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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비를 뛰어넘는 신앙 (시 18: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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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에 고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고비를 잘 넘기면 성공하게 되지만 잘 넘기지 못하면 실패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침에는 “고비를 뛰어넘는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학생들마다 대학에 들어가려면 입시준비를 열심히 합니다만 어떤 학생은 무더운 여름철의 고비를 넘기지 못해서 실패자가 되기도 하고, 유흥장에 찾아가는 학생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실패자가 되기고 합니다. 유학간 학생들이 고향과 부모 형제가 그리워서 중도에 포기한 사람도 있고,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해서 중단하기도 하고, 공부하기 싫어서 중단하는, 실패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사업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경기, 자금난, 동업자들의 시기, 압박 등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36년 동안 목회를 해오면서 많은 어려움을 만났지만 그때 마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많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신앙생활 할 때도 고비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고 신앙생활을 포기해 버리고 싶은 심정을 느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비를 잘 넘겨야만 합니다. 그 고비를 잘 넘기면 신앙이 뿌리깊은 나무처럼 견고해지지만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그 신앙은 맛 잃은 소금이 되고 향기를 잃은 백합화와 같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는 종종 대적이 나타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사단(σατανο)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대적자”인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진리를 대적하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사단 마귀인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에게 나타나 신앙을 파괴할려고 하며 잘못 믿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피하고 멀리 떠나게 만듭니다. 신앙이 식어지게 만들고 신앙이 병들게 만듭니다. 불신자가 되게 하고 의심하는 자가 되게 하고 본인의 신앙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신앙까지도 무너지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단 마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마귀의 궤계를 깨뜨리고 앞에 있는 고비를 뛰어넘게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의심의 고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마귀는 의심하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만들며 의심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조 하와에게 마귀가 찾아왔습니다. 마귀의 하는 말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하고 물었습니다. 물음표를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로 하여금 의문이 생기게 하고, 의심이 불과 같이 일어나도록 만든 것입니다. 만일 그때에, 하와가 그 마귀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노라”고 사단 마귀의 꿰임을 뿌리쳤다면 밤죄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자손손(子子孫孫)이렇게 비참한 형벌을 당하는 죄악의 씨를 뿌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찾아와서 의심을 갖게 만들고 결국에는 그 미혹에 넘어가서 범죄하게 한 것입니다. 마귀는 이처럼 범죄하게끔 유혹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마귀가 찾아와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듣는데 의심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일까 정말 이 말씀대로 살면 은혜를 받고 복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생각이 마음 속에 떠오르거든 “마귀가 마음 곁에 찾아와서 나를 미혹하는 구나”하는 것을 즉시 깨닫고 사단을 물리치므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원망, 불평하는 고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마귀는 원망불평하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이유없이 원망하고, 짜증내고, 불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성품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어떻게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 속에 마귀가 다가와서 “원망해라, 짜증내라, 불평하라”고 미혹하니까 그 미혹에 넘어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내는 자리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절대로 원망하고, 불평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상황에서 도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었습니다. 불평하게 된 원인이 물리도록 먹는 만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 속에 모든 영양분을 보유하게 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평을 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끼의 밥을 죽을때 까지 먹어도 물리지 아니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헤를 잊어버렸습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노릇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하였으며 홍해를 육지같이 가르고 건너가게 해주셨으니 생각해 보면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속으로부터 진정한 감사가 없고 원망 불평하게 되었으니 마귀의 꿰임에 넘어간 것입니다.

