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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3 (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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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절 > 그러므로. 예수께서 지금 이 권세를 가지고 있으므로 당연히 그 제자들은 가서 제자를 삼아야 한다. 그 권세는 세상을 다스리거나 세상 권세자들처 럼 세도를 부리는 권세가 아니다 (20:25). 오직 하나, 남을 섬기며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20:26-29) <예수의 제자> <삼기>에 써야 하는 권세이다.

왜냐하면 그 권세를 주신 분이 바로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아버지께로부터 그 권세를 받 았다 (20:28). '그러므로' 이 권세를 받을 자격자는 제자의 모본이신 예 수처럼 섬김과 죽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제자'이다.

가서 (포류센토스 poreuqe,ntej). 원문의 '가라' '세례 주라' '가르치 라'는 다같이 분사이므로 분사 용법대로 하면 '가면서 … 세례 주면서 … 지키도록 가르치면서…'라고 번역된다. 예수의 명령은 단순히 '우리가 가 면서' 즉 '우리가 가는 곳이면 어디나' 제자들 삼으라는 것이지 선교사로 사역하기 위해 특별한 곳에 나가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분사가 명령법에 종속된다 해도 보통은 그 분사가 명령법을 선행할 때 에는 명령법적 의미를 갖는다고 하여 '가라'를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특히 선교학에서는 중요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 용어를 강조 하려 애쓴다. 그러나 선행하는 말과 뒤따라오는 말이 모두 주동사인 '제자 삼다'라는 말에 종속되어 있음이 확실하므로 전 단계의 '가라'는 말이 어떤 활동의 시작을 나타내었건 셈어적 관습에서 유래하였을지라도 주요 강조점은 역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에 있다. 만일 '가라'를 강조하려 했다면 아예 처음부터 명령을 썼을 것이다.

제자를 삼으라 (마세튜사테 maqhteu,sate). 단지 '제자를 삼으라'는 동 사만 명령형이다. 예수님 지상 사역 중 가장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가 제 자 삼기이며 세상에 남겨 두신 유일한 것도 제자들뿐이었다. 떠나실 때 남기신 최후의 유언도 제자 삼으라는 명령이다. 마태복음 전체가 제자도 에 대한 이야기요 그래서 마지막 부분을 제자 삼기로 마무리한다.

마태복음에는 이 <제자도>가 특이하다. 제자도의 본질, 기본적인 제자상 은 첫 제자를 부를 때 나타난다 (4:18-22). ① 제자는 스승과 친밀한 관 계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예수가 친히 불렀다 (9:9) ② 제자도는 예수 의 권세에 즉시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4:20,22). ③ 제자도는 값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시몬과 안드레는 안전한 직업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았고 야고보와 요한은 부와 가족을 포기했다 (8:18-22, 13:44-46, 19:16-29).

④ 제자도는 <선교>에 투신해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를 부를 때 사람 낚 는 어부가 되리라고 약속했다 (9:35-11:1, 28:16-20). ⑤ 제자도는 예수 의 사람들로 구성되는 <제자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포함된다 (5:17-26, 18:1-35, 23:1-11). ⑥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것>을 강조하는데 (4:18-22)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말 한다 (9:15, 12:30, 26:38-40). 그리하여 고난도 함께 경험하고 (5:10-12, 10:24-25) 그로부터 배우며 (5:1, 10:24, 13:36) 그를 모델로 삼아 그 의 본을 따라 살며 (20:25-28)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여 정에 동참해야 한다 (10:38-39, 16:21, 24-28).

