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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 중에 승리한 서머나 교회 (계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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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들에게 고난의 때가 찾아오면 보통 두 종류의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왜 내 삶 속에서 이런 고난을 주실까라는 데서부터 출발해서, 아마도 하나님은 안 계신 모양이다 혹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해도 나의 고난을 그 냥 바라보시기만 하는 것을 보니 전능하신 분은 아닌 것 같다 라는 잘못된 결론에 이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는 책 가운데 유태 랍비인 헤롤드 쿠쉬너가 쓴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인간의 고난의 의미를 추적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책이라고 할 수 있 는데, 악(惡)의 문제를 추적하다가 그만 잘못된 결론에 이 르고 맙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기는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고통과 악 에 대해서 어쩔 수 없어하시는 그분을 너무 원망하지 말고, 그분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이 가지 고 있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대단히 비기독교적 이고 비생산적인 결론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이 사랑의 신(神)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고난과 아픔을 해결하실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는 판단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이런 식으로 고난 앞에서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련을 당할 때 이것은 내가 더욱 하나님을 의 지할 수 있도록 주께서 주시는 시련이지 하면서 하나님께 더 기도하고 더 찬양하고 또 말씀 앞에 자신을 더 비추어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잘 통과하고 승리하는 것이 하나 님께 선택받은 증거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대 그리 스도인들이 쓴 문서들을 보면 그런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선택 의 교리는 매우 어려운 교리인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문제와 연관해서 단순하게 이 교리에 접근했습니다. 고난이 올 때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이 참으로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생각,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의지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중에 「성도의 견인(堅忍)」이 라는 교리가 있는데, 한번 구원받은 사람들은 일시적인 타락은 있을 수 있어도 결코 주님에게서 영원히 떨어지는 법은 없다는 내용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 리를지키신다는 이러한 믿음 때문에 어떤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 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모두 터키에 있습니다. 제가 전에 터키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그리 스도인 한 분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베냐민 칸테미루라는 50세 가량 된 형제였는데, 그는 의사로서 회교 권에서 예수를 믿게 된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회교권에서는 예수를 믿게 되면 사회적인 출세의 길이 다 막혀 버립니다. 의사는 의료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냐 민 칸테미루라는 분은 의사를 그만두고 영어를 번역해서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른 모든 고통은 견딜 수 가 있는데, 자기 부인이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회교를 믿는 부인이 기독교를 믿는 남편 과 살 수 없다고 자꾸 이혼하자고 한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혼을 할 수는 없고 또 회교도인 부인과 같이 지내자니 갈등 이 더 심해지고… 이렇게 되자 신앙에 회의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 분은 아 무래도 하나님은 나를 포기한 모양입니다. 예수를 믿은 이래로 끊임없이 내게 고통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나를 사 랑하시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터키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이런 신앙의 회의와 더불어 싸우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대체로 두 가지로 찾아오는데, 하나는 우리들의 잘못 때문에 오는 고난으로서 징계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잘못과 상관없이 당하는 어려움으로서 연단이라는 것입니다. 연단은 하나님이 우리를 좀더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 허용하시는 특별한 고난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징계이든 연단이든, 이 두 가지는 다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은 사실 불신자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게 커다란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 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에 잘못했을 때 매를 들어 치 기도 하고, 강하게 키우기 위해 호된 훈련을 시키기도 합니 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연단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키는 것이 생각납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가 파득파득거릴 때부터 새끼 독수리 를 데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그냥 떨어뜨립니다. 새끼 독수 리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결국 떨어지면, 땅에 부딪치기 직전에 어미 독수리가 쏜살같이 내려와서 수려한 날 개를 펴면서 새끼 독수리를 안전하게 데리고 올라갑니다. 그래 서 숨을 돌린 후에 여유가 생기면 다시 공중에 팽개칩니다.

이것을 반복함으로써 새끼 독수리가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하늘과 맞서서 날 수 있는 강한 새로 자라도록 훈련시 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온실 속의 연약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 세상의 비바람과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으로 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 해서 때로 우리에게 고난을 허용하십니다.

