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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과 함께한 사명자들 (행 17:5-7)

첨부 1


① 좋은 집은 설계도에서 시작된다. 또한 좋은 작품도 좋은 구상으로 부 터 시작이 된다.
② 이 처럼 인생도 좋은 구상과 좋은 꿈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 다.
이것을 철학이라고 한다. 비젼이 없는 백성, 묵시가 없는 사람은 방자 해지고 방탕해 지는데 이는 기필코 도달해야할 목표 지점이 없이되는 대로 살기 때문이다.
③ 기도는 왜 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나무를 그리기 전에 숲을 그 려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먼저 구도를 잡 고 밑칠부터 해야 하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④ 우리의 기도는 매일의 일용할 양식(영어로 our daily bread)도 구해 야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인 어떻게 살며 무엇을 위해 살 것이냐를 기도한뒤에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 기도는 매일의 일용 할 양식만을 구한 채 우리의 먼 미래의 꿈과 비젼에 대한 기도는 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취급을 받고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응답이 있겠는가.
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하여 구하고 기도하면 오히려 지엽적인 문제는 그냥 해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렇다 면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겠다는 것에 더 많은 비중을 두 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바울의 꿈
①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소개되어진 대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자 들’의 괴수였다.(행 17:6)
그때 당시의 헬라 세계, 로마가 장악하고 있던 3개 대륙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를 온통 어지럽게 하고 시끄럽게 만들고 급기야 그의 사후 250년이 지난 후에는 어지럽게 하는데서 천하를 장악하게 되는 종교의 지도자로 나타나게 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그가 예수를 소개하는 자로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소개되어진 곳에서는 예수보다도 훨씬 더 많이 언급되어 지는 사람 ,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인가
② 2세기경 기록된 바울과 데크라의 행적이라는 외경의 기록에 의하면 “대머리에 흰 다리, 눈썹은 서로 맞닿고 코는 매부리에 단신의 다부진 체구”를 가진 호감에 찬 사나이, 그는 인간의 모습에 천사의 얼굴을 가진자다..“ 라고 소개 되어 있다.
F.F브르스라는 신학자는 그를 “친구를 잘 사귀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바울과 함께 한 사람들의 이름이 신약 성경에서 약 70명 정도가 나오는 데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친구들까지 합 한다면 그는 훨씬더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또한 비그리스도인과 우정을 맺는데도 은사가 있었던 것이다. 에베소의 관원들(행 19:31)이나 백부장 율리오(행 27:3, 43) 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사실은 바울 곁의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사랑하든지 아니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배척하는 사람들로 양분되어 있어서 중립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전혀 볼 수 도 없는 사실이 그것이다.
③ 그는 로마의 중요한 30여개 도시를 종횡무진 다녔고 약 50년동안 1만 5000여 km가되는 거리를 전도하면서 다녔던 사람이었다. 집도, 전답도, 그의 소유라곤 그야말로 하나도 없이 일평생을 무일푼으로 살았던 그가 최후에 맞이한 것은 로마의 감옥과 단두대의 죽음이었다.
그가 꾸었던 꿈은 도대체 무엇이었기에 그는 어떤 인생의 설계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3. 바울의 과거
① 그는 바리새인이었다. 물론 그의 부친도 바리새인이었다.(행 23:6)
②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행 22:25028)
③ 베냐민지파로 다소에서 출생하였다.(행 22:3)
④ 가말리엣 문하에서 공부하였고(행 22:3) 또한 랍비들이 그러하듯 장막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행 18:3)
⑤ 그는 대제사장의 무리들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행 26:10) 유대교의 열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행26:5)
⑥ 그 열심이 결국 스데반을 돌로칠 때 동참케한 것이다.(행 7:58)
그의 열심은 정당한 것이었으며 유대 율법주의 전통안에서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는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나름대로 섬기고 위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모든 불의에 대하여 심판으로 종결되고 오직 유대교인 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었는가
그가 핍박하던 예수를 오히려 따르되 열렬하게 주종하며 따르는 삶으로 180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변하게 만들었까