마태복음에는 세 가지 모습의 제자상이 나타난다. ① 밝은 모습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4:18-22, 19:27) 예수가 선포한 하늘나라 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그 상으로 하늘나라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능 력을 받고(13:10-17, 51-52)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올바르게 고백하고 (14:33, 16:13-20) 예수를 경배하며 (14:33, 28:17) 그에게 복종한 (4:18-22, 9:9, 21:1-7, 26:17-19) 제자의 모습이고, ② 주님의 교훈을 미처 깨 닫지 못하고 (15:15-16, 16:5-12) 겁도 많으며 (8:26, 14:31) 위급한 순간 에 주님을 버리기도 하는 (26:30-46, 56, 69-75) 어두운 모습도 없지 않지 만, ③ 세번째 모습이 바로 본문에 나타난 제자상인데 부활과 파루시아 사 이에 있는 제자들의 미래상이다. 이 기간은 계속되는 반대에 부딪히면서 세계 선교를 해야 하는 시기로 핍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위협과 배교가 동반되는 때이다 (10:16-39, 13:20-22).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믿음에 굳게 서있어야 하고 (24:45, 25:21-23) 깨어있어야 하고 (24:42, 25:1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어야 한다 (10:22, 24:13). 이 인내와 적극적인 제자 삼기 두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께서 교회와 함께 하시므로 가능하다 (1:23, 28:20).

여기서 제자의 갈등 구조를 본다. 밝은 모습은 자기를 제자로 동일시하는 독자들을 격려할 것이요, 어두운 모습은 제자도에 대한 도전을 줄 것이다.

그래서 갈등과 투쟁 속에 고투하는 독자들도 왕좌에 앉으신 예수께서 자기 들을 격려하시고 도와주심을 알고 희망을 갖는다. 이 미래를 향한 제자도 는 예수님 지상 사역시와 마찬가지로 달콤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져야 하고 (그래서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렸다)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 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성 프란시스는 알몸으로 주님을 따라갔다). 마태 공동체는 제자 공동체요, 제자 삼기가 주님의 지상 명령임을 알고 있었다.

선교는 그 안에 포함된다.

모든 족속 (판타 타 에트네 pa,nta ta. e;qnh). 마태복음에서 '모든 족 속'은 8회 나타나는데, 보통은 이방인, 흔히 이교도를 가리켰다. 그러나 관사 없이 언급된 21:43의 '민족'은 유대인을 배제시키지 않았고, 에트네는 '종족들,' '민족들,' '백성들'의 뜻으로 사용되므로 판타 타 에트네는 아무 구별 없이 '모든 백성들' 혹은 '모든 나라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목표는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을 구분 없이 제자로 삼는 것이다. 예수의 권세가 우주적 권세로 승화되었기 때문에 제자 사역도 전 우주를 포함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부활 후 마지막 명령 전까지는 이스라엘에만 관심 을 두었다고 더러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예수의 지상 사역에서도 이방의 관심이 나타난다. 가버나움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줄 때 하신 말씀 '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8:11) 처럼 예수님 탄생시 동방박사의 방문은 메시아인 유대인의 왕을 찾아 '동쪽에서 온' 무명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징조를 살펴보고 별의 진행에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를 발견하 자 자기들의 모든 것을 바쳤다. 반면 헤롯과 유대 지도자들은 이 왕을 배 척했다. 복음서 서두 족보에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 할 때 다 윗은 유대인의 왕이요 아브라함은 온 이방인의 아버지인데 아브라함의 자 손은 예수를 맞으러 왔으나 다윗의 자손이 유대인은 예수를 거절했다. 예 수의 인격 안에서 하늘나라가 왔으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종교적 구별은 더 이상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교훈을 성실하게 지키는 제자 됨으 로 규정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세례시 삼위 칭호는 예수 의 세례시 나타난 삼위를 반영한다 (3:16-17). 예수께서 분명하게 '세례 를 주라'고 명하신 곳은 오직 이 본문에서이다. 처음 제자들은 '예수 그 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 이외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삼위 세례 공식문은 비교적 후기에 생긴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당시에 예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와 삼위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가 공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근거가 없다.

