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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와 그것, 나와 너 (눅 07: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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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예수님이 과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오리이까”(눅7:20) 우리는 때때로 이와같은 의문을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한때 잘 믿습니다. 믿음 속에서 큰 행복을 누리고 믿음 속에서 큰 만족을 누립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같은 확신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토록 확고했던 확신이 의심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예수님처럼 믿고 따르더니 어느 순간엔가 예수님은 우리 관심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습니다.
이같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잘못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영접을 하되 예수님을 도구적 관심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부분, 혹은 필요한 관심으로만 믿는다는 것입니다.
유대 철학자 마틴 부버는 우리의 ‘관계’를 ‘대화적 관계’와 ‘도구적 관계’로 구분합니다. 대화적 관계는 상대를 대할 때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진정한 인격과 인격의 만남, 곧 ‘나와 너’의 관계를 말합니다. 반대로 ‘도구적 관계’는 상대를 진실된 모습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해서든지 상대를 이용해 내가 편리한대로 조정하는 관계, 곧 ‘나와 그것’의 관계를 말합니다. 나와 그것의 만남은 결코 진정한 만남이 아닙니다. 그 만남은 잠깐은 지속될 수 있지만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나와 너의 만남입니다. 여기에 참다운 기쁨과 즐거움, 영원한 교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진정한 만남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절규가 있습니다. 주님은 수많은 인파속에 계셨지만 외로운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은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예수님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충족시키려고 나올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왔지만 어리석게도 세상의 풍속과 화려한 옷과 사치한 생활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에는 관심이없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으로부터 자신들이 바라는 것만 충족되면 그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이렇게 한탄하였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32절)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인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고자 할 때, 사람들의 도구적 관심에 무용지물로 판단될 때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예수님을 ‘그것’의 대상으로 삼는 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서의 예수님은 비천한 자요 어리석은 자요 무능한 자로 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진정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소유했습니까 예수님과의 진실된 교제가 있습니까 어떤 순간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님과의 영원한 만남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것’으로 대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인격적인 ‘너’입니다.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만남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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