4. 바울의 광명
① 스데반이라고 부르는 예수의 한 추종자가 감히 공적으로 유대교와 그 성전은 이제 끝났다고 공언하자, 바울과 그의 동료 유대교인들은 이제 행동으로 처리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유대교 체제가 위협을 받는 중대한 사실 앞에 폭도들을 이용해 동을 던져 죽게 만들었다. 마치 얼마전 있었던 집권당의 창당 방해 사건처럼 말이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은 그리스도교 광신자들을 잠재우기는 커녕 그들의 가슴속에 불을 질러 놓아 더 많은 지역에 흩어져서 그 도를 퍼트리게 된다는 사실을 바울이 감지한 것이다.
그중에 많은 광신도들이 모여 있는 다메섹(오늘날 다마스커스)이라는 나바티안 이란 왕국 내의 도시를 습격하기로 마음을 먹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송환해 올 궁리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군대를 이끌고 다메섹을 가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생애를 온통 뒤바꾸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되는것이다. 빛을 본 것이다.
② 행9:7에는 바울의 동반자들이 함께 “그 빛을 보았다”라고 말하였다. 행 22:9에서는 말하길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못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때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그를 비추었다.(행 26:13) 그리고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의 도전을 받았다.
③ 바울이 바뀐 것이다.
이 사건에서 그는 유대인으로서 가졌던 희망과 이상들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유대인의 꿈과 이상은 오실 메시야가 군인이어야 했고 그들의 적은 로마 당국과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잘못된 세상의 체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신 메시야는 ‘종’이셨고 또한 그리스도의 대적은 눈에 보이는 체제가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정사와 권세 즉 사탄과 그의 더러운 귀신들에 대한 싸움(엡 6:12)이었던 것이다.
④ 바울은 나사렛 예수, 비천한 출생의 패배자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무리들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믿기로는 화려하고 위엄 있게 이 땅에 임하셔야 할 만왕의 왕이셨던 것이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예수는 바울에게 그 비천한 종으로 왔던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만유의 주로 인정하라고 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바울 자신과 그의 미래와 또 그의 조국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권리와 통치권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인정하라고 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부르심에 승복하였다.
그는 후에 아그립바 왕에게 이때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아니하고”(행 26:19)
⑤ 바울은 크리스챤들의 믿음을 광신으로 몰았고, 비천하게 여겼던 과거를 청산하고 종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어제의 자기는 분쇄되고 부활하신 예수에 대해 지배당하는 새로운 삶이 전개된 것이다.

5. 결론적으로
① 바울은 이 사건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다메섹의 숙소에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당도한 후에도 3일동안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다.
그는 신체적으로 환상 때의 강렬한 빛 때문에 맹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예수에 의해 새로운 영안이 열렸던 것이다.
② 모든 인간은 눈을 뜨고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 속에서 영적인 세계를 모른 채 맹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눈은 비천한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③ 영안이 열리기 위하여 인간은 필연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잠시 감기워야 한다.
앞이 캄캄할 지경을 만나야만 새로운 영적 세계에 대한 눈이 열리는 것이다. 그 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만 열리는 것이다.
④ 철야 기도회에 오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남다르게 눈앞이 막힐 만큼의 답답한 일을 만났다는 것이다. 울부짖어 잠안자고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여러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다가 이밤 기도하고 나면 주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는 나사렛 예수를 믿느냐 내가 그로라 내가 너의 인생을 책임지겠다. 내가 너의 사업과 미래, 그리고 너의 자녀와 가정을 책임지겠다. 맡기겠느냐”라고...............
철야기도설교자료 바울의 동역자들

