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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통제구역 (창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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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작가인 키플링은 "바보는 불에 데워 싸맨 손가락을 또 다시 불 속에 집어 넣어 본다" 고 말하였습니다.인간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모두 바보들입니다.

아브라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약 25년 전에 애굽에서 바로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을 때처럼 그랄의 아비멜렉왕에게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였습니다.

그랄은 가나안과 애굽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장사하는 사람들의 집결지로서 아비멜렉이 통치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권속과 가축이 많았고,군사적인 영도력을 지닌 자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쌍방의 유익과 안전을 위해 조약을 체결하고 정략 결혼으로 상호간의 유대를 다지는 일이 흔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딸들이 없는데다가 자기 아내인 사라의 미모가 월등하여 상대방의 이목을 끄는 불리한 입장이었습니다.자고로 미녀를 아내로 둔 자의 공통된 고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우기 고대 사회에서는 자기 지역을 일단 벗어나면 신변의 보호를 보장받기가 어러웠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시 한번 애굽에서 행하였던 수법으로 역경을 해결하기로 하였습니다. 옛날에도 통했으니까,지금도 통할 것이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때 배웠던 따끔한 교훈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2절> 그릇된 습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만책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창 20장이 그의 간곡했던 중보 기도와 이삭의 출생 사건 사이에 기재된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영적인 신령한 중보기도를 드릴 수준이 되었다고 해서 유혹이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실수가 일단 정지되었다고 해서,다시 동일한 유혹의 함정에 안 빠진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지은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같은 유혹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이를 더 먹었으므로,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졌으므로, 영적 기도를 많이 하므로, 전도에 시간을 많이 쓰므로, 직분을 받았으므로, 죄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 후에 신령한 기도도 올렸고, 지혜도 제일 많았지만, 노년에 가서 형편 없이 타락해 버렸습니다. 노년에 우리도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아무리 신앙이 깊고 성숙해도 죄를 다 정복했다고 안심할 수 있는 교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사라를 외국 왕에게 감쪽같이 넘게 주었습니다. 더구나 내년 봄에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낳게 될 텐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의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에는,하나님께 간절한 중보 기도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쳤을 때에는 소돔의 유황불로부터 롯을 구할 수 있었던 하나님께 한 마디의 도움이나 인도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어제의 영적 정상이 오늘의 위기에서도 자동적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그의 신앙은 굴곡이 심하였습니다. 한 순간에는 정상을 향해서 힘차 게 나아가고 또 다른 순간에는 낭떠러지를 향해 돌진합니다.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올렸던 신령한 어제의 입을 오늘은 거짓의 입술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엡 4:25>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4절> 아브라함이 소돔성의 멸망 소식을 듣고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18:23>라고 항의한 말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은 소돔성의 사건을 통해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해준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런 데 우리는 아비멜렉에게 주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문답 속에서 죄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측면을 읽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사라가 남의 아내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진의를 인정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6절> 여기서 우리는 죄란 내 양심만 깨끗하다고 해서 성립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개인의 일방적인 입장만 생각한다면 아비멜렉이 설사 사라를 범했더라도 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주신 이 말씀은 아무리 모르고 저지르는 불찰이더라도 죄가 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었습니다. 죄는 객관적인 측면도 아울러 지니고 있습니다.주관적으로 볼 때 아비멜렉에게 불의가 없다 하더라도 사라가 남의 아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사항은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짓는다는 사실입니다.

본절에서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다는 말의 뜻은 인간의 죄가 자신이나 이웃을 대상으로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말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죄를 사해달라고 비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15:18> 라고 고백되어 있습니다. 요셉도 이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습니 다. 그래서 그의 주인의 부도덕한 아내가 던지는 유혹에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도 밧세바와의 간음사건 후에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삼하 12:13>라고 자백하였습니다. 우리의 죄는 어떤 종류의 것이라도 그 대상 여하를 불문 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두 하나님을 향해 짓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한다면 함부로 죄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11절> 아브라함은 그랄 사람들이 경외심이 없기 때문에 자기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기 목숨을 앗아갈 것이라고 지례 겁을 먹었습니다. 그는 전에도 똑같은 생각 을 하고 사라가 자기 아내라는 사실을 감추었습니다.<12:12> 두려움은 신앙의 결핍을 의미합니다. 두려움 속에서는 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소돔 사람들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경우 바르고 도덕적인 그랄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비록 아브라함처럼 자기 혼자만 선하고 남은 다 악하다는 식의 편견이나 영적 교만은 없는 자들입니다.

