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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자유 (갈 0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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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것은 우리가 조금 착해지 고 개조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소유가 좀 늘어 나는 것, 그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 가 예수 믿을 때,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습니 다. 내 죄는 십자가 위에서 처단되 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를 용서해주십니다. 용서해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서 죄를 십자가에서 처단했기 때문 에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십니다. 또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 믿 음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이것이 예수 믿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 지라면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하 나님께 속한 빛나는 아름다운 것들 이 다 내 것이 됩니다. 우리의 생애 가 끝난 다음, 우리들은 이 영광의 땅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빛나는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서 마련하신 엄청난 축복들을 영원 토록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 속들 중에 가장 빛나는 상속이 있다 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형상이 내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 니다. 자식이라면 아버지의 집 얻는 것 보다, 아버지의 패물을 갖는 것 보다, 아버지의 재산을 갖는 것 보 다 더 큰 상속이 아버지의 유전인자 를 그대로 물려받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상속자로 우리를 부르셨습니 다. 그래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 상이 날마다 이루어지고 우리가 천 국에서 눈 뜰 때, 완전하게 그의 형 상으로 변화되어 있는 영광을 경험 하고 놀랄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신분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 르신 주께서는 이제 너희들이 하나 님의 자녀 되었으니까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 된다고 갈라디아서 5 장, 6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누릴 가 장 첫 번째 삶의 모습은 '자유'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읽 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 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 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들은 하 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 가운데 두 종류의 자녀가 아브라함에게 있었습 니다. 한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 땅에 온 이삭입니다. 그러나 한 자녀는 사람이 노력해서 만든 이스 마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노력으로 애쓰고 수고해서 만든 이 스마엘을 그 집에서 쫓아내라고 말 씀합니다. 그리고 "너의 모습 중 어 디에도 종의 형태는 갖지 않았으니 까, 온전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서 자유를 누려라." 이것이 기 독교인의 자유입니다. 그렇기 때문 에 대통령도 내 주인 아닙니다. 세 상의 누구도 내 주인 될 수 없습니 다. 내 상사가 내 주인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으 면 형제, 자매로 만나면서 이 자유 를 누립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너희들이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렇습니다. 아들은 자유 를 누립니다.

우리 집에 같이 있을 수 있는 세 종 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손님입니다. 우리가 그 손님을 환대 합니다. 음식도 대접하고 잠자리도 마련해줍니다. 그렇지만 손님은 자 유롭게 냉장고 문을 못엽니다. 우리 집에 들어오면 자유가 없습니다. 규 칙 속에 삽니다. 또 다른 한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없는 일 이지만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같이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에 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규칙 속에 매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부하러 갔다 돌아온 아들은 오자마자 혼자 난장판을 피웁니다. 신발을 제 마음 대로 내던지고, 들어오고 나가는 것 도 제 마음대로이고 그리고 냉장고 문 여는 것도 제 마음대로 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스탈린 같은 독재자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고 그의 권위에 매여 서 숨도 제대로 못쉽니다. 그런데 스탈린 딸은 그 앞에서 해롱거리며 아빠 손잡고 마음대로 자유를 누리 더라구요.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하나님의 자 녀로 엄청난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 므로 다시 하지 말아야될 것 있습니 다. 종의 멍에를 매면 안됩니다. 우 리들이 과거에는 죄의 종노릇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죄가 시키는 대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던 우 리에게서 그 죄의 사슬을 풀어주셨 습니다. 그리고 죄로 규정하는 율법 의 그 얽매임에서 풀어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그 죄로 정하는 율법이 다시는 나와 상 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주의자들은 이렇 게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모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래도 조금은 해 야되지 않느냐 율법을 행해야 된 다.' 아니, 율법 범죄함을 정죄하는 것을 모두 없애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사도 바 울이 성경적으로 율법을 없애버린 자유를 이야기하자 '그러면 그렇다, 네 말이 맞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 만은 지켜야될 것 아닌가 아브라함 에게 주신 약속, 할례는 지켜야한 다.' 그렇게 꼬이는 사람들이 있었 습니다. 이 할례는 특별히 이스라엘 본토 사람들에게는 손쉬운 것이었습 니다. 왜냐하면 난 지 8일만에 할례 를 받기 때문에 아픈 것도 모를 적 에 할례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방 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경우, 외 과적인 수술인 할례하는 것이 고통 스러워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 피했습니다. 그런고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 리가 받는 구원과 너희의 구원은 다 르다'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이 할례를 통해서 구원이 왔다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할례는 우리 구원의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네가 할례 하나만 받은 것 그것을 자랑하는가 아니다, 원래 율법을 지키려면 모든 율법을 다 지 켜야 한다. 할례 하나만 아니라. 너 희들이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한다면 너희들은 그리스도에게 서 끊어진자로다. 주께서 나를 위해 서 행해주신 그 일을 모독한 자이고 주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자라"고 지 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령 안 에서 믿음으로 좇아 우리 주님께서 이미 이루신 것을 누리고 살고 소망 하고 삽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삶 의 내용은 사랑으로 좇아 믿음으로 봉사하고 믿음으로 수고하는 것이 지, 수고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가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그 사랑 때문에 나도 모르 게 봉사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율법주의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 은 누룩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것 하나만 딱 지키라고 해놓고 사실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 하나가 반죽에 붙으면 그대로 있지 않고 계속 부풀어져 반죽을 커 다랗게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적은 율법 하 나만 지키라는 말에 속지 말아라.

