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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누구인가? (갈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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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다 자신 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 면서 그것이 자기라고 생각한다. 각자 자기의 이름이 있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면 돌아다보고 대답한다. 자기의 소유도 잇따. 재산,명예, 가족, 친국, 학벌등등에서 자신을 찾아낸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잘 안다고 생각한다.

이장호 감독의 최근 영화가 "명자, 아끼꼬,쏘냐"이다. 변혁기에 한여인이 세 사람의 전혀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마다 이름도 바뀌고 삶도 바뀐다. 한 마디로 하자면 바뀌는 급변하는 시대에 따라 같은 사람이 전혀 다른 존재로의 변신을 강요당한다는 내용이다. 속은 명자이지만 살기 위해서는 아끼꼬가 되어야 하고 쏘냐로도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성경에도 이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이 나온다. 바로 모세이다.그는 이스 라엘 사람 곧 애굽 사람의 노예로 태어난다. 그러나 어려서 공주의 양자가 된다. 그리고 40세가 될때까지 왕자로 자라난다. 그러다가 어느날 살인을 하고 도망자가 된다. 결과로 그는 40년동안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가 된다.

그가 다시 나머지 40년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보내게 된다.

양을 치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명자, 아끼꼬,쏘냐" 에서 이 세사람의 삶이 다 들어있으면서도 시대에 따라서 한 사람으로만 보 여진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명자인가, 아끼꼬인가, 쏘냐인가 아니면 섞인 존재인가 마찬가지로 모세도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왕자인가 노예인 가 양치기인가 늙은 패배자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그는 왕자였다. 아름다운 사람들틈에 귀족들과 함께 살았다. 가장 수준 높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양들 속에 누우며 들에서 찬이슬을 맞으며 춥고 배고파야 했다. 꿈속에 왕궁을 배회하다. 눈을 뜨면 황량한 들판일 것이다.

외로움과 열등감은 그를 병들게 했따. "아, 과거의 나는 행복했는데, 지금 나는 다르다. 과거의 나는 누구이고 지금은 또 어떤 사람인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변하는 상황에 맞추어 자신을 이해한다. 잘 살다가 가난해지면 기죽는다. 그러다가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면 우쭐해진다. 그래 서 늘 변하는 상황에 비추어 자신을 살펴보게 된다. 이것을 정확한 자기 이 해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상황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금년은 나의 이해가 나의 상황을 바꾸는 한해가 되어야 한다.

모세가 그렇게 되는 과정을 보자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때 가 서야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삶을 청 산하면서 새로운 삶을 받는다. 과거의 사람이 아닌 단계로 뛰어 넘는 것이 다. 양치기에서 지도자로 바뀌는 시점이 생긴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 질 문을 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주제이다. "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그가 생각하지 않았던 정체를 말해준다.하나님은 그에게 네가 누 구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냐"는 철학이나 선에서 가장 근본적인 명제이다. 즉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내가 경험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는 말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자문한다. "내가 누구냐" 어떤 사람은 평생토 록 그 답을 얻지 못하고 지새고 만다. 출발점에도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동문서답 이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 무슨 뜻인가 모세가 누구이든 그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정 그 대답을 원한다면 하나님은 대답해 주었을 것이다. "네가 무엇이냐고 잠간 있다가 사라질 안개가 아니더냐 들의 풀꽃 같은 존재가 아니더냐 꼭 그 대답을 듣고 싶으냐"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과 함께 모세의 삶은 바뀌고 만다. "하나님이 정말 로 함께 하는 사람"이란 자기 이해를 하게 된다. 아무 것도 바뀐 것은 없었 다. 여전히 그의 주위에는 더러운 양떼들뿐이었고 광야에는 바람만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미 늙은이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지도자였고 기적의 수행자였따. 그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초라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이름을 듣고 웃었을지도 모른다. 한님이 함께 하신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실력이 생길 것인가 빚이 없어질 것 인가 아니면 하늘에서 돈이 쏟아질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바뀔 것인가 하나님은 만난 사람을 반드시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 사람은 옛날 자기와 새 자기 사이에서 방황한다. 양치와 지도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나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자기가 경험하는 삶 은 하나라도 달라진게 없다.그러나 목사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대하고 있다.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러나 느낌은 하나도 달라진게 없다. 그래서 전혀 나와 새롭게 바뀌었다고 하는 나 사이에서 방 황하게 된다. 어느날은 신자이고 다른 날은 그냥 세상 사람인 것이다.

성경에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중에도 야곱은 대표 적인 경우이다. 그는 어느날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받는 다. 야곱은 간교한 자란 뜻이다. 그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아들로 이름이 바뀐다. 그때부터 그의 고민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서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은 그대로 야곱이었다. 이스라엘인가 야곱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신자들의 경험이 아닌가 어느 종교잡지에 이런 기도 문이 실렸다. 제목은 "그렇지만 주님"이다. "주께서 말하는대로 가겠습니 다.그렇지만 예배는 매주 가라고 안하시겠지요 주께서 바치라는대로 헌금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체면유지 정도로 조절해 주십시오.

