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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과분한 은혜 (수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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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벌인 전쟁은 크게 4가지 종류의 전쟁으로 기록됩니다.
첫 번째는 여리고성에서 벌인 전쟁이고, 두 번째는 아이성에서의 전쟁입니다.
이 두 가지 전쟁을 기록한 이후에, 에발산과 그리심산에서 신명기의 내용을 가지고 언약을 체결하는 언약체결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약체결식 이후, 가나안의 남쪽 지역들을 정복하는 남방 정복이 있었고, 그 다음에 북쪽 지역을 정복하는 북방 정복이 있었습니다.
즉, 『여리고-아이-언약체결-남방정복-북방정복』의 순서로 정복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이 전쟁 기록들에는 크게 두 가지 실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이성과 벌였던 첫 번째 전쟁에서의 패배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실수를 통해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두 번째는, 기브온 거민들과 조약을 맺은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거민과 조약을 맺은 것이지요. 이 실수는 여러 가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쳤고 실질적인 여러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조약체결 때문에 급작스럽게 발생하고 진전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름아니라 이스라엘의 남방 정복 전쟁입니다.
남방 지역의 다섯 왕들이 형성한 연합군은, 기브온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그리고 기브온 사람들은 급히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청하고 여호수아는 즉각 출전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기브온을 공격해 왔던 다섯 왕들은 “예루살렘”-“헤브론”-“야르뭇”-“라기스”-“에글론”의 왕들이었습니다. 이 다섯 지역들은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해서 모두 남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남서쪽으로 30km지점에, 야르뭇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24km지점에, 라기스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4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에글론은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수 없지만, 대략 가나안의 서쪽 평야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모든 왕들이 함께 모여 진군한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불과 북서쪽으로 약 8km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리적인 위치로 미루어 볼 때, 예루살렘왕 아도니세덱이 크게 두려워하고 여러 왕들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연합군 형성을 독려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코앞에 이스라엘의 전진 기지나 마찬가지인 성읍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사들이 지금 그 기브온, 즉 예루살렘의 북서쪽 8km 지점까지 진군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점들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과분한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야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과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인상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도면밀하게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야웨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린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브온과 조약을 맺은 것은 야웨 앞에서 불순종한 모습이며, 야웨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언약의 가나안 땅에서 그 땅의 거민과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 땅을 영원히 정복하고 단독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어느 정도 박탈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기브온 거민들과의 조약 맺은 것이 발단이 되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이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방지역의 다섯 왕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기브온을 공격해 왔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전쟁을 쉬지 않고 계속해야 하는 상황으로 돌입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기브온과의 불순종적인 조약 체결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더욱 더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정복 전쟁으로 나서야만 하게끔 역사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야웨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차피 정복 전쟁을 하러 예루살렘은 물론 그 남쪽의 여러 성읍들로 행진해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스라엘 군사들이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져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가나안 남방의 여러 왕들이 직접 이스라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의 수고를 덜어 주는 그런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린 이런 상황 전개를 보면서 야웨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조심스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백성, 곧 언약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인도하시는 분이시란 사실을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브온과 조약맺은 잘못된 행위조차도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 위한 하나의 발전적 계기로 사용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린 그 점을 더욱더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린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을 보곤 합니다.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고 심판과 저주를 받는 역사를 여호수아 이후 역사는 종종 기록합니다.
하지만 길게 보면, 이스라엘이 그와 같이 심판과 저주를 받는 것들조차도 야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과정으로 사용하시곤 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심판과 저주를 당하는 것이 야웨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길게 보았을 때 이스라엘이 당하는 환난과 심판들이 구원의 과정이라고 해서 야웨께서 일부러 이스라엘을 심판과 저주의 자리로 이끌고 들어가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심판과 저주를 당하고 야웨에게서 끊어져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야웨께서는 심판과 저주를 내리시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어질 수 없는-이스라엘에게는 도저히 자격이 없는-그런 구원을 선물하신다는 말입니다.
한없는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맘놓고 죄짓고 심판을 당해도 되겠구나 ... 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심판과 저주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야웨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다시금 구원을 받는 그런 은혜를 누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들이 또한 만약 순종과 헌신으로 야웨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분께서 과연 얼마나 크고 놀라운 구원과 은혜들을 베풀어주시겠습니까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면류관과 상급을 준비해 놓으실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 자체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준다’는 뜻입니다.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상급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가 지나치게 내려질 때, 다시 말해서 죄를 짓고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자에게 용서는 물론이거니와 선물조차 주어질 때 우린 과분한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과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에 대해서 심각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한번 더 정복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과분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죄짓고 범죄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죄악 속에서 태어나 죄악을 먹고 마시던 그런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그런 우리들의 죄악을 용서해주셨고, 더 나아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직분들을 주셨습니다.
제자라는 직분,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주신 것입니다. 마치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정복자, 언약성취자라는 직분을 다시 허락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린 과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 이처럼 과분한 은혜를 주시는 것일까요
심판을 대신해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에게 다시금 정복자로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건 아마도, 다시는 불순종의 길로 들어서지 말고 너에게 주어진 정체성대로 온전히 순종하며 살라고 권면하시기 위해서 일겁니다.
