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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도 영원한 기념이 될 수 있다 (계 0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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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연합 팀스피리트 훈련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육.해.공군과 해병대, 그리고 방위가 참가했습니다.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미국군과 한국군이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미군 한 명이 먼저 인사를 했습니다. "아임 어메리칸 솔져"그러자 한국군이 차례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아임 코리언 아미" "아임 코리언 네이비" "아임 코리언 에어포스" 그리고 해병대는 "아임 코리언 베스트 머린"이라고 위세있게 인사했습니다.이제 마지막으로 방위가 인사할 차례가 돌아오자 한참을 머뭇거리던 방위가 힘차게 입을 열었습니다."아임 코리언, 아르바이트 솔져" 1924년 제 8회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영국의 에릭 리들은 100m 경기의 금메달 유망주였습니다. 그러나 경기 일정이 주일 오후로 잡히자 즉시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한 결정을 내렸습니다.이 소식을 들은 영국 국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며 그를 가리켜 "조국을 배반한 위선자".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체 출전을 포기하고 그날을 평소처럼 교회에서 예배하고, 봉사하며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에릭의 이러한 결정은 주일 성수를 위한 자기 희생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어려움 속에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몇일 뒤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닌 400m경기에 출전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부터 끝까지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마다 "저렇게 달리다가는 도중에 쓰러져 죽을 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습니다.그러나 그는 예상치 못했던 세계 신기록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것입니다.에릭 리들은 우승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처음 200m는 내힘으로 뛰었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뛸 수 있었습니다."이처럼 그는 운동선수로서도 분명한 신앙관을 가지고 행동하므로 영원한 기념비적 인물이 된 것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는 어떤 할머니 집사님 한 분이 우리 지구촌선교센터 건축을 위한 교회 사랑운동에 2천만원짜리 통장을 맡기셨습니다. 그분은 이 돈을 평생동안 모은 것인데, 자기가 죽으면 자식들이 장례치루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준비해놓은 돈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감격스럽든지요!이런 피땀 섞인 돈을 교회에 맡기셨으니 우리 주님이 너무나 고귀하게 기념해주실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우리 주님은 당신의 작은 헌신에도 얼마나 고귀한 평가와 높은 가치부여를 해주시는지요!성경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성도들의 아름다운 헌신에 대한 기념 스토리입니다.저는 성경을 읽어볼수록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헌신은 너무나 부가가치가 높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당신의 평범한 헌신이 정말 부가가치가 아주 높은 고급한 인생으로 축복해주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당신도 영원한 기념이 되는 값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1. 주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버가모 교회입니다.에베소를 아시아의 뉴욕이라고 한다면, 버가모는 아시아의 워싱턴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즉 버가모라는 도시는 아시아의 수도로서, 정치적 이유로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사탄의 총 본부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을 보면, "너희가 사는 곳은 사단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 설명합니다.즉 버가모시에는 로마 황제숭배를 위한 커다란 신전이 지어져 있었고, 그리고 버가모시는 강력한 이교도 신봉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특히 제우스 신과, 소위 치료의 뱀신인 Asclepius를 섬기는 총본부였습니다.이처럼 버가모는 사탄의 영향력이 가장 심각한 도시였고,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가 정말 어려운 영적 전쟁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은 참 훌륭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겼습니다.그 당시 로마 시민은 일년에 한번씩 황제 신전에 가서 시이저에게 분향을 하고, "시이저는 주시다"라고 고백해야 했습니다.그런데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시이저보다 예수님을 더 존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만을 최대한 높이는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있나요 오늘 우리는 이 불신앙의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의 입술로, 또 우리의 삶으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얼마나 높게 받들고 계시나요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축복받은 이유를 든다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주 존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을 향하여 뭐라고 큰 소리로 외쳤던가요"저 할례도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이 누구길래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삼상 17:26)"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5절)그렇습니다.우리 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를 고상하게 높여주십니다(삼상 2:30).『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 그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야 합니다(출 20:7).우리 주님의 거룩하고 존엄하신 이름을 허탄하게, 무익하게, 경거망동하게 불러서는 안됩니다.로마 시대에 기독교를 극심하게 박해하던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붙잡혀 온 기독교인 앞에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조롱했습니다."도대체 너의 주, 목수 나사렛 예수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 자냐"황제 앞에 서 있던 이 용감한 신자는 주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이렇게 응수했습니다."폐하여! 나사렛 예수님은 그의 하늘나라의 목공실에서 당신의 관을 만들고 계십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말하던 그 황제는 최후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우리는 어떤 자리,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는 고급한 신자가 되십시다!『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