제가 그 형제에게 그런 이야기를 죽 했지만, 쉽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성경 구절도 많이 이야기했지만 그 형제도 성경 구절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게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올라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특별한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의 눈빛이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때때로 하나님 은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우리 에게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을 생각나게 하시고 또 지혜를 주십니다. 저의 말에 그 형제는 『저를 특별한 사람으로 쓰 시려고요?』라고 반문했습니다. 제가 손을 잡으면서 그래요, 형제님. 하나님은 이 시대에 터키라는 나라에서 당신을 사용 하시기 위해 다른 사람 경험하지 못하는 이 특별한 고난을 계속적으로 주신다고 나는 각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베냐민 칸테미루! 저는 그곳에 다녀온 후 계속 이 형제를 위 해서 기도합니다.

제가 이 형제 이야기를 한 것은, 소아시아에 존재했던 조그만 서머나 교회가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 는 터키의 삼대(三大) 도시 가운데 하나로 굉장히 크고 아름 다운 항구 도시입니다. 옛날부터 이 도시 사람들은 소아시아에 서 자기네가 최고라는 특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씌어졌던 때에 이 도시에서 통용되던 화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소아사아의 첫번째.

\이 도시는 경제적으로 아주 부요했고 정치적인 영향력도 막강 했으며 친(親)로마적인 성격을 띄었습니다. 로마 황제 숭배가 가장 극성을 부리고 있던 도시가 바로 이 서머나였습니다.

이런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자그마한 그리스도인 단체가 바로 서머나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 하는 말할 수 없는 불이익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신앙을 견고 하게 지켰습니다. 서머나는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감히 주님도 책망할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있었던 이 교인들을 향해서 주님이 무슨 책망을 하 시겠습니까?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받다가 결국은 피 를 흘려 순교하는 자들이 있었던, 주님의 사랑의 숨소리가 들리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의 승리는 그 당시 도처에 흩어져 있던 많은 도시 교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서머나 교회를 보라. 저토록 극심하고 극렬한 고난을 받으 면서도믿음의 승리를 이루어 낸 서머나 교회를 바라보라.

교회들이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서머나 교회는 승리하는 교회 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교회가 누리고 있었던 엄청난 승리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 까? 이 고난의 시대를 또 한번 살아가는 우리들이 주님께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이 고난 앞에서 이 교회가 그토록 위대하 고 찬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하는 것입니다. 서 머나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 속에서 우리는 승리의 비밀을 세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고난의 증인이셨음을 기억하라 서머나 교회는 주님이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는 이 믿음으로 자신들의 고난에 맞섰습니다. 9절에 보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會)라고 하여 아노니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첫째로, 환난을 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환난은 예수 믿기 때문에 받는 시련입니다. 그들이 신앙 때문에 지불하고 있었던 값비싼 대가, 그 고통을 주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궁핍을 안다고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것은 물질적인 궁핍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예수를 믿게 되면 돈 벌 수 있는 길이 다 막힙니다. 재정 적으로 무척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지금도 회교권에서는 그렇 습니다. 또 회교권과 비교해서 조금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이 집트에서조차 예수를 믿으면 절대로 진급할 수가 없게 되어 있 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장사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집도 팔아야 하고 장사도 그만두어야 한다고 할 때 당신은 그러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당했던 고난의 의미를 우리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의 궁핍을 아신다고 하신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보십시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

물질적으로는 가난할지 모르지만 네가 사실은 부자라는 말씀입니 다.믿음에서 부요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에서 부요하고 그 주님과 누릴 수 있었던 교제의 찬란한 기쁨에서 부요했던 사람들, 그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유대인들이 가하는 박해를 안다고 했습니다.