2. 바울을 포용한 사람 아나니아
(행 9:10-19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괴 이스라엘 자손들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1. 새로운 길의 새로운 친구가 필요한 사람.
① 사도 행전뿐 아니라 교회사를 살펴보면 위대한 복음전도자들의 이면에 감추어진 사람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대부흥사 무디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디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의 도전을 던진 죠나단 선생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는 14세의 구두 수선공이었던 무디의 주일학교 선생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무디가 주일학교에 잘 나오는 착한 학생이지만 예수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선생님은 날을 정하고 무디가 일하는 구두방으로 가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게의 뒷켠에 있는 창고로 데리고 들어가서 “얘 너는 예수님을 알고 있니 그분은 너의 죄를 위하여 죽어주시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단다. 그런데 너는 그분을 잘 모르는 것 같구나 그 예수님이 너에게 들어가고 싶다고 나에게 말씀하셨어. 너는 그분을 마음속에 모시지 않을래”
그때 무디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거듭난 것입니다. 무디가 장차 미국과 온 유럽에 식어가는 기독교에 부흥의 불길을 다시 일으키게 될 하나님이 종이 되리라곤 아무도 몰랐지만 무디의 선생님은 그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작고 못 배우고 가난한 무디를 아무도 관심 없게 여겼지만 그 주일학교 선생님은 성령의 감동에 따라 신실하게 순종하여 그에게 다가갔던 것입니다.
② 헬렌은 소경이며 귀머거리요 벙어리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스코틀랜드의 글래수 고우 대학에서 여자로서는 최초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때 그녀는 “나와 같은 보잘것 없는 불구자에게 이런 명예로운 학위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암흑과 침묵도 전진하려는 내 정신력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라고 수화로 연설했습니다. 그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보낸 박수소리는 천둥소리와도 같았다고 당시의 신문이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헬렌을 깨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설리번이라는 그녀의 가정교사였습니다. 어머니 조차도 버린 그녀, 그 집의 개도 고양이 보다도 더 못한 걸림돌 같은 존재였던 그녀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③ 이런 사람들, 위대한 전도자 무디, 그리고 여성지도자 헬렌켈러와 그들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묵묵히 키웠던 그 뒤의 선생님들 중 하늘나라에서 누가 더 상급이 큽니까
④ 바울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눈이 감기워지는 순간 모든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가치관과 꿈은 말할 것도 없고 소경이 된 그를 부축해줄 친구마저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것입니까
⑤ 누가 이 사람을 받아들일 것입니까
버림받고, 소외당하고,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을 누가 안아줄것입니까

2.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을 만드는 사람.
① 바울이 눈이 감기워진채 도움을 받기 위해 제일 처음 만나야했던 사람은 다메섹에 있는 직가거리의 아나니아였습니다.
아나니아는 원래 다메섹에 살고 있던 유대인 신자였습니다.어떤 연유로 예수를 믿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 9장 10절의 기록대로 제자로 불리워졌던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말씀과 계시 성령의 권능에 대해서도 열려있을 만큼 믿음이 있는 사람인 것 만은 틀림없습니다. 행 22장 12절에서 바울은 회고하기를 그는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사람이었습니다.
② 아나니아는 처음에 놀라고 거부했습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을 본적은 없지만 적어도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만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핍박자요 살인자이기도 한 그가 자기에게 올 것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의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듣게 됩니다.
③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하심에 따라 그를 찾아가야했고 그를 만나야했습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의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이해하는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를 초신자로 받아 그를 용납하고 세례를 주어 자신의 제자로 삼아야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하고 내팽개쳐야만할것인가
④ 믿음을 확인할 필요는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다른 것은 중요치 않기 때문에 먼저 바울의 회심과 변화를 확인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변화한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요 이로 인하여 그가 눈이 멀었다는것을 확인한 후에 그는 모든 의심과 회의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기로 한 것입니다..
⑤ 그는 직가라는 거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눈먼 사람을 보게 된 것입니다.
9:18(참고 22:16)에 보면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초신자로 받아들이고 그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양육하기 시작했습니다.
⑥ 위대한 종 바울의 믿음 생활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위대한 종 바울도 초신자로서 다른 성숙한 크리스챤으로부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산파와 미디안 사람 이드로의 도움이 아니였다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⑦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종으로 다음세기에 우뚝선다 하여도 믿음은 진공상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종이라도 누구나 초신자 시절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큰 종으로 쓰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이란 첫걸음마부터 배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이 부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⑧ 초신자는 처음 교회에 발을 디뎌 놓을 때 누구를 첫 친구로 알게되며 누구에게서 말씀의 구체적인 도움을 받느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처음 만나게 되는 그 사람이 첫 신앙의 출발을 하는 초신자에게는 엄청나게 큰 전환점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3. 결론적으로
① 바울을 포용하여 제자로 삼았던 아나니아, 어쩌면 짧은 만남을 통하여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진실된 믿음과 언행일치의 사랑을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고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속에서도 바울 사도는 아나니아를 통하여 주의 용납하심과 사랑하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② 바울에게 첫 믿음과 세례를 선물로 주고 아나니아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지만 사도바울을 설명하는데 있어 아나니아를 제외하고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입니다.
③ 나는 여러분들이 이처럼, 바울이 되지 않을지라도 여러분들이 전도하고 가르치며 인도한 사람중에 바울같은 지도자와 종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앞서 말하였던 무디같은 사람, 헬렌켈러같은 사람, 이들도 위대했지만 그들을 용납하고 복음의 도전을던지며 그리스도앞으로 인도하였던 사람들이 훨씬 더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기억하여야합니다.
④ 혹시 여러분들이 전도하고 인도하는 사람중에 과거에 포악한 사람이고 가망없었던 사람이라할지라도 포용하고 용납하여 성실하게 사랑으로 인도한다면 우리는 또 다음세기에 위대한 전도자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⑤ 그러므로, 주의 일에 항상 힘쓰는 여러 분되기를 바랍니다.
또 그 주의 일중에 사람을 낚고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져있고 사람의 수고와 전도를 통해 확장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철야기도 설교자료 바울의 동역자들

