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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누군데 (고전 0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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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인생을 산 것은 아니지만, 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저의 인생을 올바로 잡아주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은 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기대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는지 정확하게 분석되지는 않지만, 저는 스스로에 대하여 높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스스로에 대한 기대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저는 성장기에 겪을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유혹으로부터 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 저는 "선생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높게 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제가 살던 세계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영예였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선생님 아들이 이래도 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었고, 그 결과 스스로 행동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남들이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저를 강제하면 오히려 부담이 되고 거부감이 생길 수 있었겠지만, 저의 기대감은 스스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흔쾌히 그 기대감을 채우려 했었고, 또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부모님을 떨어져 도시로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을 때, 저는 부모님의 기대를 매우 든든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저 자신을 생각할 때, 늘, 저에 대하여 기대를 걸고 희생하고 계신 부모님을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이 저를 다잡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적부터 "내가 누군데"라는 속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네가 누구냐"고 물으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촌놈이었지만, 제 스스로는 자랑스러운 저 자신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에게는 나 자신을 내세울 수 없었지만, 스스로에게는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내"가 있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도록 유혹을 받으면, "내가 누군데, 그런 일을 하는가"라는 생각으로 버텨 냈습니다. 공부에 소홀히 하여 성적이 좋지 않게 나올 때면, "내가 누군데, 내 머리가 얼마나 큰데, 이런 성적에 만족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투지를 불태웠습니다. 객지에서 살면서 고향 생각 때문에 마음이 괴로울 때면, "내가 누군데, 이까짓 일에 약해지는가"라고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었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저는 신앙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이러한 신앙은 저 자신에게 또다른 기대감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 앞에서는 자주 나를 예수님과 관계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한 생각은 저 자신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군에 갔을 때는 이미 제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났을 때였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훈련받으면서, 저는 결코 남들보더 먼저 낙오할 수 없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저를 이미 목사로 취급하는 동기들 앞에서 저는 결코 제 스스로를 놓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악조건에서도 "내가 누군데"라고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버텨냈습니다.
요즈음 저는 스스로를 영성가로, 구도자로 생각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있습니다. 요즘에 어떤 의사 결정을 할 때에는 늘, "내가 누군데 구도자라는 내가, 고매한 영성가가 되고 싶어하는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물론, 늘 그렇게 하고, 늘 그렇게 행동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늘 그렇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영성가로서의 저 자신에 대한 기대는 저의 삶은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인도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이렇듯,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바로 이 질문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문제입니다.
저는 외국에서 살면서 입양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을 정리할만한 근거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를 넘기기가 그렇게도 힘이 듭니다. 하지만 진실한 신앙을 가진 아이들은 거뜬히 넘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개의 자식"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지는 못하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해답을 신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생각은 그들로 하여금, 모든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그것에 근거하여 좋은 기대감을 가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신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원래 그런 놈이야"라는 생각처럼 사람은 무섭게 만드는 것이 또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바로 그런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함께 신앙 생활을 하던 두 사람이 어떤 문제에 얽히는 바람에 서로 싸우게 되고, 마침내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자신이 눈물로 호소하여 얻은 교인들인데, 그들이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할 터인데, 서로 분쟁을 하여 고소하는 데까지 발전을 하였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겠습니까
목회를 해 보지 못한 사람은 그 안타까움을 다 알지 못합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기쁜 일은 교인들이 서로 애틋하게 사랑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인들이 서로 물고 뜯는 것을 보면, 목회자는 참으로 비참해집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도 안타깝거니와, 그 일이 마치 목회자의 부족함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심정에서 바울은 오늘의 본문을 씁니다. 이 글에서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당신들이 누구인데 그러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지금 작은 이해 관계에 얽혀서 서로 물고 먹으려 하는데, 과연 그러한 행동이 당신들의 신분과 어울리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고린도 교인들 모두에게,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누구인가"를 한 번 물어 보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과연 어울리는가"라고 묻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미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본능에 사로잡혀 서로 싸우면서 그것을 잊어 버렸기에, 바울은 여기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대면하도록 몰아 세웁니다.
