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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남의 축복 (눅 1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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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정에서 부모님이 늘 같이 계실 때 보다 며칠간 멀리 떠나셨다가 돌아오시면 더 반갑고, 감격스럽고, 더욱 친근감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아마 제가 이 곳을 떠나고 한참 후에 다른 곳에서 만났을 때 더욱 반갑고 친근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만남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하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사람 잘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인덕이 있다 인덕이 없다'는 말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사람을 잘 만나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을 잘못 만나 실패하고 불행해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만남이 중요하고, 만남이 축복이어야 됩니다.
사람이 이사할 때 이웃을 잘 만나야 됩니다. 아무리 집이 크고 훌륭해도 이웃을 잘못 만나면 즐겁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 아니겠습니까 학생은 학교를 잘 만나야 됩니다. 그래서 좋은 학군을 따라서 이사하게 되고, 좋은 교사를 만나게 하려고 극성을 피웁니다. 학교를 잘 만나고 교사를 잘 만나야 되기 때문입니다. 또 결혼할 때에도 배우자를 잘 만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고르고, 고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선보기를 100번했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결과는 신통치가 않습니다. 아마도 만남의 축복이 없었던게 아닌가 하고 짐작이 됩니다. 사람이 사업을 하려고 할 때에도 좋은 협조자를 만나야 됩니다.
과연 사회라는 것은 만남의 관계입니다. 만남이 잘 되면 행복하게 되고 만남이 잘못되면 불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옛날 저 애굽의 바로 왕이 요셉과 같은 좋은 인재를 만났기 때문에 7년 동안 극심한 흉년 중에도 그 백성들을 잘 먹이고 살려냈습니다. 만일에 요셉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바로가 그 백성을 어떻게 다스렸겠습니까 아마 크게 파탄에 빠지고, 처참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같이 어질고, 자기를 받아주고, 아껴주고, 그래서 자기를 등용하는 슬기로운 왕을 만났기에 요셉이 자기의 모든 재능을 발휘하여 크게 공헌하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비상한 능력과 지혜를 가졌으면서도 때를 잘못 만나고, 사람을 잘못 만나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인물도 많고, 기구하게 희생된 불운아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마다 사람 잘 만나려고 애를 씁니다. 학생은 선생님을 잘 만나고, 선생님은 학생을 잘 만나야 마음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또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기업주는 직원을, 직원은 주인을 잘 만나야 됩니다. 한 걸음 나아가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목사를 잘 만나야 되고, 목사님도 교회를 잘 만나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될 줄로 압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반드시 만나고 싶어하는 좋은 사람들만을 만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여리고로 내려가던 나그네처럼 만나서 안될 사람을 만나게 되고 치명적인 피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어릴 때보니까 부모를 잘못 만나서 자기 딸을 정신대에 팔아 넘기고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을 봤습니다. 해방 후에 그 딸이 돌아왔지만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봤습니다. 부모를 잘못 만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어떻게 딸을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가하면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일생을 눈물로 보내는 사람도 봤습니다. 종업원을 잘못 만나서 사업이 파산되고 부도를 내는 경우도 봤습니다. 주인을 잘못 만났기 때문에 수년동안 온갖 착취를 다 당하고 마지막에 빈 손으로 쫓겨나는 경우도 봤습니다. 위정자를 잘못 만났기 때문에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남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이 여리고 도상의 강도 만난 자를 보십시요. 참 원통하기 짝이 없습니다.
잘못된 것도 없는데 가진 것 다 빼앗기고 매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서럽고 답답했겠습니까 절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음 직전에서 그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상처를 싸매어 주고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까지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돌보아 주고 자신의 길이 바쁘니까 자기가 가진 데나리온 여비를 주어서 여관 주인에게 부탁을 합니다. 잘 치료해 주고 만약에 부비가 모자라면 내가 돌아올 때 갚겠노라고 말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중간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주막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50년대만 해도 거기에는 가끔씩 강도가 나타나서 강탈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외국 선교사를 통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험한 길입니다.
이 사람은 참 불행 중에 다행입니다.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나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강도와 같은 마귀에게 피해를 입은 피해자입니다.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다 빼앗겨버리고 깊은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며 고통하는 우리 인생들입니다.