2. 신앙의 의리를 지키자 버가모 교회는 참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이미 위대한 순교자를 가졌던 것입니다. 안디바입니다.주님은 그를 너무나 고귀하게 칭찬하십니다.【내 충성된 순교자 안디바는 사단의 본부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도다】그는 틀림없이 황제 숭배를 강요받았을 것입니다. 신앙을 부인하라는 압력을 받았던 것입니다.그런데도 그는 죽음을 불사하면서 신앙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여기 "증인"이라는 말은 『순교자(Martus = martyr』라는 뜻이기도 합니다(계 17:6)버가모 교회의 성도 안디바는 비참하게 죽어가면서도 그의 믿음을 지켰던 것입니다.신앙의 의리를 지킨 위대한 순교자 안디바! 사실 안디바라는 이름은 "모든 악을 대항한다. 모든 어려움을 대항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사탄을 대항하여 싸웠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21세기는 새로운 영적 전쟁의 시대입니다.오늘 이 시대는 기독교 초기보다 더 위협적이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순교를 원하기 때문입니다.어떤 의미에서 한번에 죽는 순교보다, 살아있는 순교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수도 있어요.즉 순교에는 일시적인 순교가 있고, 계속되는 순교가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고난을 받고 죽음으로써 순교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신앙으로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우리는 지난 주일 저녁에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 신앙을 감동적으로 들었습니다.오늘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순교신앙이 필요합니다."그리스도인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밤낮 가릴 것 없이 어디서나 순교자"라고 말합니다(Clement).오리게네스도 비슷하게 정의합니다. "말과 행위로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은 순교자라 불릴 수 있다."그렇습니다.기독교는 산 그대로 자신을 드리는 종교입니다.예수님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적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마16:24,25)"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런 신임과 칭찬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내 충성된 순교자 0 0 0는 사단의 본부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도다"

3. 말씀의 절대 기준으로 타협하지 말자이제 버가모 교회에 우렁차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십시다. 12절입니다.『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엡 6:17).우리 예수님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오직 말씀을 절대기준으로 하여 흑백, 좌우, 진위, 옳고 그름, 참과 거짓, 진짜와 가짜를 명확하게구별하신다는 뜻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절대 기준으로 삼아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 하고도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우리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합니다.그래서 성경을 Canon(법규, 표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원래는 "잣대"라는 말입니다.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 표준(Criterion)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는 약간의 잘못이 있었습니다. 여기 "두어 가지(oliga)"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아주 작은 소량, 소수를 뜻합니다. 즉 버가모 교회는 약간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그것은 곧 세상 풍습과 타협하는 것이었습니다.다시 말해 자기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우상숭배의 자리에 가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허용해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내용과 상반되게 행동한 것입니다(행 15:20. 고전 10:21).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과 싸울 때 발람의 유혹에 타협한 것과 비슷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민 22-25장).그 때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발람의 교훈에 타협하여 우상을 섬기므로 24,000명이나 죽었습니다.한 마디로 작은 타협이 큰 손실을 가져온다는 점을 주지시켜줍니다.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절대 기준으로 삼아 결코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우리가 이 세상의 풍습과 타협하는 그 이면에는 매우 합리적인 변명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남들도 다 하는데 뭐! 나만 유별나게 행동할 필요가 있나 이 정도야 괜찮지. 이번 한 번 뿐인데, 어쩌다가 한 두 번 하는 것인데 뭐, 별일 없을거야…"그런데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다가, 나중에는 무감각하게 되고 맙니다.세익스피어는 그의 책「베니스의 상인」에서 "악마도 의젓하게 성경을 인용하면서 자기 목적을 성취 할 줄 안다"고 지적해 줍니다.