서머나는 로마 황제를 숭배했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돈이 많았기 때문에 관리들을 매수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 신들의 신앙을 지켜 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인 들을 고발하고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섰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이 사실상은 하나님의 백성 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 님의 백성일 수가 없다. 그들은 사단의 도구이다. 그들에 의 해서 너희들이 받고 있는 고통과 눈물과 고발과 중상과 모략도 내가 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고통받을 때도 서럽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에게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얼마나 더 마음이 아픕니 까? 차라리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하는 수모는 견딜 수 있 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받는 고통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에게서 너희들이 당 했던 그 모략과 중상과 고통을 내가 안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아시면 되지 않습니까? 제가 교인들과 상담할 때 제일 안타까운 것이 이야기하는 도중에 목사님도 몰라요라고 말 할 때입니다. 물론 모르지요. 제가 알 까닭이 있습니까? 그 고통, 그 마음을 제가 어떻게 다 알겠어요. 그러나 그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래요. 전 몰라요.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자매님의 고 통과 눈물도, 형제님의 말할 수 없는 번민과 아픔도 주님은 아십니다.

서머나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는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서머나 교회의 사자(使者)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서머나 교회에 주께서 처음이요 나중이신 분으로 선포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통이 언제 끝나나 하 고 지루해 하던 교인들에게 이 메시지는 얼마나 감격적이었겠 습니까? 그분은 고난의 처음도 알고 끝도 아십니다. 뿐만 아 니라 고난의 절정인 죽음도 경험해 보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아시고 공포도 아십니다. 우리와 비슷한 경험 을 한 사람이라야 우리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과부 사정 과부가 알아 준다는 말은 영원히 진리입니다.

헨리 뉴웬이라는 수도사 심리학자가 쓴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습니다. 주님은 그 자신이 상처를 받으신 분입니다. 오해도 받으시고 배척도 받으시고 고통도 받으시고 십자가의 죽음도 경험하셨습니다. 상처받은 자로서 내 상처를 이해하시면서 나를 치료하실 수 있는 그분은 상처입 은 치유자이십니다. 그러나 남이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 사정을 이해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경우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 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통을 공감하실 뿐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인생의 최악의 절망인 죽음을 정복하신 분입니다. 부활의 대답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무엇이라고 선포하십니까? 내가 네 고통을 안다.

그러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서머나 교회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이 고난의 증인 임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를 보시고 나를 아신다고 한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앞에서 아무도 나를 몰라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안다.

고난은 결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서머나 교인들은 고난이 반드시 끝난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본문 10절은 일종의 예언적 경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 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 라 그리하면 내가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미 신앙적인 환난과 물질적인 궁핍과 유대인에 의한 배척이 라는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앞으로 더 무서운 고난이 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투옥 뿐만 아니라 죽음의 가능성도 예 언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 일 동안 몇 사람이 고난받는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 지도자 급의 몇 사람이 열흘간 환난을 당하게 되리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앞으로 받아야 할 고난을 왜 십 일이라는 단어로 표시했을까요? 십이라는 숫자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항상 만수(滿數)입니다. 물건을 셀 때도 열까지 세면 다 센 것입니다.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고난을 그들이 다 받는다는 의미도 되고, 그 고난은 열까지 밖에 안 간다는 것도 됩니다. 그 다음에는 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고통을 상당한 기간 동안 받지만 결국 그 고통은 끝난다. 그것은 무한한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끝나 야 할 고통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여러 유형의 고통 때문에 괴롭고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 니다. 고통은 반드시 끝납니다. 고난의 서신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전서를 보면 고난에 대한 많은 교훈이 나오는데, 특별히 이러한 면을 강조하는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5장 10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 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 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리라.

베드로는 잠깐이라는 단어를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밤이 너무 길어 새벽이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너희들이 당하는 고난이 혹 그렇게 느껴진다 해도 그 것은 잠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은 끝난다는 것입 니다. 고통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부딪치지 못할 고통은 없는 줄로 믿습니다.

고난 후에 예비된 상급을 기억하라 본문에서 고난 후의 상급은 두 가지 측면에서 언급됩니다.

소극적인 면에서의 상급/지옥 형벌을 받지 않음 11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죽음은 첫번째 죽음입니다.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죽음 다음에 오는 죽음, 즉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 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 망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사망은 지옥 형벌을 뜻하는 것입 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누르고 박해하던 자들이 지금 당장은 승리자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 지옥의 형벌이 피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들이 이 땅에서 누리고 있는 영광이나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소극적인 면에서의 상급인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지옥의 형벌과는 상관없는 자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삶이 끝날 때 지옥을 두려 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은 놀라운 약속입니다.