교인들은 흔히 세상 사람들을 완전히 썩었다고 간주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비멜렉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아비멜렉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교인들보다 오히려 훨씬 나은 모범적인 시민으로서 양심껏 사는 상당수의 불신자들이 소위 교인들이라는 사람의 의심스런 행위를 보고 의아해 하고있습니다. "교인들이 나쁜 짓을 더 하더라"는 말을 우리 귀로 들으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즉시 순종할 수 있는 아비멜렉들이 교회문을 두드리는데도 성도의 편견과 망동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사례가 어찌 한두 건이겠습니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지적한 '합당치 않은 일'이 내게서도 없어져야만 오늘의 아비멜렉에게 내가 비로소 복음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13절>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자신의 우행동기를 털어 놓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을 내려갈 때에 처음으로 사라에게 자기를 오라비로 칭하라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고향 땅에서 불러내신 때부터 그런 계획을 꾸며놓고 있었습니다.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13절> 아브라함과 사라가 지금까지 여러 번 하나님께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지 못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바로 이같은 부부 사이의 사전 협약이 믿음의 첫 발을 떼어 놓을 때부터 맺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의 생애 속에는 하나님께 다 내어 놓지 않은 한 구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구석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제한지역이었으므로 하나님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통제구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밀실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는 것이 밀실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서약은 밀봉시켰으므로 아무도 열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 밀실의 서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부부 당사자 사이의 약속이 아니더라도,하나님이 못들어 오고,못열어 보도록 닫아 놓은 한지역이 내 생애의 어느 한 구석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나의 밀실 이며,나의 밀봉된 서약입니다.내 생애에서 아직도 내가 주께 내어보이지 않고 밀폐시키고 차단시킨 제한지역이 있는 한 나는 아비멕렉의 면책을 들어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그런 수치스런 계기를 통해서 우리의 밀실을 열어 제치게 하십니다.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고 따져 물을 때가 우리에게 조만간 오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약속의 아들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 밀실의 문을 스스로 열어 보이고,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부찰이 있다고 고백하며,회개할 때까지는 약속의 아들은 무기한 연장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귀한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선물을 깨끗한 양심으로 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이삭을 받기엔 거리끼는 구석이 없습니까 오랜 세월 동안 그 부분 만을 자의로 처리해야 한다고 여기고 비밀 로 부쳐둔 밀실이 있다면 지금 주께 내놓아야 합니다. 그 밀폐된 나의 제한 지역은 축복의 걸림돌입니다. 하나님이 내 생애의 어느 구석이라도 통과할 수 있도록 나의 통제 구역을 해제시켜야 합니다. 내 묘극퓽수법으로 나는 애굽의 바로 왕이나 아비멜렉을 속여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17절>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는 우매한 존재입니다. 그만큼 교훈을 더디 깨우치고 자기 고집과 편견에서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참으심이 없으면 소망이 없는자들입니다.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은혜에 은혜를 더하시며 자기 자녀들을 그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인도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한 후에 내가 취하는 하나님께 대한 자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밀실이 공개되었다고 화를 내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 중보기도의 겸비한 자세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용기입니다. 하나님은 원한이나 앙심을 품고 자기 자녀들을 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동정하시며 격려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라 모든 일에 우리처럼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같은 실수를 또 저질렀더라도 회개하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히 4:16>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를 축복해 주신 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돌려 받았고,아비멜렉으로부터 거주지와 재물을 얻었으며 중보기도로서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했고,이삭을 꼭 낳게 될 것이라는 실례를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역경을 선용하여 그로 하여금 믿음의 걸음을 한 걸음 더 떼어 놓도록 격려해 주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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