3. 레위인 바나바
(본문 행 11:19-26)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 데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자라 이에 큰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 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1.바나바와 바울
초대 교회에서는 바나바를 바울 곁의 사람으로 분류해야 할지, 아니면
(일부 사람들이 아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듯이) 바울을 바나바 주변의
사람으로 분류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아주 격렬한 논점이 되었을 것
이다. 그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사실 별로 득이 없는 일이다. 단지 이
글에 바나바를 포함시키는 것은 몇 년 동안 이 두 사람이 가깝게 동역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FF.브루스)
바나바는 성경에서 착한사람으로 소개된다. 그 착함이란 본성적 참함뿐 아니라 주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는 성령의은사로 그렇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아뭏든 바나바는 주의 일에 동역함에 있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어떠해야함을 가르쳐주는 가장 전형적인 사람이다.
①복음 전함에 있어 가장 힘든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사람과 사람사이의 인간관계가 아닐까한다. 하나님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함께 서로 뭉쳐야 함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막상 뭉치려고 하면 서로의 욕심이 팽팽히 맞서 쉽게 하나되지를 못한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오갖 참지혜를 배척하느니라”(잠 18:1)
②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연합하고 뭉쳤던 사람들은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뭉치지를 못한다. 이유는 자기의 의견을 내세워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잠 18:2)
③유비는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의 황제이다. 그가 천하를 평정할 마음을 품고 인재를 구하러 다녔는 데 결국 관우, 장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장수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은 전쟁은 무력만으로 하는 것 아니라 지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략가가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천거 하기를 제갈공명이라는 사람이 있는 데 그를 얻으면 천하를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비는 참모들을 대동하고 제갈공명을 만나러 간다. 그런데 제갈공명이란자가 낮잠을 잔다고 만나주지를 않는 것이다. 또 한번은 눈이 내리고 몹시 추운 날 이었는데도 문밖에서 그가 잠을 잘 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이렇게 세 번씩이나 찾아가서야 겨우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 데, 유비가 세 번씩이나 그를 찾아가 만났다고 해서 유명한 ‘삼고초려’란 말이 생겨난것이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면 그때 제갈공명의 나이라고 해봐야 이제 27살이었고 유비의 나이는 50이 넘은 그야말로 어른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지만 제갈공명을 만나 그와 연합하고 뭉치기 위하여 유비라는 한 위대한 황제의 지위를 땅에 헌신짝 처럼 버렸던 것이다.
④이 처럼 사명자를 찾고 찾다가 만나면 우리는 그를 세우고 일하게 하기 위하여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자리에 까지라도 내려갈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가만히 않아서 제자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지 않고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 하셨을 뿐 아니라 주님도 친히 제자를 구하기 위하여 그들 삶의 현장에 까지 내려 가셧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쫒으니라” (막 1:16-18)
⑤바울과 바나바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와같은 입장에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왜냐면 지금까지의 바울의 행적을 살펴 보았을 땐 어느모로 보나 그는 ‘핍박자들의 스파이’로 밖에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나니아와 헤어진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제자들과 사귀고 함께 복음사역을 도울것을 말하려고 햇지만 그를 아무도 만나주지 않는 것이었다. 앞으로 위대한 전도자로 일평생을 살게될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예루살렘에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때 나타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나바였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행 9:26-27)
⑥이처럼 바나바는 바울의 변호자요 그를 주의 일군으로 세우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활을 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도 바나바를 회상할 때면 언제나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착함이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다윗과 요나단처럼 말이다.

