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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이아몬드인가, 돌멩인가? (고전 0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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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유능한 사람을 찾습니다. 회사와 가정, 심지어 교회까지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유능한 몇 명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능한 사람은 서있을 곳을 일고 있습니다. IMF 때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대부분 직장에서 소용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고액 봉급자이든, 무능한 사람이든.... 그 가치가 살아진 사람들이 직장을 잃은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유능한 사람을 찾습니다.

사단과 세상은 사람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가치를 상실하면 포기하고, 버립니다. 요즘은 영원한 상사와 보호자가 없습니다. 나라와 나라를 보십시오.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습니다. 가치가 있으면 합치고, 가치가 상실되면 버립니다. 철저히 이용 가치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나쁜 짓을 하는 학생들을 보십시오. 사회에서 왕따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럼 하나님 나라는 어떤 사람으로 이뤄질까요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무엇입니까 그곳 역시 유능한 몇 명에 의해서 운영될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신다면 혼자서 이 일을 감당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혼자하는 것이 연약한 우리들을 통해서 하시는 것보다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할까요 오히려 우리들은 그 나라에 장애가 되는 존재들은 아닐까요 어찌 보면 하나님은 혼자서 일하시는 것을 포기하신 분 같습니다. 가능한 연약한 우리들을 통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고 계십니까 누구를 통해서 일하십니까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세상처럼 유능한 사람, 모든 사람 가운데 당연 드러나는 사람, 다이아몬드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무능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조약돌 같은 우리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조약돌을 불러서 높이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이렇게 일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능력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능해도 부모는 자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수용하고, 용납합니다. 그리고 유능한 존재로 만들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디슨을 생각해 보십시오. 학교에서 포기한 에디슨. 그러나 에디슨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알맞은 학습 과정을 통해서 그를 세계적은 발명가를 만들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을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기독교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중의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까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 때문입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어거스틴을 포기하지 않고 끝임 없이 기도한 모니카. 이것이 부모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은 포기하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관계 안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26절에 바울은 "인간적으로 볼 때 여러분 가운데는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았고 유능한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고 우리의 현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스스로 나는 유능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 철저히 의존된 사람입니다. 자기의 지혜가 너무 높아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을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를 때 자기의 지혜를 포기하고, '저는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고 고백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당장 드러나길 바랍니다. 그래서 가치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마치 사회에서 부속처럼 가치에 의해서 교차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회의 구성원이 관계에 의해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가치에 의해서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니 필요 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라도 '바이 바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계를 주목하고 계심을 기억합시다.

위대한 모세를 만드신 하나님을 주목합시다.

모세는 처음부터 유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태어날 때 갓난아이였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모세가 자기들을 구원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씨로 모세를 보냈지만 아무도 모세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두 돌아보지 않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약정하셨습니다.

모세가 장성했습니다. 세상에서 유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왕궁에서 지혜와 지략을 배웠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힘으로 애굽 사람을 쳐죽인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도망자의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때가 되었다, 내가 이렇게 유능한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가 장인의 양이나 치는 자로 살기 원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 하나님은 은혜를 허락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모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애굽의 학식과, 지식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길 기대하지 않을 때입니다.

다윗을 부르신 하나님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아비인 이새마저 기대할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와서 아들을 부를 때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앞에 오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모든 형들을 제치고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언제입니까 다윗이 유능할 때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심지어 부모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할 때입니다.

또 골리앗과 싸움을 할 때 그는 연약한 자였다.

싸움에 능한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미 싸움의 결과는 낫습니다.

누구의 승리를 예측했을까요 그런데 다윗이 이겼습니다. 이것을 통해 드러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무능하고,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기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혼인 잔치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왕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일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이 진노합니다. 그래서 앞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진멸을 당합니다. 그리고 왕은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왕은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마 22:9)고 말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초대받기에 합당한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초대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왔습니다.

여기서 예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복은 잔치에 참석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어떤 요소라고 여겨집니다.

그럼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부름을 받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이 계시는 것과 또 그분을 진정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에게 세상의 기준을 통해서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에스겔13:15-16 "담과 그 담을 회칠한 자들에게 내가 분노를 쏟고 또 내가 너희에게 담도 없어지고 그 담을 회칠한 자들도 없어졌다고 말할 것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고 평안이 없는데도 평안의 환상을 본다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다."고 여호와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는 것을 가르치면 거짓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혹 거짓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기준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세상의 가치 기준과 판단은 하나님 나라와 대적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세상에 편승하여 자녀들을 이렇게 성장시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다시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까 그 나라도 유능한 몇 명이 아닙니다.

연약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십자가란 방법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십니까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된 사람만 구원하기 위해서다. 그 당시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저주의 상징이요, 헬라인에게 어리석음의 상징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십자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도저히 이것일수 없다고 느끼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전도의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지금도 구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심에 우리의 가치를 기준으로 부르지 아니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외적이 어떤 것을 기준으로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철저히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주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좌절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연약하기 때문에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능력있는 사도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문제를 위해서 세 번 간구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라는 응답을 받습니다.

그때 바울은 기쁨을 금치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약할 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 능력 때문에 낙심하지 맙시다. 자신의 처지 때문에 좌절하지 맙시다.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유의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이아몬드인가 돌멩이인가 이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이아몬드가 아닌 돌멩이를 사용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런 돌멩이,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지 못하는 그런 돌멩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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