이 공동체는 아들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도 하나님이 임재할 것이라는 확 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하나님, 엄위하신 하나 님, 그래서 멋대로 상정해 버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과 성령 안에서 하 나님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항상 같이 계실 수 있고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어주 며 자신을 열어 보이는 하나님이 마태 공동체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에 종사하게 된 <부활 후> 제자들은 예수의 권세에 근거하여 세례 주고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세례를 통하여 사람 이 예수의 제자가 되고 가르침을 통하여 제자들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게 되며 또 행하게 된다. 제자직에 대한 응답은 세례 받고 가르침 받는 일이다. 세례와 가르침을 받지 않는 제자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자가 되려면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에이스 eivj) 세례를 받아야 한다. 전치사 '안으로' (에이스 eivj)는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행위, 즉 주님의 권세 아래로 들어오는 행위를 강하게 암시해준다. 그러므로 세례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주님의 권세에 굴복하겠다는 서약의 표요, 동시에 세례는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자임과 동시에 그 나라의 제자로서 복종의 삶을 시작하는 것을 나타낸다(13:52).

< 20절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직역하면 '내가 너 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가르치면서'이다. 분사형 '가르 치면서'와 부정사 '지키도록'은 둘 다 19절의 '제자 삼으라'라는 명령형에 연결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활동이 '가르침,' '전파하심,' '병고침'으로 요약된다 (4:23, 9:35).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 송하면서 '병고침' (10;8-9)과 '전파함' (10:7)을 명하시면서 '가르침'은 지금까지 보류해왔다. 예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선생은 하나' (23:8)뿐, 즉 가르치는 권세는 오직 예수만이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예수 가 부활하여 가르칠 책임과 권세를 지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이양해준 다.

지키게 하라. 마태에게 있어서 가르친 것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반석 위에 세운 집의 비유 (7:24-27)가 대표적인 예 로 산상보훈의 마지막 결말을 비켜 행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동방박사 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징조 혹은 표시에 행동으로 응답했기 때문에 예수 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반면 유대 지도자들은 메시아가 어디에서 날 것을 알면서도 찾아가지도 않았다. 마태복음의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 종하는 위대한 스승이시다.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 니라 도리어 완성하려 오셨다 (5:17). 그래서 그 분은 모든 삶을 통해 행 함으로 응답하도록 제자들을 초청한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 는 자라야 들어간다 (7:21). 마태의 고유한 부분이 두 아들의 비유 (21:28-32)에서도 참 아들은 '예'라고 대답하는 아들이 아니라 처음 대답 이 어떠했든 실제로 밭에 나가 일하므로 행동으로 반응을 보인 아들이다.

역시 마태 고유 부분이 양과 염소 비유 (25:31-46)도 비록 예수를 알았다 해도 실제로 행동으로 반응을 보인 아들이다. 역시 마태 고유 부분인 양 과 염소 비유 (25:31-46)도 비록 예수를 알았다 해도 실제로 행동으로 나 타낸 행위를 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와 들어가지 못하는 자를 가 른다. 마태가 강조하려는 것은 예수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나음과 마태 공 동체의 나음이란 복음으로 삶이 변화되고 변화된 삶으로의 부름에 행동으 로 응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신분이나 인종이나 종교적 지위가 아니요 하나님의 뜻이 어디서나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데에 있다.

볼찌어다. 여기서 이두 ivdou. 는 '확실히'란 뉘앙스에 가깝다. 역시 복음서 서두 1:20 (보라)에 대칭된다.

이 세상 끝날까지. 직역은 '이 세대의 끝까지'라 할 수 있다 (13:39,40,49, 24:3).