2.바나바의 과거
①사실 바나바는 나쁜 점이 조금도 기록되어 있지않은 사람이다.
②성경 행 4:36-37에서 그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되고 있는 데 성경에 의하면 그는 레위족속이요, 유대이름은 요셉이며 밭을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앞에 둔사람이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앞에 두니라”
(행 4:36-37)
③그가 어떻게 구브로에 가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레위족속인 그가 땅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알길은 없지만 모르긴해도 레위인으로서 땅을 소유하며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일을 보지못하고 있는 그의 양심은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여느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의 오순절절기를 지키러 왔다가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접하고 성령을 체험하고 난 뒤에 성전중심의 예배와 신앙이 끝나고 예수의은혜와 공로로 말미암는 영적인 메시야 왕국이 선포 되었음을 믿고 확인하게 되자 일 순간에 그리스도의 종이 된것이라 할 수 있다.
④그는 또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을까 지금까지는 육적인 레위인으로 살아왔으면서도 자기의 안녕과 미래를 위하여 레위인으로서 금하고 있던 땅과 재산도 소유해야 했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레위인된 바나바는 모든것을 주께 드리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바나바는 진짜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3.바나바와 바울 ,바울과 바나바
①바나바라는 이름의 뜻은 ‘권위자 ‘풀어서 보자면’ 위로의아들’이었다. 이것은 사도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다.(행4:36) 그것은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는 이름에 걸맞게 바울과 사도들이 원활하게 교제할수 있도록 중재하고 위로하는 일 을 잘 치루어 내었다.
②바나바가 다음에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13장의 안디옥이다.스데반의 죽음이후 핍박이 거세게 닥쳤는데
이 핍박 기간에 예루살렘을 피해나온 헬라어를 아는 유대인 신자들이 북쪽 수리아 지방으로 가서 마침내 수리아의 수도 안디옥에 이르렀다. 당시만해도 안디옥은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곳에는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이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복음을 들은 헬라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복음의 멧세지를 온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주의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 오더라”
(행 11:21)
③그리고 이 일로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게 된다 왜냐면 바나바야 말로 이 일에 가장 적합하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아주 엄격한 유대주의자를 보낸다면 비극이 일어날 수 있었기때문 이었다.
“예루살렘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 하더라.” (행 11:22-24)
④바나바는 생각했던대로 안디옥에서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다.안디옥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혼자 힘으로 이 사역을 다 감당 할 수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을때 동역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나바는 이 일을 위하여 가장 적합한 한 사람을 생각해 내게 된다. 그는 유대인으로 헬라세계에서 태어나고 헬라어와 일본어에 동시에 능통한 사람인 바울을 찾아 이끌어 안디옥에 데리고 오는 것이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25,26)
⑤그후에 예루살렘에 핍박과 함께 큰 기근이 찾아와서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부조의 헌금을 보내기로 작정한다. 이는 안디옥교회의 신자들이 아직 영적으로 어리지만 믿음안에서 바르게 자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할 수 있는 데, 이 일의 심부름꾼으로 바나바와 바울이 선택되는 것이다.(행 11:27-30)
⑥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일후 부터 바나바와 바울로 호칭되던 것이 바울과 바나바로 호칭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아야만 되는 것이다.

4.바나바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① 바울이 유대를 방문했을때 드디어 그는 제자들로 부터 이방인선교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인정 받았다. 그렇게 생각 했을때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오게 되었던 그 때처럼 이방인들에게 나아가 복음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에 성령께서 안디옥교회에 지시를 내린 것이다. 교회확장을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를 떠나는데 그가 제일 먼저 간곳은 바나바의 고향이었던 구브로 였다. 고향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그에게 있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② 누가의 표현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호칭 순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안디옥을 떠날 때만 해도 바나바와 사울로 되어 있던 것이 바보에서 배를 타고 떠날 때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로 바뀌어 나오고 있다. (사도행전 13장 2:13절)
이것은 바나바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것으로서 바나바는 일평생 남을 세워주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을 그를 마음을 같이 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③ 또하나 놀라운 것은 바나바도 바울처럼 자비량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교를 위하여 스스로 자기 쓸것을 구했다는 것이다.
이는 레위인이었던 그가 은혜를 받고 난 뒤에 일평생 영적인 레위인으로 살기로 적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때를 기르고 그 양때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전 9:6-7)
우리는 이시대도 진정 바나바와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바욹도 많아야 되겠지만 바울이 있게끔 한것은 바나바였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바나바가 없었더라면 바울의 사역은 한참 뒤에야 시작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나바의 중계로 정확하게 하나님의 원하시는 시점에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바나바와 같은 사람도 많아야 된다는 것이다.