다윗은 이런 뼈아픈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으로서 생동적인 교훈을 줍니다(시 1:1)."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오늘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타협하지 않는 절대 표준의 신앙자세가 필요합니다.기독교 초기의 교부 Athanasius는 이런 절대적 신앙관을 가지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온 세상이 나를 반대하는가 나도 온 세상을 반대하노라"독일의 악명 높은 아돌프 히틀러 마저도 기독교의 비타협적인 신앙을 이렇게 높이 평가합니다."기독교의 위대성은 그것이 그것과 비슷한 역사 상의 철학적인 견해와 타협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가르침만 철저히 따랐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코 타협하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주님은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수 1:7).그렇습니다.절대적인 신앙을 가질수록 절대적으로 안전합니다.우리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질수록 오히려 더욱 형통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 성도들에게 두 가지 놀라운 축복을 약속해 주십니다(17절).1)더 좋은 하늘의 양식으로 만족함을 누리리라 여기 "감추어 놓은 만나"라는 뜻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하늘의 양식을 뜻합니다(출 16:1

5. 시 78:25).

이 땅에서의 제사 잔치에 참여하여 잠시 배부른 것보다, 하늘의 신령한 양식으로 참 만족을 누리는 축복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타협하지 않는 고고한 신앙인에게 더 좋은 참 만족을 누리게 하십니다.

2)영광스런 승리자가 되는 새 신분을 얻으리라 여기 흰 돌은 승리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로마 법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즉 법관이 유죄 판결을 내리는 자에게는 검은 돌을 던지고, 무죄 판결자에게는 흰돌을 던집니다.

특히 성경에서 흰색은 하늘의 색, 순결과 승리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는 승리한 성도들이 흰옷을 입을 것이며(3:

5. 19:8-14), 흰 보좌에 앉을 것을 예고해줍니다(20:11).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존귀하게 여기며, 믿음의 의리를 굳게 지켜, 결코 타협하지 않는 절대 신앙의 사람이 되기만 하면, 우리는 모두 다 영원히 기념이 되는 영광스런 승리자의 대열에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찬란한 장면으로 보여줌으로 막을 내립니다(17절)."그 흰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해주리라"승리자의 새 신분과 새 지위를 뜻합니다. 즉 기념비적 새 지위를 얻는 복된 승리자다 되는 것입니다.우리 모두 다 영원히 기념이 되는 승리자의 대열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초청) (찬 387장) 사랑하는 여러분,당신도 영원히 기념이 되는 고급한 인생이 되고 싶지 않으세요주님의 이름을 최대한 높일수록 당신은 존귀한 자로 부상하게 될 것입니다.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높이는 저 시골 목동 다윗을 예루살렘 왕의 신분으로 존귀하게 높여 주셨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얼마나 믿음의 의리를 잘 지켜온 것 같습니까살아있는 순교자의 대열에 서고 싶지 않으세요그래서 당신은 그 어떤 유혹과 현혹의 현실 앞에서도 결코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비타협의 신자가 될 때당신은 하늘 나라의 화려한 잔치에 들어가는 기념비적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오, 주님!우리 모두 그 손에는 새 이름이 새겨진 흰돌을 쥐고, 몸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흰옷을 입고, 그리고 어린양 예수님의 흰 보좌 앞에 우뚝 서는 영광스런 승리자의 대열을 향해 늠름하게 걸어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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