너희와 항상 함께. '함께'는 예수 탄생시 복음서 서두 (1:23)에서 예수의 이름 (임마누엘)과 관련하여 강조되었는데 복음서 중간에서도 반복되고 (18:20,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복음서 마지막 구절에서 다시 약속으로 강조된다. 복음 전파와 제자 사역은 명령으로만 끝나지 않고 위로하시는 예수의 임재 약속이 함께 하는데 이 임재의 약속은 제자들이 주님의 지상 명령을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항상' (파사스 타스 헤메라스 pa,saj ta.j h`me,raj)은 신약에서 여기만 나타나는데 직역하면 '모든 날 들'로 우리의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 킨다. 나아가 주님의 임재는 이 세상 끝날까지,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역사의 종말의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부활 이후에도 지상에 있을 때 가르친 교훈 속에서 예수는 여전히 그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며,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그의 뜻을 관철시켜서 하나님이 장차 이 땅에 와서 그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도록 할 것이다.

마태복음은 '선포하다,' '복음을 전하다' 같은 표현들이 마가에 비하여 적은 반면 제자 집단과 계명의 준수 개념들이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행동을 수반한 제자 삼기의 사명을 줄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마지막 부분은 근본적으로 선교에 대해서가 아니라 <제자 공동체>의 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자도가 대를 이어 계속되는 한 마태복음은 주님의 명령이 완성될 때까지 종결된 책이 아니다.

메시지 제안 이미 본문 해석에서 메시지의 힌트가 나왔다. 여기서는 그 보충 자료가 될 것이다. 본문이 선교가 포함된 제자도가 주제라면 제자도에 대한 연속 강해를 시도해도 좋은 것이다. 혹은 원한다면 다음과 같이 메시지의 내용 을 택해 볼 수 있다.

 1. 제자가 된다는 것은-신자와 제자가 다른 개념인가

2. 제자가 되는 자에게 가르칠 내용은-이 세상 나라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

3. 지켜 행하라는 말씀 의미는-믿음과 행함의 관계

4.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는-세상 권세와 다른 점

1. 지상 명령이 바로 제자 삼기라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따로 불러 훈련시켜 <사도>라 칭했지만 마태복음서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는 모두 제자이다. 즉 예수 믿는다는 것과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적어도 주후 3백년까지는 다같은 개념이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선포한 후 가짜가 물밀듯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믿는 자와 제자 그룹을 갈라놓았다. 현대 교회도 목사 그룹, 장로 그룹, 권사 그룹, 집사 그룹, 평신도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고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분해 제자와 신자 사이가 모호해졌다. 그래서 신자는 많지만 제자는 별로 없고 제자라고는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제자 모습이 아니고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 놓은 규정에 맞춘 제자일 뿐이다. 마태 공동체에 의하면 목회자 평신도 선교사 모두 <제자 그룹>에 속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마 제자도 따를 때 지불할 대가가 너무 커서 등급을 매겨버린 것 같다. 전 교인 제자화, 이것만이 주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되는데 제자가 치러야 할 값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제자로 따르려면 가지 소유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따라야 하 며 심지어 부모 처자까지 버려야 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 다. 제자로 따를 때 지불할 대가는 고난과 죽음이다. 제자의 본질은 예 수의 생애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 예수의 길은 십자가다. 그러므로 예 수를 믿고 따르려면, 제자로서 그와 삶을 나누려면 기쁨과 고난도 나누어 야 한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 로들과 데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그리 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1:29).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 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 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행14:22).