바울은 첫째로 그들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심판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천사까지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증언은 신약성서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계 2:26-27).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스스로 그들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결혼식을 몇 달 앞에 둔 신랑이나 신부가 함부로 처신을 하면서 순결치 못하게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장차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줄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처신하다가 막상 결혼식장에 서게 된다면, 속으로 얼마나 켕기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미래를 굳게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부터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미래의 영광 에이, 그 때 가 봐야 알지, 뭐 그렇기야 하겠어"라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런 고결한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스스로 장차 하나님의 고귀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지금 여기에서부터 이미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언행심사에 있어서 그 격에 맞게 처신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로 이 점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우리를 재판해 주십시오"라고 청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바로 그 사람들이 장차 자신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될 그 사람들임을, 그들은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존심이고 뭐고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지만, 미래에 그들에게 주어질 신분으로 볼 때, 그것은 성도로서의 모든 자존심을 스스로 짓밟는 일이었습니다.
요즘도 그런 일들은 자주 벌어집니다. 교회끼리 분쟁을 하고, 그래서 법정에 고소하고, 결국 판사가 재산을 인원수 대로 배분하여 갈라서라는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목사는 누구입니까 목사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요, 진리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적어도 진리를 찾았다는 사람입니다. 판사는 누구입니까 기껏해야 법을 알고 그것을 집행할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문제에 대하여 목사가 판사의 조언을 따라야 합니까, 아니면 판사가 목사의 조언을 따라야 합니까 당연히 판사가 목사에게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혹은 성도가 서로 싸워, 판사에게 "우리를 판단해 주십시오"라고 청을 한다면, 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게다가, 장차 판사 자리에 앉게될 목사와 성도가 비참하게 피고 자리에 앉아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 생각해 보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 다투어 세상 법정에 서게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의 신분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잠시라도 멈추어서서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을 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명색이 진리를 추구한다는 내가, 장차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될 내가 이래도 되는가"를 한 번쯤 진지하게 물어 보았더라면, 이런 일을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사람들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9절에서 바울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유업으로 보장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달리 말해서, 영원한 것, 참된 것, 가장 귀한 것을 이미 확보했다는 뜻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생에 있어서 진실로 얻어야 할 것을 이미 얻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믿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최근에는 그러한 유업에 대하여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내세와 미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이 없고, 현세적인 신앙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것에만,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을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땅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땅의 것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신앙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이렇게 고정되면, 우리는 불의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불의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대단한 죄를 지은 사람만이 불의한 것이 아닙니다. 의롭지 못하게 사는 것이 불의한 것입니다. 물질에만 묶여서, 땅의 것에만 묶여서, 땅만 쳐다 보고 사는 삶은 불의한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털끝만큼의 손해도 보려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믿는 형제를 걸어 송사하는 일이 왜 생깁니까 아무 것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익 앞에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믿음 속에서 이미 얻는 것들을 생각한다면, 그는 비로소 이 땅의
것에서 해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이익 앞에서 초연해질 수 있습니다. 영원하고 참된 것을 이미 얻은 사람들이 물질적이고 속된 것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일이 되고 맙니다.

신학생 때, 제가 아주 존경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글을 많이 쓰시는데, 그분은 마치 도사 같아서,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해 있는 느낌을 주곤 했습니다. 글로 그분을 만날 수밖에 없던 저는 그분처럼 초연하여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그분을 흠모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그분이 담임하는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달변은 아니었지만, 역시 그분의 초연한, 구도자적인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입구에서 인사하는 그분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왜, 실망했는지 아십니까 그분의 사모님이 빼어난 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게 실망거리였느냐구요 저는 그분의 글을 읽으면서, 어리석은 마음에, "아, 이분의 아내는 분명히 투박하겠지"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분은 늘 외모보다는 마음이,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미모의 사모님을 보자, "아, 당신도 역시 말만 그렇게 하지, 실상은 외모를 보는 속물이군요"라는 생각이 뇌리를 때렸던 것입니다.
