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이 없다면 (고전 15:16-19)

첨부 1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2천년전 오늘 이른 새벽에 주님 은 부활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무덤 문을 돌로 막아 놓고 군인들이 굳게 지키고 있었지만 주님은 온 세상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사이에 아주 조용하게 홀연히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날 주님은 온 세상과 인류에게 희망과 기쁨과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면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날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축복의 아침으로 기록된 날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나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정신없는 말입니다.
참으로 망령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인생이 모두 끝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모독하는 아주 불경스러운 말입니다.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육체의 죽음으로 그만 일수 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예수의 부활 이후 인간존재의 값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을 일거에 뒤바꾸어 놓은 사건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값을 새롭게 매겨 놓은 사건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발트(K. Barth)는 이 부활을 "복음의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또 신학자 에밀 부른너(E. Brunner)라는 사람은 "기독교는 부활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만 보아도 이 부활이라는 말이 40번이나 나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에만 봐도 "부활이 없다면"이라는 말이 8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말하기를 "부활이 없고 우리의 인생이 다만 이생으로 끝이라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 부활은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의 부활은 한마디로 인간의 삶이나 의식이나 질서에 대 변혁을 주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서 다음의 것들이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시기 전과 이후의 이 죽음에 대한 인식이 어떻습니까 죽음은 사실 그렇게 유쾌한 것은 아닙니다. 아주 침울하고, 음침하고, 무겁고 비탄스러운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있는 곳에는 으례히 탄식이 있고, 비탄이 있고, 음침함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죽음의 음침함을 중화시켜 보려고 죽음이 있는 곳에 촛불을 켜 놓습니다. 그리고 꽃으로 장식을 해 놓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옛부터 초상집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대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죽음이 있는 곳에는 혼자 있을 수 없을 만큼 음침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정상적인 죽음이 있는 곳에는 덜 합니다. 혹 동네 처녀가 물에 빠져 죽었거나 동네 총각이 횡사를 해서 죽었다고 하면 이것은 큰일입니다. 그 때는 온동네를 두려움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두려움을 중화시켜 보려고 무당을 동원하여 굿판을 벌리고 난리를 치게 됩니다. 거기다 처녀가 한을 지닌 채 죽어 보십시오. 그 원혼이 떠돌다 누굴 잡아갈지 모른다고 해서 사람들은 상당기간 외출도 삼가한채 공포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죽음의 신(神)이 다녀간 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다는 것은 유쾌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신은 와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격리시켜 놓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이를 떼어놓고, 부부 사이를 떼어놓고, 어린 자식을 무자비하게 빼앗아가 버립니다. 그런 사신의 얼굴은 분명히 무섭기 이를 데가 없을 것이고 그 사신의 손발은 냉혹할 것이고, 그 속성은 아마 비정하기 이를 데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 부활하심으로서 이같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일순간에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죽음이 있는 곳에 찬송이 있고 감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이같은 찬양이 예수 부활로 인해서 우리는 죽은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뿐만 아니고 죽어 가는 사람조차도 그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변화입니다.
엊그제 병원에 심방을 갔는데 어느 집사님의 사후를 부탁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은 유언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시신 전체를 병원에 연구용으로 기증해 주십시오" 그럽니다. 그런데 그 말하는 환자 자신은 아무런 두려움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스런 표정같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보통때와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모두 예수께서 먼저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심으로서 이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져서 그렇습니다. 실제로 어떤 분은 그렇게 유언한 분도 있습니다. "내가 죽거든 우울한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밝고 경쾌한 행진곡을 불러 주십시오" 이것이 부활을 아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부활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여유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인식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았습니다.

2. 무덤에 대한 인식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동양의 여러나라들 특히 우리나라는 이 무덤에 대해서 관심도 많고 미련도 많습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미련이 지나쳐서 이 무덤에 대해서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덤을 영원한 안식처처럼 생각을 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덤을 크고 높고 화려하게 장식을 해 놓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고대시대에는 무덤속에 장식도구나 생활도구를 두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고분들을 파 보면 각종 희귀한 보물들이 발굴되는 것은 모두 무덤에 장식도구들을 넣어 두었던 것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면 땅 속에서 나름대로 내세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덤 속에 생활도구들을 넣어 주었습니다.
선사시대에는 무덤 속에 토기(土器)들도 넣어 주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무덤 속에 생활도구와 노리개 그리고 마차들도 넣어 주었습니다. 또 고대 부여(夫餘)에서는 순장(殉葬)제도의 하나로 죽은 이를 위해서 노예 100명 정도까지 함께 묻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무덤을 하나의 생활공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단 우리나라 뿐이 아닙니다. 애굽의 임금들의 무덤인 피라밋을 보면 거기에도 그런 의식이 들어 있습니다. 특히 애굽의 제 4왕조의 임금이었던 쿠푸(khufus)왕의 피라밋은 높이만도 140미터, 밑변이 140미터나 되는 크기입니다.
