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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강림 (요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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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은혜이다. 은혜를 다 알면 이제 완전 한 신앙이 된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은혜를 모르면 잘못된 신앙이다. 세상적으로도 은혜란 말은 고귀한 곳에 쓰인다. 높은 이 로부터 엄청난 것을 받았을 때만 은혜이다. 남편의 은혜, 친구의 은혜란 말 은 없다. 부모나 스승 임금 같은 존재에게나 은혜란 단어를 사용할 수 있 다.

부모의 은혜를 생각해 보자. 부모로부터 나는 모든 것을 다 받았다. 생명 과 양육과 교육으로 그치는게 아니다. 여기에 되돌려지는 것은 거의 없다.

자식은 부모에게 혹시 양육이나 보호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처럼 은혜는 줄 수 없다. 마지막 생명이 그치는 순간까지 부모는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제공한다.이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 다.

이러한 부모의 은혜도 하나님의 은혜에 비한다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의 은혜가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줄 수 없다. 그저 세상에 사는 남의 은혜는 그 넓이와 깊이나 하나님만큼이나 엄청나서 아무리 오래 배워도 측 량을 다 못한다. 하지만 아는 만큼 신자는 누리고 행복하게 된다.

옛날 인간들은 지금이나 똑같이 고통하고 있었다. 그 원인은 죄였다. 생명 의 근원인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기 힘으로 살려는 것이다. 인간이 거하는 땅 에는 어두운 세력이 항상 머물었다. 인간은 절대로 이 어둠을 벗어날 수 없 었다. 수천년의 시간이 흐르고 수억만의 인간이 태어나고 죽어갔지만 아무 도 이 무서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보라. 사람들의 고통의 눈물을.

하나님은 예언을 주셨다. 선지자는 소리 높여 외쳤다. "전에 고통하던 자 에게 흑암이 없으리로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미 세상에 빛이 있었다. 밤에 무수 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별빛 아래서 선언하고 있었다.

이 빛은 세상에 있는게 아니다. 이 빛은 사람의 영혼 속의 어둠을 몰아낸 다.

이 빛은 하늘로부터 강림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나타나서 하 나님의 말을 하는게 아니었다.그는 완전히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세상에 내 려 오실 것이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어깨에 온 세상을 메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요 평강의 왕이 다. 그는 사랑과 의로 믿는 사람들을 영원토록 다스리고 구원하신다.

이 일을 어려운 말로 성육신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육체로 변했다는 말이 다. 여기에는 구원의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게 된다. 하나님이 사람이되 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모든 부요하심을 가지고 인 간 세상에 내려오신다. 이 사건이 바로 성탄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오신다.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상은 하늘의 모든 영광으로 빛나게 된다. 이제 이 영광을 볼 수 잇는 믿 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은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지 않았다. 삶의 방법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말해 주지도 않았다. 그것은 세상의 스승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욕심을 버 리라든지 노력해 보라든지 악한 짓하지 말라고 타이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살았다.그러나 그 삶은 예사 삶이 아니었다. 그 삶이 바로 은혜 의 내용이었다. 그 삶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그가 왜 인간이 되어야 했 던가 그 모든 과정이 다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그의 부끄러운 탄생, 가 난,배고픔,외로움, 아픔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받은 것은 없었 다. 그의 비참한 죽음도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인가그의 삶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그의 천함과 우리의 천함을 대신한 것이다. 그의 가난이 우리가 가난할 값을 치 룬 것이다. 그의 슬픔과 외로움 아픔으로 우리는 이러한 저주에서 놓임을 받 았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그의 다시 삶으로 우리는 영원한 삶을 얻었다. 그의 평생에 은혜였다. 은혜는 내것임을 알라.

은혜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선물로 주는 것이다. 16세기 영국의 위대한 여왕 엘리자베스1세를 암살하려던 여인이 있 었다. 이 여인은 궁정의 시종으로 변장하고 교묘하게 폐하의 침실에 숨어 들 었다.그리고 때가 오면 찌르려고 예리한 칼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여왕의 심복들은 어수룩하지 않았다. 폐하가 들어오기 전 침식을 수색한다.

옷장에서 끌려나온 여인은 여왕 앞에 꿀리었다. 등은 창자루로 무자비하게 눌리고 있었다. 여인은 떨며 자비를 구했다. 노한 여왕은 물었다."내가 너를 용서하면 무엇을 댓가로 주겠는가"여인은 우러러 보며 대답했다. "조건을 다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여왕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네 가 옳다 나는 너를 내 은혜로 용서한다."여인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후 이 여인만큼 무조건적인 여왕에게 헌신한 사람은 없었다. 역사적인 사실이다. 여왕을 죽이려던 여인은 기꺼이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 여왕을 돕는다. 은혜는 이런 개념이다. 하나님이 지옥을 만드심은 우리가 거기 해 당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아무 조건이 없다.