그것은 결국 다시 율법으로 우리를 얽매이게 하는 것이라. 야, 너희들 이 할례 받은 것 자랑하느냐 아예 거세해라."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 그러면서 우리에게 놀라운 자유를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2절에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 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사 도 바울이 또 말합니다. "아들이 너 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 유하리라."(요8:36) 예수께서 십자 가에서 완성하심으로 우리에게 완전 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나는 자유자 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도 내가 인 생을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다. 루 즈벨트 대통령이 인간의 자유를 선 포할 때 집회 결사의 자유, 주거 이 전의 자유, 종교와 생각의 자유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보다 더 엄청난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죄와 그 죄를 규정하는 모든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 니다.

그러면 이 자유는 어떤 자유인가요 그러면 자유했기 때문에 내가 마음 대로 내 인생을 살아도 된다는 말인 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13절부터 15절까지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 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 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 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 하라" 첫 번째 그리스도인들의 자유 는 자기 욕심껏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않는 자유입니다. 우리들은 자유를 마음대로 방종하는 것이라고 착각합 니다. 이 육체라는 말은 타락한 본 성의 충동에 따라 살지 말라는 말입 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자유가 있습 니다. 어떤 자유가 있습니까 탕자 의 비유에서 보면 탕자는 아버지께 졸라서 자기 재산을 갖고 아버지 집 을 나가는 자유를 누리고 살았습니 다. 우리들은 이것을 자유라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자유는 이런 소모적인 자유, 소극적인 자 유, 도피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 리스도인의 자유는 적극적입니다.

탕자가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탕진 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아 버지 떠난 그 삶은 절망이었고 저주 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결심합니 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 었다. 다시는 내가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집에 그 품군으로라도 써달라고 해 야겠다.' 그리고 그는 돌이켰습니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 에게 집을 나가는 자유도 자유이지 만 돌이켜서 아버지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자유입니다. 탕자는 집에 돌아 갑니다. 맨발로 누더기를 걸쳐 입고 아버지 집에 갑니다. 그 세월과 그 고생이 그 얼굴을 바꾸어 놓았습니 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누더기 입은 그 사람이 이 집 아들인줄 몰 랐습니다. 사랑의 아버지는 저 동구 밖에 그 아들이 나타나자 상거가 먼 데, 아직 거리가 많이 먼데 알아봅 니다. 대개 나이가 들면 눈이 나빠 집니다. 그런데 나이도 뛰어넘어서 그 아버지는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 고 뛰어 달려갑니다. 뛰어 달려가는 이 노인의 발이 사랑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덥석 껴안습니다.