그 피라밋을 쌓는데 2t반이나 되는 돌덩이들이 230만개가 들었는데 이 돌들을 아라비아 산중의 채석장에서 깎아서 나일강까지 끌고와 운하로 운반해서 이것을 다시 루비아산까지 옮겨가서 쌓는데 자그마치 10만 명의 노동자가 30년 동안 쌓아 올렸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이 무덤을 쌓는데 돈이 없어서 쿠푸왕은 자기의 딸을 팔아서 돈을 마련해서 그 무덤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 거기에 부활 사상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때는 예수 부활이 있기 전이었으니까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고, 오직 죽어서 영원히 묻혀 있을 무덤에 관심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도 무덤에 유달리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부활신앙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을 준비를 철저히 한 분입니다. 제자들과 반찬을 나누면서 관계의 청산도 끝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심으로서 정신적이고 심정적인 준비도 철저하게 끝냈는데 다만 무덤 준비는 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할 사람에게 무슨 무덤이 그리 중요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 무덤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천국에 대한 믿음을 갖게"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초월하고 무덤에 대한 미련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초연하게 죽어 갈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그에게 천국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순교자들이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초연하게 순교의 길을 걸어갔던 것도 그들에게 모두 천국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천국 신앙을 강하게 심어 주었습니다.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아주 인상깊게 심어 주었습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하루는 아이의 죽음이 임박해 옴을 알고 죽음을 인식시켜 주고 미리 준비시켜 주려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야, 너 죽음이란 것이 무엇인지 아니", 어머니의 물음에 아이가 대답합니다. "알고 있어요" 뜻밖의 대답입니다. "어떻게 알았니" "나는 벌써부터 어머니의 얼굴에서 죽음을 보았어요" 그럽니다. 어머니의 그 근심스런 얼굴 모습에서 이 아이는 벌써 자신의 죽음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손을 꼭 잡고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야, 잠시 후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는 과정일 뿐이야, 너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거든 쫓아가서 포옹해 드려라" 얼마나 정다운 대화입니까 그 아이가 어떻게 그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고 받아 들이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것은 기다림이 없는 생활입니다. 저녁이 되어도 찾아올 사람이 없어서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쓸쓸한 사람입니다. 밤이 되었는데도 돌아올 가족이 없는 생활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적막한 생활입니까 이렇게 사람에게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생활입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큰 축복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갈곳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임종의 순간이 다가와도 그렇게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어서 갈 곳도 없고 준비도 안된 사람처럼 죽음이 두렵고 한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 앞에는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그러니 그 종말이 얼마나 기대에 차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 앞날이 있었기에 오늘의 수치를 유연하게 감당했고, 오늘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할 수 있었고, 그날의 자랑을 위해서 오늘의 괴로움을 기쁨으로 참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우리들에게 이같은 천국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처럼 허무한 존재도 세상에 없습니다. 미생물들 가운데도 천년을 산다는 은행나무가 있고, 500년을 산다는 거북이가 있고, 굼벵이도 때가 되면 나비로, 잠자리로, 매미로 변신해서 창공을 날라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며 신선한 이슬을 머금고 살아가는데 인간이 고작해서 7, 80년을 살다가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그것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뭐가 자랑스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좀 잘 살다가 간 사람들은 덜 억울할 것이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온갖 가난과 질시와 고생과 질병과 불구자로 천대받고 살아간 사람들의 인생은 어디 가서 보상을 받습니까 그런 인생이라면 짐승 보다 뭐가 더 낫단 말입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우리에게 다만 이생뿐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우리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이와같은 인간의 불행스런 모습들을 일거에 해결해 준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천국에 대한 믿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4. 부활은 "하나님의 권능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죽여서 땅 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덤의 입구를 돌로 막아 버렸습니다. 그뿐 아니고 황제의 인(印)으로 누구도 무덤의 문을 열고 닫을 수가 없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 속에서 다시 살아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그 밤을 평안히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른 새벽에 능력으로 무덤 속에 있는 예수를 살려 내십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개입해서 살려내시는데 누가 그 힘을 막아낼 수가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권능 앞에 황제의 권능이 무슨 힘이 있고, 돌무더기가 무슨 힘이 있고, 지키고 있는 군인들의 파수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잠자고 있는 사이에 하나님은 아주 조용하게 예수를 부활시킵니다.
그래서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이 막으려 해도 하나님이 살려 내십니다. 우리들이 무덤 속에서 부활하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땅속에 누워서 거기서 살겠다고 아우성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권능으로 살려 내시는데 누가 일어나지 않고 버티고 누워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이같은 부활 신앙만 분명하게 가지고 살아간다면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인데 그 죽음의 문제들을 모두 극복한 사람들에게 더 이상 무엇이 무섭고 두려운 문제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함께 소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값을 새롭게 매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절은 온 인류가 잊을 수 없는 그런 축복의 날인 것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들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