이젠 불순종이 아니라 순종의 모습으로, 이젠 방종이 아니라 책임 있는 자유인의 모습으로, 이젠 절망이 아니라 소망으로 살아가라고 과분한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들이 받은 직분들을 생각해 봅시다. 분명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들은 과분한 은혜입니다. 내가 가질 자격이 없는 것들인데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들입니다. 심판의 손에 붙들려 있어야 할 ‘나’인데, 오히려 내 손에 새로운 직분과 새로운 정체성이라는 선물을 쥐여주신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늘 묵상하고 기억합시다.
<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
서울의 한 가정에서 고등학교 2학년 딸이 부모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부렸습니다.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고,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며, 밤늦게 집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야단을 쳐도 아무 소용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두 부부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나요 우리 딸이 다시 좋은 아이로 돌아오는 길이 없을까요"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렸습니다.
"딸 때문에 안타깝지 그런데 네가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내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딸을 위해 기도하는데 이상하게 자기가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고, 자기도 딸에게 그렇게 인내하면 언젠가 무사히 딸이 돌아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날 밤도 딸이 늦었습니다. 갑자기 전화 벨소리가 울리는데 불길한 느낌이었습니다. 받아보니 병원 응급실에서 온 전화였습니다. 딸이 병원에 있으니 오라는 전화였습니다. 딸이 친구 셋과 함께 택시를 타고 가다가 택시가 전신주와 충돌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전석 옆에 앉았던 딸만 약간의 찰과상만 입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습니다.
두 부부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가장 위험한 곳에 앉았던 딸을 지켜주신 그 깊은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2주일간 딸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이들은 깊은 가족 간의 사랑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우리의 행복을 막는 그 무엇도 반드시 뚫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어도 낙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주력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거든 조금 더 기다려보십시오. 자녀가 허물이 많아도 조금 더 기다려보시고, 일이 안 풀려도 조금 더 기다려보십시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살려는 자녀에게 반드시 축복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가끔 우리 자녀의 행동을 보면 속이 답답할 때가 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답답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자녀도 반드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라고 자녀를 통해 기도제목을 주시는 것은 아닐까요
때로 말을 안 듣는 자식을 심하게 때리고 싶지만 너무 사랑하니까 계속 참습니다. 그처럼 자식을 키우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 교사가 가져야 할 기본 자세 >
그런데 교회 일에 참여하다보면 가끔 안타까운 일도 보고 어려운 순간도 당합니다. 그 순간을 잘 극복하고 승리하려면 직분을 맡은 자에게 꼭 필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그 자세가 무엇일까요

1. 충성스런 자세
직분자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충성스런 자세입니다. 딤전 1장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직분을 맡기신 이유는 그를 충성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일할 때 유능함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충성하는 자세입니다. 그 자세만 있으면 조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사실 주님은 능력이 많은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을 보시지 않을 것은 당연합니다. 부족한 그대로 나와도 충성 한 가지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생활을 하면서 힘들어도 끝까지 충성하시고 봉사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열심히 봉사해도 오히려 봉사를 받는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듣기도 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을 들어도 봉사를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이깁니다. 사실 힘들 때 포기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힘들면 사표를 쓰는 것보다 더 쉬운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해결방법은 아닙니다. 좋은 해결방법은 십자가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문제 해결을 바라지 말고, 계속 봉사하며 문제를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이유이든 포기는 항상 이른 것입니다. 이론이 필요 없고 계산해볼 필요도 없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포기는 없을수록 축복입니다. 기도도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조금 내 뜻대로 안 된다고 기도를 포기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욕심 없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기도한 만큼 축복하실 것입니다.
대개 재능이 있고, 환경이 좋은 분이 실패하는 이유는 항상 쉽게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실패는 진짜 실패한 것이 아니라 도중에 포기하니까 실패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가 실패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실패는 기도와 봉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워도 직분(교사)을 포기하지 말고, 주님 붙들 듯이 더 붙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요새는 조금만 힘들어도 직분(교사)을 포기합니다. 충성스런 종이 참 적은 시대입니다. 조금만 힘들면 나가떨어지고, 조금만 맘에 안 들면 나가떨어지고 배반의 길로 갑니다. 꾸준함이 없습니다. 문명은 점차 발달하지만 사람의 품격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처럼 배반을 잘 하는 존재가 있을까요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느 해 여름 복날이었습니다. 한 주인이 키우던 개를 묶어 들판으로 끌고 갔습니다. 개는 두들겨 패야 고기 질이 좋다는 말을 듣고 주인을 개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개가 날뛰다가 묶었던 끈이 풀어져 주인한테 맞아죽지 않으려고 도망을 쳤습니다. 주인은 "이 개놈이 어디로 도망쳤을까"하고 궁금해하며 집으로 돌아와 보니까 개가 조금 전에 자기를 때린 일은 다 잊고 집에서 꼬리를 흔들면서 그를 맞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주인은 개를 꼭 껴안고 다시는 개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내가 앞으로 이렇게 충성스런 개고기를 다시 먹으면 개자식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조금 힘들다고 달아나지 말고 좋은 말과 좋은 행동으로 충성을 보여주십시오. 어떤 분은 생각으로만 충성합니다. 그러나 진짜 충성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분은 행동도 없이 "충만! 충만!"만을 구하다가 아까운 세월을 다 날려보냅니다.