이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되고, 구원 얻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축복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여러분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찾아 주시지 아니하시고, 나를 만나주시지 아니했더라면 오늘의 내 운명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말입니다. 여리고 도상의 나그네처럼 만나서는 안될 강도를 만나서 상처입고 괴로워하며 불행에 처한 사람들, 탄식하는 사람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됩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부모 잘 만나고, 선생 잘 만나고, 배우자를 잘 만나고, 또 주인을 잘 만나고, 이웃을 잘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가 예수 만나지 못하면 나의 만남은 실패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를 꼭 만나야 됩니다. 우리는 기어코 우리 생애에 있어서 예수를 만나야 됩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이 땅에서 영적으로 예수를 만나지 못한다면 이 다음에 심판주로 만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만난 사람이라야 사람과도 바로 만나지게 됩니다. 눅19장에 나오는 삭개오를 보십시요.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세리로서 착취자로 남의 것을 토색해 왔지만 예수 만난 다음에 자선가로 재산의 절반을 뚝 잘라서 가난한 자를 위해서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만나고 나면 그 생애가 바뀝니다. 변화가 나타납니다. 가치관이 변합니다. 그리고 예수 만나는 것은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그 만남이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매일같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앞에 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새롭게 되어져야 됩니다. 이런 사람은 생활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삭개오처럼 말입니다.
고후5: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 것으로 지음 받아 변화된 새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먼저 내 편에서 좋은 사람이 되어 즉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좋은 아내를 바라는 남편은 먼저 자기가 좋은 남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좋은 남편 만나기를 바라는 분은 먼저 내가 좋은 아내가 되어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좋은 종업원을 원하는 사업가는 내가 먼저 좋은 사장이 되어야 되고, 내가 먼저 변화를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다 좋은 이웃을 만나기를 바라는 것보다 각자 내 편에서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 상대방을 만나 주도록 해야 된단 말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내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됩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 나는 잘못 만났다 그렇게 생각이 드시는 분이 계십니까
제 친구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밤낮 그 사모님을 잘못 만났다고 툴툴댑니다. 저보고 하는 말이 "이 목사는 사모님이 미인이라 좋겠다" 사실 우리 집사람 미인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매일 투정을 부립니다. 음식을 해도 투정과 불만이 많습니다. 한번은 그 사모님이 김치를 담가서 목사님 상에 올려놓으면서 "오늘 이 김치는 이웃의 아무개 집사님이 담은 겁니다" 그러니까 맛있게 먹으면서 김치 맛은 이래야 된다고 칭찬을 하며 드셨습니다.
그 후에 사모님께서 "내가 담갔소" 하니 "글세 맛이 좀 씁쓸하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지냅니까 자긴 뭐 잘났다고... 이중에 혹 그런 분이 계시면 오늘부터 회개 하십시요.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서 상대방을 만나 주도록 내가 변화를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들 어떤 사람은 내 불행은 바로 너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다 내 탓이 아니고, 네 탓이다. 그렇게 몰아세우는 분도 봤습니다. 우리가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가해자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괴로움을 당하고 나 때문에 혹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나로 인하여 직장이나 가정이 눈물짓는 일이 없는가 우리가 스스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가정의 호주로서 아내를 괴롭히지는 않았는가, 주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남편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가 나 때문에 내 자녀들이 괴로워하고, 나 때문에 부모님이 눈물짓게 하고, 그렇게 내가 가해자가 아니었는지 우리가 먼저 그 입장에서 자기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 불행은 너 때문이라는 비겁한 생각을 버리고 내가 못났기 때문에,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우리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없는지 우리는 한 번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새 사람이 되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서 상대방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좋은 상대를 만났기 때문에 내게 복이 있음을 자랑하기 보다 나를 만난 것 때문에 상대방이 행복해하고, 인덕 있음을 자랑하게 된다면 만남의 자리가 바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좋은 편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병원에 입원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창 밖을 내다보니까 보리밭에서 열심히 보리를 밟고 있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바로 그 병원의 원장입니다.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예요. 그는 철학자요, 또 신학자요, 음악 박사요, 목사요, 의사입니다. 이런 어른이 아침부터 계속해서 보리밭에서 보리를 밟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물어봤습니다. "왜 이런 궂은 일을 사서 하십니까 왜 이런 어려운 아프리카에 오셔서 이 고생을 하고 계십니까 선생님은 얼마든지 좋은 조건에서 좋게 지낼 수 있는 분인데..." 그 때 그 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말로는 누구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에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로는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말로는 감동시킬 수 없기에 내가 몸소 행동으로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사랑이요, 이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우리 중에는 학교에 책임을 맡은 분들도 계시고, 교사들도 많이 계시고, 지도층도 많이 계신 줄로 압니다. 말로는 감동이 안되요. 우리가 말로는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성경말씀 37절에 보면은 "가서 너희도 그대로 행하라"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상대방을 만나 주어서 나로 인하여 상대방이 좋은 만남으로 행복해 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말이 아니고, 행동입니다. 실천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이웃에 , 혹은 내 직장이나 학교에서 우리의 행동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을 통하여 상대방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 준다면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일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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