껴안은 그 가슴이 사랑입니다. 더러 워질 때로 더러워진 그 목에 입을 맞춥니다. 맞추는 그 입이 사랑입니 다. 온통 사랑입니다. 여러분, 탕자 가 외롭게 집을 나가는 것이 자유라 면 그처럼 풍성한 아버지의 사랑의 품 속에 뛰어드는 것도 자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주 밖으로 하나님 으로부터 멀리 도망나가서 외롭게 발을 떠는 것도 자유라면, 내가 내 잘못을 깨닫고 우리 주님 앞에 돌아 서서 주님의 품 속에 뛰어드는 것도 자유입니다. 적극적인 자유입니다.

긍정적인 자유입니다. 생명의 자유 입니다. 풍요를 향한 자유입니다.

우리들은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자 유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품 속에 뛰어드는 자유, 아버지와 함께 영원 을 기뻐하는 자유, 아버지를 즐기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마다 자유를 누려야 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즐기는 자유예요.

자식은 부모를 즐깁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여기 예배하러 올 때, 주 일날 예배 안드리면 벌받은 것 같아 오셨다면 안오셔도 됩니다. 그러나 내가 내 아버지 집에 들어오는 복된 순간, 내 모든 소원을 아버지에게 드리고 찬양함으로 우리 아버지를 만나고 기뻐하는 예배라면 바른 예 배입니다. 이 영광이 우리 것입니 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입니다.

 그런가하면 자유의 두 번 째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자유입니 다. 내가 자유인이니까 내 것을 먼 저 선점하지 않습니다. 내 것을 주 장하지 않습니다. 섬기는 자유입니 다. 섬기는 것이 힘든 일입니다. 그 런데 이 섬김이 기쁨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종 노릇 하는 것, 어떻게 보면 남편은 아내의 종입니다. 직장 에서 화나고 분이 차올라와 사표 내 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마누 라 생각이 납니다. 그러면 사표를 다시 구겨놓고 상사의 명령 앞에 조 용히 머리를 숙입니다. 종처럼 그렇 습니다. 과거 같으면 그래도 월급봉 투라도 한 달에 한번 가져다주면서 "내가 벌어온 것 받아" 하며 목에 힘 줄수 있는데, 요즘은 온라인으로 들어가서 완전히 명세가 다 드러납 니다. 세상에 그런 종이 어디있어 요 IMF, 그 어려운 시절에 남편들 이 아내들의 종입니다. 또 우리 박 영덕 목사는 설거지까지 같이 한답 니다. 제 아내가 늘 그 설교테이프 를 들어보라고 합니다. 우리 박목사 님은 아내가 좋아서 어떻게 사랑할 까 하다가 설거지를 시작했는데 지 금까지 '퐁퐁' 쓰는 것이 퐁퐁 재미 있다나요 사랑하면 가능합니다.

그런가하면 남편들이여, 아내들 편 도 좀 들어주십시오. 똑같이 공부하 고, 못생기기나 했어요 그런데 남 편을 위해서 빨래 비누처럼 생애가 닳아지고 있쟎아요 억울하지 않아 요 잠자다가 "물 떠와" 그러면 영 원전부터 물 떠올 여자처럼 물 떠와 요. "자기 발로 가서 마시고 와!"하 고 악 한번 꽥 지르면 될 것을. 종 아니고 뭡니까 사랑하기에 종노릇 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억지가 아니 라 기쁨이 있습니다. 부모라는 이름 의 죄가 있어요. 자식들에게 꼼짝 못하는 부모라는 죄, 왜 그렇습니 까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이 사랑 으로 종노릇해야되는 자유입니다.

저는 우리 남서울은혜교회가 대한민 국에서 이것 하나만 바로 선다면 교 회를 바꾸고 이 사회를 바꿀 줄로 믿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이 섬기 는 직분이고 종노릇하는 직분인줄 알고 실천한다면 한국 교회에 혁명 이 일어날 것입니다. 평신도 보다 집사가 더 높고, 집사 보다 권사가 더 높고, 권사 보다 장로가 높고, 장로 보다 목사가 더 높고 목사 보 다 당회장이 더 높고... 아닙니다.