철야기도설교자료 바울의 동역자들

4. 바울의 심부름꾼 실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 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19

1. 들어가면서
① 누구의 심부름꾼이 되어 본적이 있는가
우리는 국민학교 때 선생님의 심부름을 해 본적이 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적어도 국민학교 때 선생님의 심부름군이 된 다는 것은 아주 기쁜 일이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선생님의 심부름을 했다는 사실하나만으로 며칠씩이나 설레임으로 보낸적이 우리는 있다. 왜냐면 선생님이 나를 특별히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② 바울은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이요 종이라고 소개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기쁘게 여겼고 그 심부름을 충직하게 감당했으며 때로는 그 설레임으로 가득찬 자신의 기쁨과 영광을 찬양했다.
③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요 심부름꾼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자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죽기까지 한 것도 하나님의 충직한 종으로서의 사명 때문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④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종으로서 예수가 계시고 그 예수의 종된 자리에 바울이 서있고 바울의 종된 자리에 실라가 서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은 매이지 않고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르던 것이다.
⑤ 이처럼 누군가의 종으로, 심부름꾼으로 내려 앉는다는 것은 힘이 들기는 하지만 소속감이 있고 기쁨이요, 존경하고 은혜 베푼자에 대한 작은 보답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로 인하여 실라는 바울의 복음 사역을 위한 즐거운 심부름꾼으로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2. 실라, 실루아노
① 실라와 실루아노는 같은 사람의 두 개의 이름이다.
바울은 그를 실루아노라고 불렀고 누가는 그를 실라라고 불렀다.
② 오늘날 감사함이란 잃어버린 예술처럼 보인다.
그만큼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잃어버린 세대가 된 것이다.
워렌 워어스버는 그가 쓴 골로새서 주석에서 이 문제를 예로 들었는데,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 사는 구조대원이었던 한 신학생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1,806년에 한척의 배가 에반스톤 근처에 있는 미시간호변에 좌초되었고 에드워드 스펜스라는 사람은 차가운 물속에 여러번 들어가서 17명의 선객을 구조해 내었다. 그러던 마정에서 그 신학생은 영구적인 건강의 손상을 입게되었다.
결국, 몇 년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고 말았는데 신문에 그의 장한 죽음을 알리는 기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그 장례식에 참가하여 감사를 표현하지 않았던 것이다.
③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셨고, 또 그 아들을 손상시키면서 우리를 구해 주셨건만 사람들 중에는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도 있고 9명의 문둥병자들 처럼 감사하지 않고 제길로 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④ 실라, 실루아노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고는 일평생 그 은혜에 감사하며 갚으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가 복음을 들은 것은 아마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와 그의 순교는 실라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복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진리요, 예수께서 값없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은혜의 사실에 감동되어 예수의 추종자가 된 것이다.
⑤ 이처럼 사명자, 하나님의 동역자, 바울의 동역자, 또한 오늘 우리의 동역자는 복음을 깨닫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그 은혜에 날마다 감격하여 그 은혜에 답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3. 충성된 심부름꾼
①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데살로니가 가정에 처음 복음을 가지고 갔던 세 사람은 바울과 디모데와 실라였다.
바울은 그와 함께 빌립보에서도 복음전하다 함께 고난을 겪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살전 2:2)
실제로 누가의 기록인 사도행전 16:19-24에서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한밤중에 감옥에 갇혔는데 그곳에서 그들을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옥터가 움직여 무너지고 그 일로 놀라 자결하려는 감옥간수를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② 사명자 옆에는 사명자가 모인다.
사명자! 소명의식 있는 주님의 제자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파리가 끓는 곳에는 주검과 썩는 것만 있는 것이고 생명의 꿀과 꽃이 있는 곳에는 그 생명의 촉매 역할을 하는 꿀벌이 모이는 것이다.
바울이 실라를 알아보았고 실라가 바울을 알아보았으니 그야말로 류오요, 앙상블, 하모니가 되는 것이다.
키가 맞지않는 두음이 만나면 소음이 되고 키가 맞는 두음이 만나면 화음이 형성되듯이 사명자와 사명자가 만나 서로 기도하고 찬양할 때 주님의 영이 역사하는 것이다.
③ 실라의 역할에 대한 첫언급은 행전 15:23-27에 나오는데,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한 지체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유다라는 사람과 더불어 이 실라를 택하여 사도들의 편지를 안디옥에 전달하도록 위임했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로 되어있다.
담고 있는 내용은 이방인 형제들이 기독교 공동체의 지체가 될 때 할례나 모세율법의 준행은 필요하지 않으며 다만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교제를 좀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유대인의 생활 양식에 잘 따라 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다.
거기서 실라는 그 교회 형제들의 신앙을 굳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것이 나중에 바울에게 발탁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④ 바울이 잠시 바나바와 잠시 헤어지게 되었을 때 바울은 같이 일해줄 동역자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결국 바울은 안디옥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거기에서 실라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알맞은 자질을 발견하게 된다.
ㄱ. 실라는 바울과 함께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행 16:37,38)
ㄴ. 실라는 바울처럼 성령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시아로 가려다가 여러번 막혔을 때 그들을 그것을 성령의 인도라고 확신하는데에 견해를 같이했다.
ㄷ.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그들에게 매맞고 옥에 갇히는 경험을 같이 했 지만 함께 믿음으로 하나님과 주 예수의 도우심을 믿고 찬양했다
ㄹ. 실라는 아주 충직한 심부름꾼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
이점은 베드로도 알고 있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벧전 5:12).
⑤ 이처럼 실루아노는 외로운 전도자의 길에 친구로서 동역자로서 그리고 긴급한 일에는 충직한 심부름꾼으로서 그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한 것이다.

