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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의 복음 (눅 02: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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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가 시작된 후 약 천여년 동안은 대림절은 그리스도 오심에 대한 다만 순수한 대 망의 뜻에서 기쁨으로 지켜왔다. 그런데 12세기 경부터 그리스도의 대림이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즉 그리스도의 대림은 과거에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역사적 사건으 로 이해하고 현재에서는 신자들의 마음에 은혜로 찾아 오시는 사건으로 이해하고 마지막 심 판날에는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사건으로 해석하게 된다. 대림절기에 참회를 하고 신앙적인 새결단을 하게하는 풍습이 생긴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우리는 대림 을 이와같은 3중적인 의미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신앙의 정서와 삶의 현 장에는 추수감사절이 끝나고 시작되는 대림절 초반부터 모든 것이 상업화되고 사회는 이로 인하여 크게 상혼을 불러 일으켜 장사소득의 방법으로 취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케롤과 장 식품들로 요란해진다. 오늘날은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부터 벌써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유혹 들이 우리의 현실이기에 정작 기쁨의 최고의 구주탄일의 참된 의미는 정령 크리스마스날에 는 무의미하게 되고 허탈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대림절의 의미 찾기는 뜻있는 일이라 생각 한다. 한마디로 대림절의 그 뜻을 헤아려 본다면 "그리스도가 오셨고, 오시고 있고, 오실 것 이다"라는 대림절 메시지에 모두 담겨져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대강절을 지키는 의미는 이미 2천년 전에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그 리스도의 구주탄일을 회상하면서 또다시 우리들의 마음속에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해 주실 것을 기다리며 또한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고 있는 불신의 세계와 역사 속에 임재해 주실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그리고 앞으로 마지막 때에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계절로 지키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감격과 기쁨이다. 말구 유 같은 우리의 더러운 마음에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구주성탄절은 사망과 어두운 그늘 밑에 앉아있던 우리들에게 빛을 비춰 주시고 찾아오신 주님으로 인하여 벅찬 가슴으로 살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계절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뜻을 깨닫고 어려운 이 시대를 용기와 기쁨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메시지를 선포하는 계절이다. 말씀의 선포뿐 만 아니라 말씀이 성육신 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눈길을 소외된 자들에게 돌리고 아직도 어 두움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하는 계절 이 되어야 한다.

처음오신 그리스도는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 나 이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만난 그리스도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초림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로 오셨으나 재림의 그리스도는 심판의 주로 오시게 된다. 초 림의 주님의 초라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주의 당당한 모습을 말씀 하고 있다. 재림하실 주님은 심판이 주 업무임을 말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래 인간들은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안과 불신 그리고 불 확실성이라는 삼불(三不)의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고통과 사망으로부 터 해탈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해 왔다. 다시 말하면 에덴동산으로의 복귀, 즉 하나님께 나가기를 희구해 온 것이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희구와 노력이 바로 종교의 형태를 지니고 나타났고 갖가지의 종교가 이 땅에 발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불 안의 시대'라는 것을 핵문제를 세계의 문제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 지 못할 것이다. 폴틸리히(P. Tillich)는 '존재의 불안, 양심의 불안, 죽음의 불안'이 그것이 며 더욱이 종말의 때가 가깝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다고 했다. 인구의 폭발, 환경의 오염, 자 원의 고갈, 그리고 핵무기의 공포에 위협을 느낀 과학자들을 비롯해서 현대 지성인들이 '앞 으로 100년을 존속하기 어려우리라'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갖는다. 그래서 EC당국은 이에 '아이는 둘만 낳고, 기술대신에 예술을 숭상하고, 개발 대신에 자원을 아끼고, 그리고 난 다음 역사의 종말을 잊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기쁨에 즐겁게 찬송 부르면서 기다린 두 노인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시므온이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게 메시야가 올 때까지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인물이다. 또 한 사람의 노인은 안나이다. 그는 결혼 한지 7년만에 과부 가 되어 84년 동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 고 기뻐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가 예수를 영 접한 사람들이다. 오늘의 신앙인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림으로 일관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들간의 약속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는 약속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말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에 더욱 초 점을 둔 것이다. 등불을 밝히고 기다리는 신앙을 성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미가 등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2000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푸대접 하고 말았다. 정녕 그가 이 땅위에 오셨는데 그를 마구간에 모시게 된 푸대접은 기다림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만민을 구원할 구주로 오신 예수와 죄인을 불러 친구로 삼아 죄 사함 받게 하시고 섬기는 종으로 고요하게 오시는 예수를 그들은 기대밖에 두고 있었기에 구주 오심의 의미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구약 역사 전체는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역사이다. 그 약속이나 예언이 모두 예수의 오 심을 두고 한 말이다. 약속은 기다림이고 구주탄일은 오심이며 예언은 기다림이고 허락은 오심이며 율법은 기다림이고 복음은 오심이다.

기독교 역사의 처음 2세기 동안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특별한 축제로서 알려진 것이 없었 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 확장시기에 교회의 강조 점을 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12월 25일이 축제일로 받아들여지고 확정된 것은 4세기경이다. 2천년의 세기말 에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의 의미를 새기며,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하여 주실 것을 기다리며,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 부하고 있는 불신의 세계와 역사 속에 임재하여 주실 '좋은 소식'의 메시지를 증거 하는 것 은 오늘의 선교의 사명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나심을 '좋은 소식'으로 알고 고백하는 삶의 현장이 되기를 간구 하는 마음으로 대림절을 맞이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그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적인 지위에 대한 압도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량없는 구원의 축복이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 는 값없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그 분이 그 백성들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비밀 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에 구원을 가져다준다. 즉 그것은 하나님 이 죄인을 구원하시고 불 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은혜스러운 구원의 행위인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 준다. 의인 즉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스럽고 거져 주 시는 사면을 강조하는 것이 특히 바울의 복음 메시지에 나타난 특징이다. 복음은 그리스도 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된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화해를 이루셨고 평화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려 오셨기 때문이다.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복음의 시작'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전체 사역이 평화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를 세상에 보내시어 성령 의 능력을 힘입어 온 세계에 평화와 화해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우선 적인 존재 이유는 이 좋은 소식을 증거 하는 것이다.

이제 대강절의 메시지는 예언의 성취와 준비와 기다림에 초점을 맞추고 재림을 대망 하는 자에게 회개와 참회를 강조한다. 이것은 새 천년의 대림절을 지키는 자리에 초대교회가 사 순절과 함께 참회의 절기로 지키면서 복음의 증인 사역 의미를 새 천년의 교회가 다시 구현 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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