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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에 들어가려면 (마 0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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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가장 사랑 받는 이야 기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본문의 내용들은 공관복음에 기록된 유명한 말씀입니 다. 오늘 본문 외에도 막 10:17 이하에, 그리고 눅 18:18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 앞에 법관이요 재산이 많은 부자 청년 하나가 채아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청년은 지위도 높고 품행도 단정해서 많은 사람에게 존 경을 받는 청년이었습니다. 또한 영생을 갈망하는 장래성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지위와 재산이 그로 하여금 만족을 주거나 행복감을 가지 게 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와 어떤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 냐고 묻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청년은 내가 이 모든 계명을 지켰는데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그러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주고 나를 좇으라고 대답해 주셨습 니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가 지고 있는 재물이 아까와서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기 어려워 근심 하며 돌아갔다는 것이 본분의 내용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인생이 요구하는 점이 무엇이며 예수님은 인생의 요 구에 대해 무엇이라고 대답해 주셨는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인생의 첫번째 요구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인생의 요구의 골자입니 다. 쉬운 말로 이말의 뜻을 요약하면 무엇을 하여야 잘 될 수 있습니까 하는 말 씀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질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청년이 "나 는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은 그가 영생의 문제를 행위의 문 제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바리새인과 같이 신앙을 규칙과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에게 대차대조표를 쌓아가듯이 신망을 얻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는 은혜의 종교에 대해서는 분명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이란 율법을 지키는 것, 하나님 앞에서 선행을 쌓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바른 신앙으로 이끄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무엇을 해야 잘 될까 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소원입니다.

학생이 가방을 메고 매일 매일 학교로 달려가는 것도, 장삿꾼이 이리저리 동분서 주 뛰어다니는 이유도, 정치가가 좌충우돌하는 까닭도 무슨 일을 해야 잘 될 것 인가의 요구를 만족케 하려고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 나온 부자 청년도 그 지위와 학식과 재산을 가지고 무엇을 하여야 장 래성이 있고 앞날의 영생을 얻는 좋은 일인가를 알고자 애를 쓰다가 예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문의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현대인들도 누구나 무슨 일을 하여야 잘 될 것인가를 몰라 애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요구는 적은 사람이나 큰 사람이나 그 요구의 질적 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가진 요구입니다.

이와 같은 요구는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요구입니다. 이러한 마 음이 없다면 진보도 향상도 발전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인생의 요구를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이 진실된 인생의 요구를 어떻게 이룰 수가 있는가에 있습니다.

 2. 예수님이 첫번째 대답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 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일을 하여야 장래 가 좋아지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설명하면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이시니 선한 일 즉 좋은 일은 하나님을 위해 하 는 일이면 좋은 일이요, 또한 계명을 지키라 했으니 옳게 바르게만 살면 장래가 좋아질 것이라는 대답입니다. 즉 바르고 옳게 살아가되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 면 인생의 요구가 충족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지금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채아야 할 것은 "그가 행할 선한 일"이 아니라. "그가 믿을 선한 하나님"인 것입니다.

무슨 일이 좋은 일인가 염려하지 맙시다. 직업의 고하가 없고 사업의 귀천 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정신으로 일한다고 하면 어떤 천한 노동 자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높은 지위와 존귀한 자리의 직업을 가 졌다 할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을 기억함이 없다고 하면 그 직업이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대학자였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천막 직 공의 일을 하기도 하였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목공의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떤 일을 막론하고 일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일의 목적이 분명 한가 분명하지 못한가, 그 일이 무엇을 위한 일인가에 따라 일의 선악이 판별되 는 것입니다. 행위보다 그 동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을 했느냐라는 질문보 다 어떻게 했느냐라는 물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과보다 동기에 더 커다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만 일합시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곳에 인생의 요구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3. 인생의 두번째 요구 계명을 지키라는 예수님께 대하여 청년은 내가 계명을 다 지키었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나는 결함이 없다. 나는 잘했으니 나를 착하다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 인생의 두번째 요구입니다.

물론 이 청년이 외형적으로는 인간 앞에 흠잡을 만한 특별한 것이 없었을 것 입니다마는 선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이와 같은 주장은 망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를 사는 우리도 이 청년의 두번째 요구를 주장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듯이 사람은 누구나 자기 본위의 생활 속에서 자 기 정당화를 주장하면서 살아갑니다. 네것도 내것이요 내것도 내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잘못은 네게만 있고 내게는 없다, 잘한 것은 네 것이 될 수 없고 내 것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극도로 발달된 개인주의 사상의 결과입니다. 그러 다보니 잘하면 내 공로,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줄 압니다.

더 나아가서 잘못된 것의 책임을 하나님에게까지 돌리니 더 안타깝기만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의 잘못을 물으셨을 때 아담이 대 답한 말을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한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 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한 여자", 하나님께서 내게 여자를 허락하셨기에 결 국 죄를 범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무엇이 부족합니까"하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화합이 있을 수 없고 단체성이 유지 될 수 없습니다. 제 부족을 모르고 제 주장만 옳다 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를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인간 앞에서 계명을 지켰다 한들 선하신 하나님 앞에까지 부족이 없 다고 자랑할 수 없고, 뽐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족을 모르는 청년에 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4. 예수님의 두번째 대답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것이 청년의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전혀 결점이 없는 청년이지마는 이 쳬년에게는 중대한 결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청년이 하나님보다는 재물을 더 의지했다는 것입니 다. 이 때문에 청년은 영적인 생명에 대해 갈급함을 느껴야만 했던 것입니다.

청년은 몰랐지만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 고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영생이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영원이란 말의 원어는 아이오니 오스 ( )인데, 이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하나님께 합당한 것, 혹은 하나님께 속한 것, 또는 하나님의 특성이란 뜻입 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본성은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본질은 주의 깊게 계명과 규칙과 규례를 헤아려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 에 대한 사랑의 태도와 희생적인 관용성입니다.

율법의 중심은 하나입니다. 청년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했지만 율법의 정신 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생할은 하지 못했습니다. 형식적인 율법 생활을 통 해서 영생의 기쁨을 체험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찬송가 204장의 작시자는 Fanny J. Crosby라고하는 9,000편 이상의 찬송시를 작시한 여자 맹인입니다. 그의 육체적인 불행은 그에게 세상을 의지하며 기대하 고 사는 일을 단념하게 하고 그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도록 했습니다. 그는 찬송가 240장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라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204장을 함께 부르시겠습니 다.

영생과 기쁨은 예수를 우리 생의 주로 고백하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날 때에 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 고 하는 인생의 진실된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 다.

1st. 계명을 지키며 살아라.

2nd. 계명을 지키되 계명의 정신을 나타내며 살아라.

3rd. 자기중심적으로 살면서 자기 정당화를 하지 말아라.

4th.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며 그만 의지하고 살아라.

청년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진실된 요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정확한 대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심한 괴로움을 안고 돌아 서고 말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부자였기 때문입 니다. 그의 비극은 그가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제물을 더 사랑한 것이었고, 남을 사랑하기 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보다 재물을 더 앞세우는 자와 이웃보다 자기를 더 앞세우는 자는 필연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등을 돌려 대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영생보다 재물을 더 중하게 여겼기 에 예수님을 좇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가 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하는 인 생의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마지막 대답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 여 부요한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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