4. 결론적으로
① 충직함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그해 따라 유난스럽게 바다는 사나웠고 하늘은 어두웠습니다. 벌써 며칠째 육지의 급수와 보급은 중단되었고 기름도 땔감용으로 쓸것 외에는 등을 밝힐 기름도 다 떨어져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폭풍우를 피하여 배 한척이 근처에 왔고 그 배로부터 여분의 식량과 기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배가 떠나면서 잠시 폭풍우를 피하였다가 다시 올 것을 권하였지만 그 등대지기는 그것을 마다하고 그 자리에서 등을 비춥니다. 그는 이 폭풍우의 계절일수록 등대지기의 해야할 일은 더욱 분명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배들이 그 등대불빛을 보고 안전하게 항해하여 길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② 충직함이란 이런것입니다.
일군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군으로서 충성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일을 다 맡을 수 없는 지경이 올지라도 그곳에서 맡은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 아니라 일하기 위해 생존을 연장하는 것입니다.
실라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되었기에 그 일군으로 먼 나라까지 바울과 동행하고 함께 고난을 겪었으며 또 편지를 전달하는 심부름을 기꺼이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철야기도설교자료 바울의동역자들

5. 참된 동역자 디모데
(빌 2:20-22)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 하였느니라

1. 들어가는 말
① 사람이 서로 일평생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우리의 고사성어 중에 “십년지기”라는 말이 있는데 십년을 하루같이 서로 깊이 신뢰하고 사귀어온 절친한 사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 십년지기라고 소개할 만한 사람이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볼 일이다.
② 정치가들 중에 뜻을 같이하고 동고동락을 하는 사이를 “동지”라고 한다. ‘같은 뜻을 품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는 친구보다 더 깊은 사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혹 친구 중에는 주의나 주장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데 동지란 친할 뿐 아니라 주의나 주장이 같아서 뜻 합한 사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③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친구나 친한 사이 또는 주의 주장을 같이 나누는 사이가 아닌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즉, 짐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데 성경은 이런 사이를 “동역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④ 동역이란 말은 함께 멍에를 멘 소나 말들이 마차를 끌기 위해 동일한 값으로 끌고가는 것을 말한다. 한쪽편의 우마가 지쳐서 느슨하게 움직이면 반대편의 우마가 훨씬 더 큰 값으로 그 짐을 끌고 가야하는 절대적인 짐을 지는 관계에 놓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지체 비유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관계가 집을 이루기 위해 서로 서로 연결되어 지어진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기적인 상태로 연합되어 있는 것만이 아닌 그 건물을 끌고 가기 위한 원동력의 근원으로서 그 짐을 서로 협력하여 끌고 가는 것 까지를 포함하는 관계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2. 어린 동역자 디모데
① 바울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디모데 만큼 가까운 관계를 맺었던 사람은 없는 것같다. 왜냐면 바울이 기록한 여러 서신서 중에서 디모데만큼 무게 있게 그를 소개하고 자랑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② 바울 서신 가운데 여섯 곳의 서두에서 디모데의 이름이 바울의 이름과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 그 여섯 편지를 보낼 때에 바울과 함께 한 다른 사람들이 있었지만 유독 디모데만이 바울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나오는 것은 디모데가 영구적으로 바울의 사역의 짐을 나누어 지는 평생 동역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③ 그러면 어떻게 해서 디모데만이 바울의 평생동역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디모데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말씀 교육을 받아 사명자가 되었으며 바울에게로부터 진실된 천국일꾼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대로 따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④ 디모데는 루스드라 출신이었다. 