베드로도 요한도 스데반도 야고보도 바울도 그렇게 살아갔다. "내가 수고 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ㅎ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 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 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 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 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인의 삶이요 제자의 삶이다. 고난은 제자도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왔다가 되돌아섰다. 열 두 제자에게 요구하 셨던 이 제자의 대가는 예수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2. 처음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교훈을 실 행하는 데 노력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재현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교회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질 서를 가르치고 그대로 살도록 가르쳤다. 바울 서신에 예수님의 역사적인 이야기나 생애 등은 언급이 없고 바울이 복음서나 예수의 언행록을 기록하 지 않은 것만 보아도 그렇다.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 나라 질서를 하나님 의 나라 질서로 바꾸어갔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당연히 예수가 선포한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한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 그 질서는 현 세상의 질서와는 정 반대이다.¡ 예컨대, 첫째 되고자 하는 자는 꼴지 되고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내 주고 왼편 뺨 때리면 오른편 뺨도 내밀고, 죽으면 살고, 살면 죽고, 부자 는 화가 있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우는 자는 복이 있고 웃는 자는 화 가 있고, 높은 자는 낮은 자를 섬겨야 하고, 나중된 자 먼저 되고 먼저 된 자 나중되며, 얻고자 하면 잃고 잃으면 얻고, 다 내어주면 가슴 가득 안겨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고, 재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야 하며…. 도대체 이 세상 질서와 정반대인 전부 뒤바뀌는 질서를 받아들일 각오가 없이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바로 이 뒤바뀌는 질 서를 실현하도록 부름 받은 곳이 교회공동체요 제자 공동체이다. 이 공동 체에 들어온 사람은 이 세상 질서도 향유하고 거기에 덧붙여 하늘나라 축 복도 향유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좋은 예는 역시 예수님의 부자 청년과 의 대화이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너 무도 단호한 "네 소유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즉 다 버리 고 나를 따르라" (마16:21)였다.

 3.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인데 현대 교회는 너무 <믿음으로 만>을 강조해버려서 믿는 자는 많은데 세상은 전혀 변화되지 못하고 빛과 소금은 다 어디 갔는지 25% 기독교인이 무색할 정도로 세상은 더욱 암담해 져 간다. 윤리 도덕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세상과 별로 다를 것 없는 모습이 재현된다. 이 세상 질서를 하나님 나라 질서로 바꾸 어가기는커녕, 이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이며 평안이며 물질과 권력을 하나 님의 축복으로 색칠해가며 즐기며 있다. 오히려 목회자가 부추키기도 한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교인들이 한 주간 동안 세상살이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평안을 안고 돌아가는 것은 아주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제자 공동체는 이것이 목적이 아니다. 부수적으로 따라와야 할 것을 주목 적으로 하면 이미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하는 교회가 아닐 뿐더러 예수님의 교훈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지상 명령에 불복하는 것이 된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편하게 하고 위로하게 하려는 인본주의에서 멀지 않다. 주님의 지상 명령대로 25%는 그만두고 5%만이라 도 제자를 삼아 예수님의 교훈을 가르치고 조금만 지켜 행하게만 해도 세 상은 발칵 뒤집힐텐데.

 4.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는-권세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 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그 권세를 우리에게 주 셨지만 그 권세는 세상사람들이 부리는 권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직 그 권세는 제자 삼기 위해 사용해야할 권세이다. 물론 권세를 제어하고 세 상 모든 권세자들의 마음도 제어할 권세도 포함되지만 예수께서 약하심으 로 십자가에 다리신 것과 같이 그 제자들도 약함으로 그 권세를 사용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권세, 섬기는 권세, 종이 되는 권세, 마지막에는 목 숨까지 주는 권세, 사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권세이지, 총회 노회 당회 제직회 등 교회의 조직에서 직분의 높낮이를 행사하는 권세가 아니다.

여기에 대한 가장 적절한 예표는 좌우정승을 요구하는 세베대의 아들들과 그 사실을 알고 서로 눈치를 보다가 선수를 빼앗기자 분노하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 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 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 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6-28).>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권세는 어떤 권세인가 목회자들이 평신도보다 덜하 지 않다면 그 권세는 어디로부터 온 권세인가 기타, 선교의 주제인 <가라>와 교육의 주제인 <가르치라>도 메시지의 주제가 될 수 있음은 물론 항상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모습과 마 태의 독특한 종말사상도 살펴볼 수 있겠다. 16, 17절에서도 메시지는 얼마 든지 나올 수 있다. 예컨대 이방의 갈릴리며 신의 계시의 상징인 산이며, 경배와 의심()의 긴장관계 등을 우리의 상황에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는 핵심 주제가 먼저 다루어진 다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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