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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중의 한사람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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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질병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암'은 많은 사람들이 걸리기도 하고 또한 치료하기도 힘든 병입니다. 통계를 보면, 세계적으로 매년 8백 7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암에 걸려 이 중 절반정도가 고귀한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매초 1백여명의 암환자가 생겨 이중 절반인 56명 정도가 죽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암과 함께 무서운 병으로 문둥병을 들 수가 있습니다.
문둥병(Leprosy)은 어떠한 병입니까 지금은 치료법이 많이 개발되어 조기에만 발견하면 불치의 병이 아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 번 걸리면 치료하기가 힘든 난치병이었습니다. 치료법이 많이 개발되었다고 해도 외형상으로 아주 흉한 흉터가 남게 되는 것이 문둥병이었습니다. 일단 이병에 걸렸다 하면 흉칙하고, 더러울 뿐만 아니라 전염의 우려로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도 이별을 해야 합니다. 더구나 이 병으로 인해 그 가문과 가족들에게 까지도 치명상을 줍니다.
성경에서는 나병을 하나님의 징계의 병으로 간주하기도 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병을 저주받은 병으로도 생각하였습니다. 실로 병중에는 무서운 병이요 인간 최대의 비극의 극치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의 외치는 소리는 처참한 인간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몹쓸병에 걸려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문전 걸식하며 온갖 멸시천대를 받아 가며 죽는 날까지 썩어 가는 몸을 이끌고 살아온 그들이었기에 주님을 찾는 그들의 목소리는 눈물의 간구요 애절한 피맺힌 절규였습니다. 그때에 그들의 심정으로는 자기들의 병만 고쳐 주시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며 머리를 밀어 신이라도 만들어 드릴 수 있으리라 결심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떠한 기쁨도 죽을 병에서 고침 받는 기쁨보다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열 사람이 깨끗이 고침을 받았는데 그 중에 한사람만이 주님께 돌아와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9대 1의 비율의 감사인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질문은 인간의 배은망덕을 탄식하시는 음성이요, 인간의 사악한 죄성을 탄식하시는 음성이며, 유대인들의 배반을 책망하시는 음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주님의 질문은 그들을 사랑하시는 연민의 애정을 토하시는 음성인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는 그들이 육신의 문둥병에서 고침 받는 것보다는 영적인 문둥병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다시 돌아온 그 한사람은 이방민족인 사마리아인이라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사실,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인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만나 그 지긋지긋한 문둥병에서 완전 해방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는 제일 먼저 예수님께 달려와서 그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1.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고침 받은 것에 대한 확실한 고백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나라의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내려가 일곱번 목욕을 합니다. 문둥병이 치료된 후에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가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이제 이스라엘 온 천하에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치료의 기적을 허락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위대하심을 이제야 알겠다는 고백입니다.
찬송가 405장 3절을 보면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라고 죤 뉴톤은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아온 것은, 우리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연도 아니요, 내 능력도 아니며 오직 주님의 은혜로된 것임을 확실히 믿어야 하겠습니다(고전15:10).
감사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깊이 깨닫는 사람은 감사하게 되고, 이것을 적게 깨닫는 사람은 적게 감사하게 됩니다.
데이비스는 루이지애나주 카르빌에 위치한 국립나병에 입원해 있는 나병환자이자 흑인 설교가였습니다. 그는 다리를 절고 눈이 멀었으며 외모는 보기에 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쾌활했으며,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또 그는 늘 찬양의 노래를 불렀으며, 동료 환자들에게 감동을 주곤 했습니다. 그가 하는 기도의 대부분은 감사기도였습니다.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구형 라디오 뿐이었으며 그것도 손을 쓸 수 없어서 입으로 켰다 껐다하는 데도 늘 감사하였습니다.
우리 처지가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열명의 문둥병자 모두 똑같이 비참한 생활을 하였고, 고침을 받았으며, 주님의 은혜도 똑같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사람만이 그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비록 육체의 문둥병은 걸리지 않았지만, 우리도 모두 다 죄값으로 영혼의 문둥병에 걸렸던 인생이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치료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2. 그 한사람의 감사는 순서를 혼동하지 않는 최우선의 감사입니다.
열사람이 깨끗함을 받았을 때에 그들은 여러 가지 혼동이 생겼습니다. 무엇이 제일 중요한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고 건강진단을 받는 일과 그 다음으로 그들의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에 빨리 가고 싶었습니다. 5년 혹은 10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오랫동안 정든 가정을 떠나 살았기 때문에 가족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1초가 아까웠을 것입니다.
자기들을 피하며 질시하던 이웃과 친구들에게 자기들의 건강한 피부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들의 속마음도 우리는 능히 읽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달랐겠습니까 다른 아홉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이라고 정든 고향과 그리운 가정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가장 먼저 우선 순위를 주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건강진단 받는 것도 중요하고 급한 일입니다. 지체없이 성한 몸, 건강한 몸으로 고향 땅에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과 만나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억제하고 주님 앞에 나오는 일, 예수님께 나와 감사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그는 순서를 알았던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 말씀은 우리에게 최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신앙으로 하나님께 독자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창22장). 사르밧 과부는 최우선 신앙으로 하나님의 종인 엘리야에게 최후의 양식을 드렸습니다(왕상 17장).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는 최우선 신앙으로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3. 그 한 사람의 감사는 행동으로 보여준 감사입니다.
열 사람이 병이 나았을 때에 아홉명이라고 왜 고마운 생각이야 없었겠습니까 당연히 사람이라면 감사한 생각과 고마운 마음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무엇입니까 마음에 있는 감사의 생각을 실천적인 행동으로 옮겨야만 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는 믿음과 행함이 연결이 됩니다.
마음의 신앙은 행동의 신앙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찾아온 사마리아인에게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어 보신 것은 "너 밖에는 행동으로 옮기는 자가 없구나. 그들은 생각뿐이었구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입으로 시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그쳐버릴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다"(약2:17)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랑이 참 사랑이 아니듯,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는 입으로, 말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홉은 어디로 갔느냐 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돌아온 '그 중의 한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가 본받아야 되는 모범 자입니다.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사마리아 사람에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굉장한 축복의 선언입니다. 특히, 사마리아인으로서는 생각도 못했던 놀라운 축복의 소득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육신의 문둥병에서 고침 받는 것보다 그의 영혼이 구원받은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감사치 못한 아홉명은 비록 육신의 병은 고쳤지만, 정말 중요한 영혼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얻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영혼의 문둥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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