기도는 계속된다. "주께서 지라는대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렇지만 짐 꾼더라 대신 지라고 해도 같은게 아닙니까주께서 사랑하라는대로 사랑하겠 습니다. 그렇지만 당장은 못하고 나중에 하겠습니다. "이것이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자들이다. 이렇게 되어사야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갈등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옛사람인가 중간인가 롤란드 헤이즈는 미국의 위대한 흑인영가 가수이다. 그의 영감이 흐르는 찬송은 듣는 이의 영혼부터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 올 수 있는가 놀란다. 그는 죠지아 시골에서 자라났다. 맨발로 걸어서 도시 에 나온 무식하기만 흑인 청년이었다. 어느날 교회에서 찬송을 불렀다. 그의 찬송에 감명을 받은 한 의사가 집에 이 청년을 초대했다.

그 집에서 헤이즈는 유성기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나온 첫 음 악으로 카루소의 노래를 듣는다. 헤이즈는 회상했다. "그날 그 순간 내 가 슴에는 요란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미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 다. 그 이후 내 속에는 카루소가 살기 시작했다. 지평선 저 너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음성을 따라 살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속에 위대한 카루소가 있었기에 그는 어떤 역경도 아무렇지 않게 생 각했다. 단지 카루소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여 실제로 그와 같은 존재 가 되어갔다. 위대한 카루소는 그를 통해서 노래했다. 우리도 똑같은 상황 이 될 수 있다. 위대한 카루소는 그를 통해서 노래했다. 우리도 똑같은 상 황이 될 수 있다. 우리 속에 어떠한 존재가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어제와 똑같은 옛 사람이 그냥 변함없이 살고 있는가. 새사람이 살고 있는 가.

이것이 바로 오늘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이 한 경험이기도 하다. 나는 죽 었고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살아난 것이다. 옛 나는 죽었다.죽은 사람은 병 이 없다. 죽은 사람은 성질도 없다. 죽은 사람은 슬프지도 않다. 죄도 사 라졌다. 죽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권한다. 너는 새사람이다.그러 므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롬 6:11).

동시에 바울의 속에서는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 이 넘치는 것을 믿었다. 그리스도는 내 밖의 어떤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살아잇는 존재로 내 속에 들어왔고 내 속에서 살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생명과 능력도 나를 통해서 발휘되어야 했다. 그에겐 너무도 분명한 깨 달음이었다."나는 새사람이다.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전 2:6).

이렇게 된다면 자기의 인식은 바뀐다. 주는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신다. " 너는 세상의 빛이다. 너는 능력자이다. 귀신이 네게 복종할 수 밖에 없다.

너는 의로운 사람이다. " 이제 나는 그리스도초럼 생각해야 하고 그리스도 처럼 삶을 다스려 나가야 한다. 그처럼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용납하고 사랑해야 한다. 나는 작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고백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의지에 의해서 움 직여 지는 사람이다. 그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존재이다. 내 속에 두 의지 가 있다. 옛사람의 의지는 죽은 것으로 여기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새 의지가 일어나도록 하라. 그렇게 함으로 내 속에서 새로운 사람은 일어난 다. 동시에 내 속의 능력자도 힘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리해 보자. 나는 누구인가 우선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이다. 이것이 신자의 고백이다.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노력하는게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깰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는 것이 다. 죽은 사람은 모든 것이 그친다. 나쁜 성질이 그쳤다. 나쁜 습관도 그쳤 다. 병도 그쳤다. 죄도 그쳤다. 모든 저주도 그쳤다.

나쁜 것만 그친게 아니라 과거의 사람이 모두 죽었다. 죽은 사람에게는 능 력도 없다. 잘난 것도 없다. 교만도 없다. 신자는 자기의 노력과 강점까지도 포기한다.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똑똑하고 재주있고 돈 잘벌고 야심에 차 서 "내가 최고"라고 외치며 사는 것도 이제 끝이다. 이제 온전히 자신을 포 기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자신을 의뢰한다. 이것이 중생한 삶이다.

그리고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 이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눈으로 마음으로 보아지기 시작한다. 물론 단번에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점 점 더 모든 면에서 자신이 죽음을 더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심을 확인한다.

그리스도는 삶의 모든 면에서 소유권을 차지한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다"에 내속의 그리스도는 하신다"고 바뀌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 많은 유명한 사람이 있다. "내가 누구냐 내가 이런 사람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는 아침 안개일뿐이니라.너는 시드는 들꽃이다."안개를 위해서 한평생 날뛰는 사람이 될 것인가 시드는 들꽃을 향해서 미워하고 욕하며 살 것인가 하지만 하나님이 정녕 함께 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정체가 이해된다면 무엇 이 두려울 것인가하나님이 함께하는 작가, 디자이너, 사업가, 교수들, 참으 로 그리스도가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야 하겠 다. 그래서 그 삶이 영원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와 함께 그 기쁨과 행 복도 변치 않는 것일 것이다. 그속에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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