적극적인 면에서의 상급/생명의 면류관을 받음 10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 리라.

면류관이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에서는 두 가지의 다른 단어 로 쓰여집니다. 『디아데마』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왕이 쓰는 면류관을 말합니다.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디아데마』가 아니라 『스테파노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경기에서 최후의 승리자에게 주는 관입니다. 특별히 이 서머나 도시에는 많은 경 기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각 경기장에서는 많은 경기들이 진행 되었고, 뛰어난 운동 선수들은 대중의 인기를 끌어모았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운동 경기가 끝났을 때 승리자들에게 스테파 노스가 씌워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서 그들은 인생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경기장을 보 고 있었습니다. 인의 싸움에서 신앙을 가지고 마지막 승리를 하는 사람들이 주님 에 설 때 주께서 씌워 주시는 이 생명 의 면류관을 그들은 바라보았습니다.그 영광에 대한 비전이 서머나 교인들에게 이 땅에서 받는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 때문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기 에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을 죽을 정도로 충성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은데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죽도록이라는 말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혹은 죽는 그 순간에도라는 뜻 입니다. 지금 주님을 향해서 갖는 태도를 일관성 있게 견지함 으로써 마지막 죽음에 이를 때에도 주님에 대한 성실과 충성을 갖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이 신앙 고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게 그 죽음은 승리자의 개선 문에 불과한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죽지만, 승리자로서 죽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인들 은 승리자로서 죽을 수 있는 명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주님이 뛰어나와 감격하시며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인정하시는 그런 승 리자의 죽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죽도록 충성하라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 10절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A.D. 95년경 에 씌어졌는데, 그로부터 약 60년이 지난 후 A.D.156년 의 일입니다. 아마도 2월 22일일텐데, 바로 이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이라는 분이 주님을 향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 고 최후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성도들을 격려했다는 이유로 체포 됩니다. 서머나 총독은 굶주려 날뛰는 맹수들 앞에 선 86세 된 노인 목회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연세와 당신의 고결한 인격을 존경하오. 나는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소. 가이사가 주님이요 나사렛 예수가 주님이 아니라는 이 한마디만 고백하면 나는 당신을 풀어 주겠소.

이에 폴리갑은 하늘을 바라보고 총독을 바라보고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 나이 86세, 86년의 세월을 살아 오는 동안 내 사랑 하는 주님은 나에게 한번도 해롭게 한 일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찌 이 나이에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불명예스럽게 만들 수가 있겠소. 제발 나를 죽여 주시오.』 폴리갑은 굶주린 야수에게 던져지는 대신에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 을 당했습니다. 자기 몸에 불길이 닿는 순간 폴리갑은 큰 소리로 하늘을 향해 이런 부르짖음을 토했습니다.

『오 사랑하는 나의 주님이시여, 내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니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분의 죽음은 헛된 것이었을까요? 불행하게도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존재했던 그 지역은 지금 완전히 회교권으로 바뀌 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모두 사라지고 빈 터만 남아 있기 때 문입니다. 에베소에도, 버가모에도, 두아디라에도, 빌라델비아 에도 교회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일곱 교회를 방문하면서 제일 마지막에 다시 서머나로 와서 폴리갑 기념 교 회를 들렀습니다. 해질녁에 그곳에 도착해서 그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몇 명의 교인들이 은은한 촛불 아래 무 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폴리갑 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이 회교의 나라 한복판 에서 아직도 신앙을 지키면서 복음을 전하는 이 유일한 교회 서머나! 서머나는 살아 있었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어떤 고난이든 이겨 낼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는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습니까? 어떤 고난, 어떤 눈물, 어떤 고통도 주님이 아십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오래 계속되지 않습니다. 또 고 난 후에 주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상급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한순간 한순간 날마다의 삶 속에 믿음을 걸 고 최선을 다하고 실과 용기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과 교회들에게 서머나 교회의 영광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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