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마 28:16-20)

첨부 1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주님을 만나 경배하고 세계 선교의 대사명을 받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시간보다는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했던 시간이 더 길고 많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방에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셨으며, 전열을 가다듬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는 참변을 목격한 후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4 가지 큰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7절 말씀을 보면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17절에서 말하는 "경배" 라는 것은 신하가 왕에게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경배한 것입니다. 왕은 절대 통치 권한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은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절대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이십니다. 나의 왕이며 우리의 왕이며 만왕의 왕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13-15을 보면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맑은 물소리와 같으며" 별들의 전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 시대에는 열강들의 전쟁이 극심합니다. 서로간의 세력 다툼과 패권 다툼으로 긴장이 고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께 경배했던 것처럼 세계 모든 인류가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께 경배했던 것처럼 세계 모든 인류가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날 세계 평화는 도래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경배하던 제자들 가운데는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고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체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갈릴리에 모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이미 만났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처음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중에 의심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이라도 의심할 수 있다는 부정적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모라도 어린 예수를 잃어 버린 채 사흘 길을갈 수 있듯이, 의심해선 안 될 사람들이 의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의심이 언제 어떻게 깨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도마는 주님을 직접 대면하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 손의 못자국을 만져 보고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 창자국을 만져 보아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다던 고집을 꺾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 " 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경우에는 ,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거나 증거하지 못했던 소극적 삶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 강림 이후 확신과 증거의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의심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이 짙어져 의처증이 되고 의부증이 되는 것처럼, 신앙적 의심도 깊어지면 불신과 반역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파도에 휩쓸려 들어가던 베드로에게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헬라어로는 의심하다를 "디아크리노 라고 합니다. 그 뜻은 "철저하게 분리하다" 혹은 "철수하다" "주저하다" 입니다.
의심은 하나님과 나를 철저하게 분리시킵니다. 의심은 나에게서 믿음과 안정과 기쁨과 소망을 철수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신앙 생활이나 교회 생활을 주저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의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의심이 덫에 더 이상 걸려 있으면 베드로처럼 깊은 물 속에 함몰될 우려가 있습니다. 의심을 떨쳐 버립시다.

2. 주님의 분부를 생각해 봅시다.
19-20절에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갈릴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지 말고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가서"라는 것은 유대 전역, 나아가 전세계로 가라는 것으로 선교의 영역을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족속"은 나라와 언어를 달리하는 전세계 사람, 즉 선교의 대상을 의미합니다. 또한 "제자를 삼아" 라는 것은 그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분부입니다.
가르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군인을 훈련시키는 것은 전투하는 힘과 기를 길러 주려는 것이고, 선수를 가르치는 것은 경기를 치러 내는 기술과 힘을 길러 주려는 것입니다. 현대 학교 교육의 허점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국 교육의 최종 목표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학에 들어간 후엔 그것으로 끝입니다. 인생이 토론되고 삶이 이야기되고 세계와 가치와 창조적삶이 무르익어야 할 대학이 화염병과 최루탄과 잦은 휴강으로 마치 전장과 흡사해졌습니다.
존경과 우정과 평화 교육의 장이어야 할 대학이 불신과 경쟁과 폭력이 날뛰는 시장 바닥으로 전락해 가고 있기 때문에 대학은 본연의 기능과 사명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라 그리고 그것을 지키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킨다는 것은 수호한다. 유지한다. 실천한다는 뜻을 갖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킬 것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나 자신입니다.
디모데전서5:22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믿음입니다.
디모데후서 4:7에서 바울은 "내가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세째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15에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믿음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을 바로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고 약한 믿음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을 바로 지키기만 하면 그 믿음이 점차 자라서 큰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밭에 씨를 뿌린 후엔 반드시 흙으로 덮어 줍니다. 이유는 새들이 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촉촉한 흙 속에서 뿌리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도 귀합니다만 잘 키우고 보호하고 지키는 것은 더 귀한 일입니다. 보화를 소유하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만 그러나 잘 지키는 것은 더 행복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르친 것을 지키도록 하는 것은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우리 믿음을 올바로 지킵시다. 말씀대로 살고 지킵시다.

3. 이러한 사역이 삼위 하나님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부르셔서 마지막 명령인 복음의 대위임을 행하셨습니다. 가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를 삼기 위해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영접케 하고, 세례도 베풀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며, 이제 모든 것이 제자들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제자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명령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명령권자, 위임자가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 명령권자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은 분임을 확언하십니다. 이 명령은 교회의 사활이 걸려 있고 온 세계 족속들의 영혼이 걸려 있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를 새롭게 강조 하시면서 반드시 수행되어야 할 명령임을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영혼 구원의 사역은 사람을 도구로하여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이것은 오직 삼위 하나님을 통하여 완성되는 사역입니다. 창조 사역도 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역이요, 인류의 구속 사역도 삼위 하나님께서 완성하시는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도구된 모든 사람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라고 말씁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역을 감당하면서 잊지 말야야 할 것은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역을 행하는 도구들은 삼위 하나님을 늘 의뢰할 수밖에 없으며, 그 분 앞에 늘 무릎 꿇는 자세로 나가야 합니다.

4. 영원한 임마누엘입니다.
20절 하반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7:14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23에서 이를 다시 인용하여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덧붙여 설명했습니다.
본문의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주님의 말씀도 이와 맥을 같이합니다.
임마누엘로 예언되었고 임마누엘로 탄생하신 주님께서는 결국 승천하시기 전 다시 한번 내가 영원한 임마누엘로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백 년을 해로하자고 굳게 맹세했던 남편이 먼저 가는가 하면 아내가 먼저 가기도 합니다. 코흘리개 철부지들을 두고 보모가 먼저 가는가 하면 노부모를 놔둔 채 자식이 먼저 가기도 합니다. 행복한 환경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부귀 영화도 영원한 조건이 못됩니다. 지금 내가 자족하고 만족하고 흐뭇해 하고 있는 그것들도 내 곁에 영원히 있을 것들은 아닙니다.
캐나다에서 목회하시는 어떤 목사님은 딸이 시집가는 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그가 운 것은 "조국도 떠나 왔는데 너마저 떠나는구나"라는 생각이 뼈에 사무쳐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곧 영원한 임마누엘이신 나의 주님이십니다. 모든 것들이 온다간다 말 한 마디 없이 내 곁을 떠난다고 해도 온 세상이 모조리 나를 외면한다고 해도, 철석같이 믿었던 것들이 내 곁에서 사라져 간다고 해도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중세기 수도사들은 하루 한 차례씩 "메멘트모리"라는 라틴말을 암송했다고 합니다. 그 뜻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순간에도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또 내가 죽은 후에도 나와 함께 영원히 계시는 분은 영원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어차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폭풍도 있고 환난도 있고 이별도 있고 슬픔도 있습니다. 실패도 있고 아픔도 있고 죽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내 곁을 떠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손을 붙잡을 필요가 더 절실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에 아멘하면서 그 말씀 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 행로를 예수님과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토록 저와 여러분과 함께 죽음이 우리육신의 사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아니 저 하늘나라에 가기 까지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