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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그루의 나무 (창 0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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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도덕성임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이 인간되는 것은 동물과 다른 도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에서 도덕이 상실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숱하게 일어나는 각종 사기 사건이나 폭력 사건, 권력층의 비리와 정치인들의 몰 염치, 사기꾼들의 이윤 남기기에 급급한 상술 따위는 인간이 인간 됨을 포기하고 있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에덴 동산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를 언급합니다. 우 리는 이 말씀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도덕성의 문제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 선택의 자유와 책임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도 있더라.

두 그루의 나무는 서로 반대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나무를 향하여 나아갈 수도 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향해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고대 가나안 문서에도 이와 비슷 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또 하나는 죽음의 나무이다.

가나안의 문화 유적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표현 대신 죽음의 나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이 죽음의 나 무라고 기록하지 않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한 까닭은 아마도 선과 악의 대조를 이 나무를 통해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 기자는 하나님의 기대에 못 미치고 실패해 버린 인간의 도덕 수준 때문에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 다는 메시지를 이 나무를 통해서 전달하려고 한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과 죽음의 선택에 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신명기 30장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 하여 생명을 택하고.

인간이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씀은 성경 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 있던 두 그루의 나무 는 20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날마다 부딪치고 있음을 깨달아 야 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 젊은이 두 사람이 타락하기로 작정하고 도박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도 박장 바로 옆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도박장으로 들어가던 두 청년 중 한 청년이 교회 입구에 게시된 설교 제목을 보았습니다. 거 기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는 말씀이 써 있었습니다. 불현듯 그의 마음에 죄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도박장에 가지 말고 교회에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 이 『한번 결심한 대로 해야지 무슨 소리야』라며 친구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은 도박장에 가고, 한 사람은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청년은 그날 밤 선포된 말 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 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회심(回心)한 이 청년은 그때부터 30년이 지난 뒤 미국의 대통 령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미국의 유명한 클리브랜드 대통 령입니다. 클리브랜드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그 순간에, 30년 전 도박장을 선택했던 사람은 감옥에서 친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면서 한 순 간의 선택이 얼마나 그들의 삶을 다르게 만들었는가를 절감했다고 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 문구가 있습니다. 상 품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할 정도이지만 우리 인생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영원이 좌우됩니다. 클리브랜드 대통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을 선택 해야 하는 갈등 상황에 끊임없이 부딪칩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대로 올바른 도덕의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그루의 나무는 인간이 도덕 선택의 자유와 책임을 진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덕적 실패에 대한 경고

우리가 도덕적으로 실패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살펴봅시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초점은 인간에게 금지된 일이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무, 저 나무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인간에 게 주어진 고귀한 자유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두 그루 의 나무가 보여 준 인간의 자유,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한계가 있는 자유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방종이 아니 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누리면서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금 지 사항을 지키지 아니할 때 우리는 정녕(surely) 죽으리 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 말씀은 도덕 생활에 실 패한 인간에게 내린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도스도예프스키는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을 통해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을 잃을 까봐 죽음을 두려워한다. 또는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식들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죽음을 두 려워한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우리 모두가 숨기고 있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도덕적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 리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살므로써 주님 앞에 범죄한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책임져야 합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에서 죽음은 비단 육체의 죽음만을 의미하 지는 않습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 매를 먹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죄를 지은 뒤 바로 죽지 않았습 니다. 그들은 저주를 받고 나서도 수백 년을 더 살았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은 영혼이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뜻합니다. 죄를 지은 순간부터 아 담의 삶은 하나님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영혼이 안식할 곳을 잃어 버린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왜 사 는가를 고민하고 불안해 하며 삽니다.

인간의 삶이 이렇듯 불안과 방황을 거듭하는 것은 죄 문제 때문입 니다. 도덕 생활에 실패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짓는 죄는 우리의 불안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이 끝없는 불안과 방황 때문에 우리는 별수 없이 목표 없는 삶을 살고 있습 니다.

목숨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 을 떠난 삶, 하나님과 단절된 삶이 그렇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는 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 생활에 실패한 결과입니다.

구원의 모형

에덴 동산 중앙에 있던 두 그루의 나무는 도덕 생활의 실패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3장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 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인간은 죄를 지은 대가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들이 동 산에서 쫓겨난 뒤에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 버리셨 습니다. 우리가 다시 그 생명나무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때가 언 제이겠습니까?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풍성한 생명을 즐기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본래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때가 언제이겠습 니까? 요한계시록 22장에 이 생명나무의 길이 열리는 장면이 나 옵니다. 수정같이 맑은 길, 생명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의 열매 가 있고, 그 열매를 따먹고, 우리가 영원히 회복된 낙원에 거하 는 모습이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죽음의 나무는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저주 를 내렸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에 기인한 잘못된 선택이 죽음의 형 벌을 지게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지어 추방된 인류를 위해 또 하나의 나무를 준비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제 3의 나무」(the thir d tree)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나무가 무엇인지 베드로전 서 2장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 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義)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제 3의 나무는 십자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때문에 죽 을 수밖에 없는 인류,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혀 버린 인류를 위해 하나님은 이 땅에 십자가 나무를 세우셨습니다. 십자가 나무 아래 있는 자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그분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얻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십자가는 비단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용서하는 근거가 되었음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부활하신 그분을 통해 죄를 용서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놀라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죄인 된 인류는 오직 십자가 아래서 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얻어 바르게 사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도덕이 땅에 떨어진 이 사회에서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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