거꾸로예요. 주께서 말씀했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 어야 하리라." 우리 나라 말에는 장 관입니다. 그런데 영어로는 Minister예요. Minister라는 말은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장 관은 우리 개념이예요. 저들이 성경 을 먼저 읽었기 때문에 그들의 개념 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클린턴 욕 해도 괜찮쟎아요 집사라는 단어는 하인이라는 말이예요. 심부름꾼이라 는 말이예요. 장로는 상머슴이라는 말입니다. 제일 앞서가서 섬기는 사 람, 목사는 Minister라고 합니다.

섬기는 자예요. 교회의 기반이 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사도 바울은..." 그랬는데, 이 종은 노예라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 안 에서 노예 되었다. 너희들에게 노예 가 되었다.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 는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종님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종은 님 자 붙여서는 안됩니다. 종은 놈자 붙여야 됩니다. 제가 어떤 교회를 보고 속이 뒤틀려 가지고 이래서 안 되는데 싶었습니다. 목사가 나가니 까 양쪽에 줄을 쭉 서서 꼭 마피아 두목 섬기듯이 인사를 합니다. 이것 은 교회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 나 라가 아닙니다. 사탄의 나라입니다.

어떤 목사가 자기 교회가 최고로 좋 은 교회라고 합니다. 왜 좋으냐고 물으니까 교인 400-500명 밖에 안되 는데 목사님 안전해야된다고 해서 BMW를 사주더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6개월 후에 그것 보다 더 안전한 차 가 있다고 벤츠를 사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교회가 최고 좋은 교 회라고 합니다. 좋은 교회 아닙니 다. 하나님의 교회와 모습이 다른 교회입니다. 이재록은 하나님의 교 회와 정반대편에 서 있는 교회의 모 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런데 한국 교회가 그 모습으로 나아 갑니다. 우리 교회가 이것을 진정으 로 우려하여 우리부터 바꾼다면 교 회 안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할 것으로 믿습니다.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모든 장로님 들이 여러분들을 안내했습니다. 저 는 그래야 된다고 믿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500여 가정들이 일일 싼타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필 요한 곳곳마다 나갔던 것, 하나님 기뻐하실 일입니다. 가보신 분들은 얼마나 즐거웠어요 1999년, 천년 때 마지막을 보내면서 우리의 적은 선물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요 이것이 사랑의 종노릇 하는 모습입니다. 제가 북한 영화 '성황당'이라는 영화 보니까 목사가 못된 놈이더라구요. 제가 그 목사입 니다. 정말로 형제의 발을 씻겨주는 섬기는 자, 그것이 교회의 지도력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주께서 주시는 자유로 종노릇하는 새로운 사랑의 종, 이 일 때문에 마더 테레사는 캘 커타에서 생애를 보냈습니다. 슈바 이처는 아프리카에 가서 생애를 불 살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입니다. 그러면 자유 니까, 율법과 상관없단 말인가 무 율법(無律法)가 반율법(反律法)인 가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습 니다.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 나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 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면 그 다음 에 하나님을 향한 모든 계명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1계명부터 4계명까 지 다 이루었습니다. 그것 뿐만 아 니라 "네 이웃을 사랑하면..." 5계 명부터 10계명까지 그 안에 다 포함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반율법주 의자나 무율법주의자가 아니라 하나 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모든 율법을 완성합니다. 이것이 그 리스도인에게 주신 자유의 특권입니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 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를 얽매어 놓 은 모든 죄와 그리고 그것을 죄로 규정하는 규범인 율법으로부터 그리 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 습니다. 이 자유는 악에게 지지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 기는 자유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그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는데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이런 적극 적이고 능동적이고 온전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2000년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엄청난 상속 가운데 아버지 하나 님의 형상을 우리 속에 날마다 이루 어가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이 자유를 이 땅에 서 누리고 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 러낼 도구로 사용될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가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 충만히 임하기를 주 예수 그리 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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