물론, 그 후에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 사모님이 우연히 미모를 가지게 되었을 뿐, 사실은 그 목사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 사모님의 마음이었다고!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우연이 생기게 되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런 우연이 저에게도 일어났느냐구요 어디, 우연이 그렇게 쉽습니까
나중에는 다시 존경을 하게 되었지만, 그 때, 왜 제가 실망을 하게 되었을까요 영원한 진리를 마음에 품은 사람이 미모의 여인을 탐낸다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영원을 가슴에 품었다는 사람이, 작은 이익 때문에 전전 긍긍한다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았다는 사람이 돈 몇푼에 울그락 불그락 한다면, 그것도 역시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이익을 감수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까지 고소하는 행동은 분명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침내, 차라리 손해를 감수할 수는 없느냐고, 답답한 마음을 터뜨립니다. 그들이 "내가 누군데", "내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받은 사람인데"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더라면, 그런 답답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11절)을 얻은 사람들임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이미 그들이 바울을 통해서 예수를 믿을 때 시작된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스스로 거듭났음을 확인하고, 그렇게 믿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동안 몸에 배었던 모든 악한 일들을 청산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이러한 처음의 믿음과 태도는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처음의 열정이 사그라들면서, 그들의 마음은 전과 같이 다시 완악해지게 되었고, 마음이 완악해지자, 이미 버린 구습이 되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안에 있다는 한 가지 이유로, 그러한 구습이 되살아나는 것에 대하여 태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믿기 전에 하던 습관 대로, 교회 안에서 싸움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소송을 제기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점에서 가장 많은 실수를 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으로 한 번 거듭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태어난 아이가 자연히 자라는 것이 아니듯, 거듭난 우리의 속사람도 자연히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 사람이 계속하여 성장할 수 있도록 영성 생활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속 사람이 충분하게 성장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이러한 영성 생활에 게을리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성령에 의해서 다시 지어진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곧 까맣게 잊어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내적 사람이 강건한 사람은 결코 남에게 손해를 줄 수도 없고, 혹시 그런 손해를 입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걸어 송사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
이 송사에 얽혔다면, 대충 이런 상황일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금전적인 손해를 입혔겠죠. 손해를 입은 사람은 가해자에게 그 일에 대하여 사과하고 적절하게 배상하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해자가 그 일에 대하여 전혀 사과도 하지 않고 배상도 하지 않습니다. 피해자는 화가 납니다. "내가 왜 억울하게 손해를 보느냐"면서, 피해자는 세상 법정에 고소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 모두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사람이 남에게 애꿎은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 반대입니다. 또, 어쩌다가 그런 피해를 입혔다고 했을 때, 성령 충만한 사람은 즉시로 사과 하고, 자신의 집을 팔아서라도 배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걸어 고소하게 했을 때에는 그 사람에게 분명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소한 사람은 잘못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한 것도 그렇고, 그런 손해를 감수하지 못하고 끝끝내 복수하려 한 것을 보면, 그 사람도 역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두 사람을 모두 책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교인들 전체를 함께 책망합니다. 그 두 사람이 그렇게 싸우도록 방치한 것도 그렇고, 그런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도 모두, 그들이 성령 충만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책망을 합니다. 만일에 그들이 스스로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했더라면, 이 문제는 세상 법정으로 가기 전에 이미 어떻게든 해결이 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내가 누군데", "내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데"라는 생각을 했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송사 문제의 뿌리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로운 신분을 망각하고, 그 신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못한 데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분명히 알고, "내가 누군데"라는 자존심을 살렸더라면,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어떤 일을 앞에 두고라도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정체를 망각하고 삽니다. 우리가 얼마나 귀한 신분인지,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 현재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까맣게 잊고 삽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작은 이익에도 물러서지 못하고 악해지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을 보고 비난하게 되고, 공동체는 그러한 욕심으로 인하여 파괴되어 갑니다.
눈 앞의 이익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명예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이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그 모든 비난이 왜 생깁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자신이 약속받은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고 행동한다면, 그러한 비난의 표적이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 앞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함으로 인하여, 영원을 품었다고 하면서도 덧없이, 거룩한 성도라고 하면서도 속되게, 진리를 알았다고 하면서도 부정하게, 하늘에 속했다고 하면서도 땅에 집착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귀한 이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처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 앞에서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생각하고, "내가 누군데"라는 오기로 버티고 서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고귀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그 이름을 더럽힐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들 뿐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전 인구의 몇 프로냐를 놓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 고귀한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에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이 커질 때,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라는 고귀한 이름은 더욱 빛이 날 것입니다.
"내가 누군데" "내가 예수의 제자인데!"
"내가 누군데" "내가 성령의 전인데!"
"내가 누군데" "내가 영원을 품에 안은 사람인데!"
"내가 누군데" "내가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잔데!"
"내가 누군데" "고귀한 이름, 그리스도인인데!"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데"
"내 가 누 군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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