나가서 복음 전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죽도록 충성하면 반드시 충만해질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은 협력하는 사람입니다. 충성을 다해 협력해보십시오. 아무리 유능한 사람도 좋은 협력자를 만나지 못하면 무능한 사람이 되지만 아무리 무능한 사람도 좋은 협력자는 만나면 100% 이상의 힘을 발휘해 유능해집니다. 우리가 각각 맡은 직분에 충성하면 우리 교회는 진정 능력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더욱 주님께 충성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충성하는 분은 힘껏 격려해주십시오. 충성이란 원래 사람의 칭찬을 너무 기대하지 않을 때 진짜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칭찬을 바라지 말되 다른 사람이 잘하면 힘껏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충성하고, 서로 충성을 격려할 때 우리 교회는 칭찬 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2. 겸손한 자세
딤전 1장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엄청난 죄인이지만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절 후반부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고백에서 바울은 "내가 괴수였다"라고 하지 않고 "괴수이다"라고 현재형으로 말합니다. 즉, 자기의 죄인 됨의 문제가 믿기 전의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도라도 죄의 문제는 계속되는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 가지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가까운 겸손한 사람일수록 더 자신의 죄를 많이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 가까워지고, 말씀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죄를 더 인식하게 됩니다. 진실한 신자는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알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그래서 정말 훌륭한 신자는 매일 바울처럼 "내가 죄인 중의 죄인이구나!"라고 느낍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부족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부족하다!"고 하면서 지나치게 낙심하는 것은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습은 사실상 아직도 겸손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부족하다!"고 인정한 후에 주님을 의지하고 희망을 가지는 것이 진정 겸손한 것입니다.
좌절하는 것, 낙심하는 것, 자살하려는 것은 "나는 절대 부족하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본인이 부족하지 않은데 왜 이런 일을 내게 당하지"하고 생각하니 속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태도를 취하고 낮은 데서 시작하면 마음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모릅니다.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면 못할 것도 없고, 못 이룰 것도 없습니다.
어느 날, 부산에 사는 한 교인이 사업에 실패하고 태종대로 자살하러 갔습니다. 가보니까 그곳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께도 죄송하고 몸이 너무 아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살바위에서 밑만 쳐다보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돈이냐! 돈이 그렇게 좋으냐!"
스스로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명색이 교인인데 어떻게 돈 때문에 살겠습니까" 스스로 그 말을 하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돈보다 인생이 더 중요함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는 새롭게 각오했습니다.
"어차피 빈손으로 태어났는데 사글세방에서 살면 어떤가 그래도 몸은 건강하니까 아파트 처분하고 사글세방에 살면서 다시 열심히 살아보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편한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니까 금방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없어도 넉넉해집니다. 성격이 부드러워집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4절 말씀처럼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욱 겸손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욱 크신 은혜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3. 본이 되는 자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이 은혜 받은 이유는 다른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본이 되게 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남에게 본이 되어달라!"고 요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본이 되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본이 될 수 있습니까 그 사람 위치로 가서 그를 이해하고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받아주면 모든 오해는 풀리고, 모든 사랑은 회복될 것입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남의 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변화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의 변화를 인식하면서 내가 죄인의 위치에 내려갈 때 진정한 사랑이 나오게 됩니다. 의인의 자리에 서서 죄인에게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죄인을 사랑하면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죄인의 위치에 같이 설 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어려운 사람의 위치에 서서 실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가 서로 남의 위치에 서 줄 때 우리들은 더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삼문교회를 사랑한다고 말로만 하지 마십시오. 우리교회의 다음세대를 감당할 기둥들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기둥들을 다듬어 가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교사”들입니다. 이들을 격려해 주십시오. 이들을 도와 주십시오.
적어도 기관의 행사 때마다 오셔서 격려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물질을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투자하십시오. 결코 헛되지 않는 풍성한 열매로 맺혀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그냥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명 주어서 보낸 존재입니다.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좋은 세상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좋은 세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고 좋은 사람만 찾아다니기보다는 만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셉처럼 가는 곳마다 그곳을 변화시키고, 축복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되고, 결국 '천만 만민'이 우리를 통해서 복을 받게 하리라는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꿈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큰복을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순종하는 삶, 전혀 새롭게 살아가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분이 베푸시는 또 한 번의 호의를 잘 사용하도록 합시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삶이,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과분한 생명의 은혜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데 오늘을 다시 한번 더 부여받았음을 기억하십시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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