나의 마음 속에 원망함과 불평함이 가득차 있다면 마귀가 나를 미혹하려는 것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쳐서 항상 감사하며, 찬송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위험한 고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입니다. 사단이라 함은 사타노스( ) 즉 대적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게 만들고, 진리에 대해서 대적하게 되고, 주의 종을 대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란 목자로서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고난을 당할 때에 기도로 도와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대적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종을 대적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간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종을 통해서 은헤를 받고 증거해 주신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가 넘치는 것이 정상인데, 대적할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사단 마귀가 그의 마음을 미혹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러한 마음이 생긴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스려 마귀의 꼬임을 물리쳐서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고라라고 하는 레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어 떼를 지어 당을 만들었습니다. “나를 따르라”하는 식으로 자기 편을 만들어 모세를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너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인 나를 대적하는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하겠노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의 무리가 땅이 갈라져서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아주 무서운 일을 당한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잠언 말씀을 읽고 있는데 17장 11절로 13절 말씀에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 차라리 새끼 빼 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것이니라’는 아주 무서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사명이 있고, 성도들은 그것을 지킬 사명이 있습니다. 지키고 안지키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이며 책임입니다.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하는 일이 바로 반역을 힘쓰는 일인 것입니다. 그저 모이면 모반을 계획하고 대적할 방법만을 찾는 것이 이 부류의 사람들이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에게 잔인한 사자 즉 무서운 천사가 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임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사람이라도 악한 사람이 없기를 바라며,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종에게 순종하는 분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낙심하고 좌절하려는 고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마귀는 성도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에 낙심하게 만듭니다. 잘 믿고 충성하고자 할 때에 주위의 시기 질투와 시험 때문에 낙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에 낙심하지 말고 그 고비를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하려고 할 때에 이상하게도 시험을 받아 낙심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왜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단 마귀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낙심하게 만든 때문입니다. 마귀는 충성못하게 만들며 주님의 일을 중단하게 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서 기도해야 하며, 낙심이 되고, 좌절이 될 때에 사단 마귀의 궤계임을 깨닫고 사단 마귀를 물리쳐서 강건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일지라도 환경이 어지러워지고 복잡해지면 낙심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주위 환경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울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더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견고한 믿음으로서 환경을 헤쳐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음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높고 위대한 섭리를 바라보고 감사하며 찬송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은 불행을 더욱 조장시킬 뿐이고 허약함을 더욱 더 조장시킬 뿐입니다. 기쁨이 천국의 좋은 날씨인 것 처럼 절망은 지옥의 안개일 뿐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충만받아 기쁨이 넘쳐서 바울 사도와 같이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천국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낙심하고 절망하면 이미 그 심령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궤계를 깨뜨려 버리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낙심과 좌절의 고비를 뛰어 넘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성도에게 다가오는 핍박과 고난의 고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성도들을 집어 삼키려고 핍박을 가해 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다가오는 핍박과 고난은 축복이 임하는 전주곡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고비를 넘기기만 하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헤와 축복이 우리의 삶속에 임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고난이란 의미없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죄로 말미암아 받는 고난도 있겠지만 주님을 믿다가 받는 고난, 말씀대로 살다가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 말씀 때문에 받는 고난, 이유없이 받는 고난은 결코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저주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죠( )는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신다고 하면 그것은 질병이나 실패나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으로,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막힌 귀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저주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인류의 역사를 지배하시고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고 계시는데도 그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이 바로 저주받은 증거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많은데 감사하는 마음이 메말라 버리고 그저 원망, 불평하고 짜증내는 마음 그 자체가 저주받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은혜로 충만해서 항상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며, 그 모든 고비를 넘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란 고난속에서 견고하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백향목이 모진 북풍한설에 그 휘몰아치는 고난을 겪으면서 레바논 산에서 견고하게 자란 다음에 성전의 재목들이 되었듯이 성도들도 고난풍파 중에서 신앙이 견고해지며,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해지면 마침내 성전의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고난을 통해서 성숙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올 때 그것을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숙되어지고 순수한 믿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절과 12절에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하나님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윌리암 펜( )은 “고통이 없으면 승리가 없고 가시관이 없으면 보좌가 없으며, 십자가가 없이는 부할이 없고, 쓰라림이 없이는 영광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 )는 “고통은 크리스챤의 마크( )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인리히 힘메르에게 1945년 4월에 순교당한 디트리히 본훼퍼( )는 “고난이란 참된 제자의 배지( )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의 배지, 참다운 주의 제자라는 배지가 무엇입니까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분이 배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배지는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할 때에 원망, 불평하지 않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고난을 잘 견디어 가는 것이 크리스챤의 배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의 장벽을 뛰어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고난의 장벽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과 기도로 뛰어넘는 것이기에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심하게 되고 원망, 불평 낙심하게 되고, 고통과 환난 등의 핍박이 많이 다가옵니다. 이렇게 수많은 고비를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뢰하여 기도로써, 믿음으로써 그 담장을 뛰어넘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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