 보기 쉽다. 대부분의 가톨릭에서는 이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판단이다. 가톨릭의 공덕설은 여기에서 힘주어 말한다. 앞서 말한 43 절에서 시몬이 판단한 것과 같이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고 하는 판단이 옳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많은 죄가 용서 받았다고 하는 생각은 아무래도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하게 생각할 것 믿음이 없는 사랑이 용서의 근거가 되겠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서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주님을 사랑한다고하면 그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는 사랑이 계속되나 만일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그대상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가롯 유다에게서 본다. 유다는 다른 제자와는 달리 남쪽 출신이다. 그가 남쪽에서 주를 좇아 갈릴리해변을 거닌 것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서이다. 곧 억압받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열심히 달려 온 인물인 것이다. 그는 열심당원이었다. 가롯이란 말은 그가 열심당원이었다는 증거이다. (ISCARIOT) 또 그의 열심이 다른 제자들에게도 신임을 얻었다. 그는 회계직을 맡았다. 그는 언제나 돈 계산에 빨랐다. 향유를 허비하는 여인 앞에서 그는 서슴없이 혀를 차면서 '에그 그 아까운 것을 ...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줄 수 있었겠는데 !'하였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요 12:6) '그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유다는 자기의 기대가 이뤄지지 않게 되자 주저없이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넘겼다. 저는 오늘 아침에 우리 주 예수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무엇을 기대함으로 나타나는 사랑이 아니기를 바란다. 이미 받은 바 은혜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사랑이기를 믿는다. 500 데나리온 탕감받은 채무자처럼 많은 것을 탕감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이기를 바란다.
사랑은 곧 믿음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믿는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은 곧 여러분을 믿는다는 것이다. 과거에 행한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을 해 왔던가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셨다. 예수님은 여인을 믿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셨다. 여인을 향하여 평안히 가라고 명하셨다. 평안은 유대인들의 축복의 선언이다. 수치와 고민의 날이 아니라 이후로는 평안이 네 앞에 있으니 평안을 향하여 가라는 선언이다. 이 평안은 외적인 평안이 아니다. 깊은 산 옹달샘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마음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평안이요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평안이다.
여러분은 이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주의 사자들이다. 여러분에게 이 평안이 넘치시기를 축원한다. 또 이 평안을 전달하는 전도자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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