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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른 믿음과 건강한 삶 (딤전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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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복잡한 삶의 조건하에서 우리들이 고민과 염려와 걱정에 잠못자고, 입맛을 잃고, 삶의 활기를 잃어버리고, 일할 의욕이 떨어지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삶에 문제들이 더 많은 고통을 안기어 줄 때에 우리가 만사에 기도할 수 있다면,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다면, 성령충만하여 믿음으로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상당히 다르게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염려한다고 키를 한 치를 더 자라게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과 염려 대신에 기도할 수 있다면, 감사와 생활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건강한 믿음(바른 믿음)은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바을 사도가 "믿음의 아들"이라 일컫던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에 일어나고 있었던 문제들에는 영적건강을 해치는 요소들이 있었다.
바울은 이런 영적상태를 정확히 진단해 주면서 건강한 삶을 위해 바른 믿음을 소유할 것을 말씀하셨다. 또한 오늘의 바른 믿음을 소유할 것을 말씀하셨다.
오늘의 이 본문에서 우리들의 건강한 삶(축복된 삶)을 위한 바른 믿음을 충만히 얻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을 해치는 병적요소는 율법적인 신앙생활이었다.
바울은 목회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다른 교훈 즉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대한 말들이라고 했다. 그는 헛된 말(공허한 말)의 반복이나 변론을 일으키며 똑똑한 척하면서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는 경향을 철저히 배제한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들 가운데 첫번째 현상이 바을 사도의 선교사역에 있어서 계속된 율법주의자들의 도전이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율법에 얽매여 스스로 죄책감 속에 눌려 있으면서도 율법대로 살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가르치는 자까지도 자기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남에게 강요하거나, 모든 사람들을 율법이라고 하는 척도로 정죄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종교가 죄에서 해방시키거나 경건한 삶에로의 희망이나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커다란 멍에를 지우므로 고통을 주는 것으로 작용하였다. 왜냐하면 스스로 율법의 선생노릇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은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끝없이 도전해 왔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마가복음 1장 21-28절은 가버나움에서의 예수의 사역을 나타내는데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심을 증언하고 있다. 22절은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말하고 있다. 그 다음 구절들은 더러운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다. 27절에서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에게 명한 즉 순종하는도다"고 경이감을 표한다.
그 다음 28절은 예수의 소문이 이렇게 온 갈릴리 지방으로 퍼져나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소식인가 !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하시고 마태복음 11장 28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면서 위대한 해방의 선언을 하셨다.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를 "율법에로의 노예화"시키는 율법의 종교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선언하는 은혜의 종교로 탈바꿈시키신 것이다.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의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예수 앞에 나온 자들은 이 모든 율법의 멍에를 풀어 놓아야 한다. 찬송가 455장은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라는 가사내용을 가지고 우리들에게서 애창되고 있다.
바울 사도는 감히 베드로를 향해서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갈 2:14)라고 책망했으며 또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라고 말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을 해치는 병적요소는 사변적인 신앙생활이다.
이것은 당시 헬라인들의 철학적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생겨났다. 영지주의는 극히 사변적이었다.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딤전 6:20)을 일으켰다. 소박한 믿음보다 사변적인 이론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
바울은 "망령되고 헛된 말-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일으켜 다툼을 일으키고 삶의 변화는 없으면서 지적인 사변에 뿌리 박혀 교만하고 남을 얕잡아 보는 따위의 귀족 취미를 일삼는 자들을 삼가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9장 1-41절에서는 예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 나온다. 제자들은 누구의 죄 때문에 이런 고통이 있는 것인가를 예수께 묻는다. 고통스런 사람을 앞에 놓고 죄에 대한 책임론으로 왈가왈부하는 것도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안된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이 일을 했으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면 죄인으로서 이런 표적을 어떻게 행할 수 있나 이들은 자기들끼리 논쟁하게 된다. 그들은 고침받은 그 사람을 불러서 질문한다. 그의 대답은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니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나이다"라는 것일 뿐이었다. 도대체 그 고통이 어디로부터 왔느냐 예수가 죄인이냐 아니냐하는 따위의 논쟁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변적인 말에 능통한 사람들 !
키에르케골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사람들이 사상이라고 하는 거대한 궁궐을 짓고, 생활은 그 궁궐 문간의 오막살이에서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 !
우리들의 신앙이 이런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혹시나 은혜받고 열심히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은근히 비웃으면서(교만하게) 언젠가는 당신도 별수 없을거야 ! 나도 옛날에 다 그랬어 ! 라고 우리가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1970년 6윌에 고등학교 졸업반으로 회사에 취직을 해서 다니는데 입사선배 가운데서 부산중고 나온 분이 있는데 "나도 옛날에 은혜 체험했어 방언도 했지 ! 그런데 사회생활하려면 어쩔수 없어 !"라고 말하면서 회사생활 때문에 맘껏 신앙생활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나에게 그렇게 위로하려고 했다.
생각해 보자 !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얘긴가 우리의 신앙이 건강해지려면 이 사변적 신앙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논리정연한 신앙적 이론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셋째, 건강한 신앙으로 건강한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1. 건강한 믿음은 거짓이 없는 믿음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신앙이다. 말씀을 말씀으로 인정하는 신앙이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인정하는 신앙이다. 누가복음 18장 9-14절의 바리새인과 세리 가운데서 세리의 신앙이다. 창세기 37-50장의 요셉의 신앙이다.
사람의 눈가림만 하는 자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으로 사는 자는 이러한 신앙의 소유자이다. 죄를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안 짓고 사는 생활이고, 하나님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삶이 아니라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담대히 사는 생활이다.
얼마나 다른가 오! 얼마나 놀라운 삶인가(oh! Wonder-rul Life)

2. 건강한 삶은 사랑 때문에 사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삶 자체가 "사랑"이 동기가 된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 것이다"(갈 2:20)고 말했다.
그래서 감옥 속에서까지도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이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고 건강한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왜 사느냐는 실존적인 질문에 대하여 날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담대히 답한다.
요한일서 4장 10-11절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은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사랑함의 정당성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준다,

3. 건강한 믿음에서 비롯된 건강한 삶은 청결한 마음으로 산다.
청결한 마음은 순수한 마음, 깨끗한 마음, 정직한 마음, 불순물이 없는 마음이다. "처음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 두 번째 마음은 인간의 마음, 세번째 마음은 마귀가 주는 것이다.
욥은 신앙생활에서 "신앙의 순전함"을 지켰다. 사탄이 공격한 것은 바로 "순전함"의 의미였다. 적당히 타협하며, 세상과 짝하며 사는 생활 말이다.
네가 무슨 전도사냐 목사냐 그렇게까지 살 필요가 있느냐 "누구누구를 봐라. 그도 별수 없는데"라고 세상은 유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순수한 것을 지배하신다.
다니엘의 믿음은 청결한 믿음의 모범이 된다(단 1장).
①"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니라“(단 1:8)
②“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은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③"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은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문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4. 건강한 삶은 선한 양심으로 산다.
슈네이데시스는 올바른 양심은 자기 자신과 아는 사이이므로 다른 사람이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앞에서 떳떳한 삶이다라고 말한다. 위에서 열거한 네 가지의 생활의 상은 건강한 신앙-건강한 삶을 가능케 하는 척도가 된다. 건강한 믿음 안에서 건강한 삶을 이어나가는 안산 광림 교회에 속한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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