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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앉은 뱅이의 변화 (행 0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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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자로서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상대적인 불행의 조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멀쩡한 두 다리로 걷고, 뛰며, 달리는 사람들 보다는 마음대로 걷지 못해서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불편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갖가지 장애자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외형적, 신체적 결함을 지니고 불편함을 겪으며 살아야 하는 육체적 장애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육체적으로는 멀쩡하면서도 심각한 정신적인 결함을 지닌 자들이나, 영적으로 전혀 발육되지 못한 영적인 장애자들이 더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 앉은뱅이의 위대한 변화를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날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이 사람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새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 기적적인 놀라운 변화는 또 다른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변화를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운명의 변화, 새로운 삶에로의 대전환, 이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앉은뱅이의 무엇이 무엇으로,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피동에서 능동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본문 2절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날마다 남의 등에 업혀서 성전 미문에 왔습니다. 40평생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면서부터 장애자였습니다. 생계를 위해 성전 미문 앞에 오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발에 의해 옮겨져야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며 괴롬을 주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성전에 왔으나 예배하러 온 것도, 기도하러 온 것도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닙니다. 성전에 왔으나 성전 안에 들어오지도 않고 성전 밖에서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 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 났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메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구걸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기 스스로 걸을 수 있고, 제 힘으로 일할 수 있고, 남을 도와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 구실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없는지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지요 교회에 나오지만 자기 신앙의 힘으로 제발로 나오지를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의지해서 이끌려 나오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요 이런 사람은 남의 등에 업혀서야 성전에 오던 앉은뱅이 꼴입니다.
여러분은 미문 밖의 앉은뱅이처럼 피동적인 자리에서 능동적인 자리로 신앙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2.구걸에서 봉사로 변화되었습니다.
본문 2절에 “이는 성전에 들어 가는 사람 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라고 했고, 3절에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 앉은뱅이는 미문 밖에 자리를 정하고 기도하러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루라도 남들에게 구걸하지 않고서는 먹고 살수 없었습니다.
남들은 자기 능력껏 열심히 일하여 나날의 양식을 벌고 있었지만, 그는 초조하게 사람들의 동정을 바라면서 그들의 불안정한 적선에 의해서 겨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처량한 걸인이었습니다.
그는 미문을 구걸 장소로, 기도 시간을 구걸의 기회로 삼고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워야 할 곳을 가장 어둡게 만들고, 아름다운 미문(美問)앞에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지나가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한푼 두푼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담스러워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왜 하필이면 성전문 앞에 와서 추태를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불쾌해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조금 준다는 원망과 불평에만 능해졌을뿐, 많이 받았다는 감사에 둔해진 그야말로 거지근성으로 꽉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구걸을 더 계속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미문을 더럽히고 앉아 출입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혀 주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 해도 큰 봉사인 것입니다.
교회 주변에는 구걸을 능사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한 두번이지 상습이 되면 비록 교회를 위해서라고 할지라도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구걸에서 봉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3.미문에서 성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본문 2절에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매일 성전에 오기는 오되 겨우 미문 밖까지였으며, 구걸을 하기는 하되 겨우 사람을 향해 동전 한 닢의 적선을 빌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한심한 일입니다. 오지 않으면 모르되 기왕 올 바에야 성전까지 올 일이지 왜 겨우 미문 밖이며, 아니빌려면 모르되 기왕 빌 바에야 하나님께 매달려 빌 일이지 왜 겨우 무능한 인간들에게 손바닥을 벌리느냐 말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오지만 앉은뱅이와 같이 성전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전 밖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지금까지 그러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달라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미문 밖에서 성전으로 들어 왔으며, 사람을 향해서 구걸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향해 찬미하는 생활로 변화되었습니다.
자기 요구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불평을 품고 하나님을 등지고 교회를 외면하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멀리하지 마세요. 아무리 어려워도,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 기대할 것이 없어 보여도 결코 교회를 떠나지 마세요. 여러분의 생활 무대가 교회가 되도록 하세요. 그리하면 여러분도 반드시 나면서 앉은뱅이 되었던 사람이 받은 복을 받게 됩니다. 나의 신앙과 생활은 아직도 미문 밖에서 배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미문에서 성전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앉은뱅이 된 사람처럼 피동적인 자리에서 능동적인 자리로, 구걸에서 봉사로, 미문에서 성전으로 들어가 새롭게 변화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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