회개를 하면 용서하는게 아니다. 무엇을 하면 복주는게 아니다. 무조건이다.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고 복을 준다고 생각하면 은혜를 오해한 것이다.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이요 은혜는 엄청난 것이다. 기도하고 봉사를 하면 은혜가 주어지는게 아니다. 금식하고 철야하니까 들어지는게 아니다. 기도나 봉사나 어떠한 헌신이나 다 은혜를 받았으니까 하는 것이 다. 그것들은 다 은혜를 안다는 증거이다. 은혜를 받은 이는 절대로 헌신한 다.좀더 쉽게 말해 보자.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도 같은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다른 종교처럼 신앙생활이 미신적으로 그리고 광신적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 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방 법이 바로 성육신이다.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사람을 찾아 오시는 것이다.

낮은자는 높은자를 만날 수 없다.평민이 왕을 만날 수 있는가 그렇지 않 다. 우리가 대통령을 만날 수는 없다. 큰 교회에 가면 담임목사를 만날 수 없다. 윗사람이 찾아와야 한다. 그러기에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찾아가 는게 기독교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게 기독교이다. 대 통령이 국민을 만나러 오는게 쉽다. 그 대통령이 비밀 전화번호만 주면 된 다.기도가 무엇인가 기도는 노동이 아니다. 은혜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 시키려고 몸부림치고 금식하는게 아니다. 몸부림도 금식도 자기 자신 때문 이다. 자신이 얼마나 사모하는지 스스로 깨닫기 위해서다. 대통령의 비밀 을 전화번호를 돌리듯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전화한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 이다.

예배는 또 무엇인가나오면 복주고 안나오면 복을 안주는가예배야말로 은 혜중 은혜이다. 천한 죄인이 악한 원수가 하늘의 황제를 만나뵙는 영광이 다. 일주일에 한번씩 대통령과 식사하라면 이 핑게 저 핑계 되겠는가 아니 다.목사들이건 중들이건 종교계의 인물들이 그와 오찬하려고 안간심을 다한 다.예배를 소홀히 하는 자는 은혜를 모른 자이다. 축복이 어찌 있으랴!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보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이다. 거기 모든 진리가 충만히 있다.그를 자세히 보라.그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의 일생을 자세히 살펴보라.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누린다. 그가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진다. 천지를 만드시던 음성 하늘과 땅의 기초를 놓고 별들에게 명령하던 그 음성인 것이다.

그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라.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그가 매맞 고 모욕당하고 죄수처럼 난폭하게 취급받고 그가 원수처럼 대접을 받을때 만 민에게 배신을 당하고 외롭고 죽어갈 때 그리고 불붙는 지옥에 떨어져 내려 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이 그토록 악한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또한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

그의 위대한 삶을 보라. 그는 비록 사람이지만 너무도 신처럼 살았다. 그 의 삶 자체가 바로 새로운 계시였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들을 일으켰 다. 풍랑을 호령해서 잔잔케했다. 더럽고 가난한 사람들, 죄에 물든 사람들 을 사랑했다. 그의 삶은 은혜였다. 우리도 그런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계시였다. 그가 성령으로 들어오심으로 이 은혜의 삶은 가능케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 다시 성육해야 한다. 매 순간이 그의 성육하신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 할 일은 단지 그의 임재를 확 인할 뿐이다. 사람들은 묻는다."이러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신앙을 구체 적으로 어떻게 적용할지 알려주세요."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방법을 알 려주지 않는다.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하라고 하지 않는다.

"은혜를 받은자여 은혜 받았음을 알아라 내가 너를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만들어주었는지 깨달으라. 그러면 불평과 분노는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네 안에서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으라. 나의 임재를 확실하게 알라. 그러면 너는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너는 다시 성육하신 하나님으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스도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기 전에 아니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나를 보고 구원하시기로 결심하셨다. 이것이 은혜이다. 내가 아무 것도 하기 전에 그냥 나를 택하신 것이 은혜라는 말이다. 포수가 사슴을 좇는다. 즉 목 표를 좇는 것이다. 이때 포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나는 사슴이다.

그는 나를 쏘기 좋은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좋은 때를 기다리서 정 확하게 조준한다. 반드시 맞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격은 실패하는 경우가 없다. 나는 하나님에게 잡혀서 그의 것이 된 것이다. 만약 인간이 하 나님을 자기 손에 넣는다. 그리하여 자기가 이룬 구원을 누리게 한다.

하나님은 은혜로 나를 대하신다. 내게 요구하시는게 없다. 내가 행동하는 것은 그 은혜를 누리려는 것이다. 예배를 가장 우선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일을 최상의 것을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은혜가 오는게 아니다. 오히려 그 렇게 해서 받은 은혜가 내 삶 속에 누려지게 하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만 큼이나 엄청난 것이다. 우리 몸을 거기에 맞출수록 기쁨과 능력도 그러하 다. 자 이제 알았으니 은혜를 누리자.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자. 그래서 내게 유익이 되도록 하자.성탄을 기다리면서 세상에 오신 은혜를 바라본다. 성탄 은 역사적으로 사실적으로 은헤가 이 땅에 우리 속에 강림하셨다는 증거이 다. 눈이 내려서 온 땅을 덮고 캐롤이 울려 퍼질 때 깨달으라. 같은 공간 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성육신을 그리;고 내게 임하신 감당못할 은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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