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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병거 (슥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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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학자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아홉 가지의 환상을 보여 주신 중에 여덟 번째인 네 병거에 대해서 이것이 과연 환상인가 하는 질문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보여주신 환상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1.네 병거의 출현
“네 병거가 두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산이더라”(슥6:1)
두 산이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말합니다.
저 멀리 예루살렘에서 요단강 쪽으로 보면 크게 병풍처럼 서 있는 산맥이 있는데 그것이 모리아산이고 예루살렘 근처에 감람산이 있는데 모리아산과 감람산 사이에 여호사밧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 가까이에 성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가 있는 그 곳, 그 산 사이에서 네병거가 말과 더불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 이름은 놋산이라고 했습니다.
놋이란 오늘날에 와서는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만 그 시대에는 금이나 은보다도 더한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놋산이란 하나님의 교회를 놋산처럼 보호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병거의 숫자가 넷이라고 하는 것은 사방을 의미하며 그것은 보편성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방향으로 심판을 내리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정된 어느 한 곳 뿐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시는 것을 네 병거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 병거를 각색의 말들이 메고 옵니다.
이 말들의 색깔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붉은 색은 피를 상징합니다.
피는 곧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 대학살을 예고합니다.
검은 색은 슬픔의 상징이요, 죽음의 상징입니다.
흰색은 승리의 상징이며 어룽진 말은 혼합된 심판을 의미합니다.

2.대리 사역자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슥6:5)
네 병거는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을 땅 위에서 행사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사역 자들입니다.
네 바람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퍼져 나가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네 병거란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 위한 것으로 온 세상에 흩어져 나감으로 심판을 합니다.
병거들은 어디로 흩어집니까.
6절을 보니 특별히 북쪽으로 두 마리의 말이 달려갑니다.
북편 땅이란 다시 말해서 바벨론 땅의 심판을 말하는데 바벨론의 죄가 어느 지역보다는 흑심하기 때문에 두 병거가 즉 흑마와 백마가 달려갑니다.
남편 땅으로 나가는 어룽진 말은 애굽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건장한 말이란 붉은 말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붉은 말이 두루 다니는 것은 동서남북 사방을 가리지 않고 죄가 있는 곳은 닥치는 대로 가서 심판을 하시는 모습입니다.

3.심판의 결과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느니라 하더라”(슥6:8)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따라 갚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한 것, 하나님의 뜻을 지나 버린 것입니다.
올림픽 경기를 할 때 보면 권총이나 활을 과녁을 향해서 쏘는 경기가 있습니다.
과녁을 향해서 날아가던 화살이나 총알이 힘이 모자라 과녁에 미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힘은 남는데 그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옆으로 비켜서 지나가는 것, 그것 역시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있는데 그 뜻에 미치지 못하거나 비껴 가는 경우, 그것이 죄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니라” 했는데 항상 기뻐했습니까. 우리에게는 기쁨보다는 원망이 더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적질하는 것은 죄인 줄 알면서 하나님에 뜻에 미치지 못한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못합니다.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하셨습니다.
땅끝이란 공간적인 의미의 땅끝이 아닙니다.
여기서 땅끝이란 인간의 모든 계층, 모든 심선이 포함됩니다.
부자든 가난뱅이든 혹은 소의 계층, 문둥병 자들까지도 하나님 앞에는 땅끝이 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미치지 못함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시킨 죄보다 더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시킨 죄, 간음한 죄, 도적질한 죄는 하나님의 뜻에 비껴 간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하고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죄인들을 심판하시는데 지체하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동서남북 사방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십니다.
에바속에 갇혀진 여인처럼 그 죄가 가득 채워지면 하나님은 지체없이 병거들을 보내어 치리를 하시고 심판하십니다.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심판을 하시고 북방에서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고 하십니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을 그렇게도 괴롭히다가 망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이 시원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망하는 것을 보고 시원하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가 망하는 것을 보고 시원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악마가 마하고 사탄이 망해야지 사람이 망하면 안됩니다.
그러려면 성도는 사탄의 잡힌 바에서 해방을 받아야 됩니다.
사탄과는 더이상 동업을 하면 안됩니다.
악마의 동업을 하는 한 우리는 사탄과 함께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질부터 하루 속히 떠나야 됩니다.
죄는 그대로 둔 채, 욕심은 그대로 둔 채,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몸부림쳐야 자신의 기분은 하나님 앞으로 나갔는지 모르나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위대한 신학자요 경건한 모양의 대표자 되는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에 ‘거룩하신 하나님’ 이라고 부르기를 무척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부르게 되면 자기는 한없이 끝으로 떨어지는 더러운 죄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건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어떻게 서겠습니까. 회사를 하나 설립한 사람 앞에서도 회사원이 절절 매는 법인데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시고 내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야 어떻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해 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시어서 자녀로 삼으시고 불러 주셨지만 우리는 늘 앞에서 경외 심을 가져야 됩니다.
이 경외 심을 종교성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 심을 갖습니다.
늘 두려운 심성을 가져야 됩니다.
자식도 아버지를 존경하면 할수록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합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철이 들고 성숙하면 할수록 부모 앞에서 조심을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죄와 상관없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 움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또한 주 안에서 죄가 사라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시원해진 것처럼 우리에게서도 죄가 사라짐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시원케 여기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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