그곳은 갈라디아성에 있는 한 동리였는데 그곳에서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혼혈아라고 할 수 있는 출신성분을 갖고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혼혈아가 가질 수 있는 문제란 실로 큰 것이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대로 그를 멸시 했을 것이고, 헬라인들은 헬라인대로 트기인 그를 순수한 로마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멸시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신앙 영향과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구약 성경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지만(딤후 1:5) 할례를 받지는 않았다.(딤후 3:15) 왜냐면 헬라문화권에 할례를 받아 완전한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많은 사회적 고립을 감수해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⑤ 디모데가 바울을 만날 때 그는 어느 정도 복음에 접해 있었다. 그는 제자라고 불리고 있었다.(행 16;1)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행 16:1)” 모르긴 해도 오순절의 디아스포라 회심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들었을 수도 있었고, 바울이 1차로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를 방문했을 때 모자가 함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행 14;6-20) 어쨌든 2,3년후 그를 다시 만났을 때에 디모데는 믿음안에서 많이 자라 있었고 영적인 성장이 남다르게 빠른 그가 바울의 눈에 특별하게 띄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무튼 바울을 통하여 디모데가 복음에 눈을 뜨고 더 크게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2에서 “믿음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표현한 것이다.
⑥ 디모데는 자기가 사는 성읍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칭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약 30km나 떨어져 있는 이고니온의 성도들에게도 칭찬을 들었다. 결과 바울은 그의 출신 성분과 능통한 헬라어, 그리고 빠른 믿음의 성장들을 결론지어 볼 때 이 젊은이가 선교와 목회 사역에 자기를 도울만한 아주 귀한 조력자의 자질들이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들을 가지고 그에게 도전했을 때에 디모데는 마치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바울을 쫓아갔다. 물론 마음속에 작은 갈등들이야 있었겠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한 말씀의 도전이 너무나 컸으므로 그는 쉽게 바울의 동역자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3. 끝없는 전진
① 전략이 있고 전술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세계를 정복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는 복음전파에 있어서 이 세가지를 3가지로 요약하는데 3M이라고 한다. Method, maney, man이 그것이다. 방법과 물질과 돈이 있으면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만나기 힘든 것이 있다면 사람일 것이다. 방법은 성경에 나와 있고 돈이야 만들면 되는 것이지만 준비되고 훈련더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는 사람을 구하고 훈련시켜 준비케 하는 일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기울이며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② 바울과 디모데가 정복했던 성과 도시들을 생각해보자. 복음이 처음 전파되던 1세기경 로마는 전 세계를 정복했고 로마의 평화가 뒤엎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로마를 가보라! 그들은 몰락한 제국의 잔해를 가지고 관광 수입으로 근근히 연명해 가는 2등 국가가 되었으며 세계의 무기와 마약과 범죄 집단의 양산지인 마피아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광활한 제국의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그들은 무명의 사람들로 살았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세상을 정복하고 그리스도의 평화로 뒤덮어 가는 영적인 전쟁에 위대한 전사로서 오늘 우리에게 살아 있는 것이다.
③ 네압볼리, 빌립보, 데살로닐가, 베뢰아, 아덴, 에베소와 고린도 그리고 급기야는 로마의 심장부인 수도 로마에까지 3개 대륙에 이르는 광활한 땅을 복음으로 밟고 밟으며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였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보면 또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거기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갔다가 교회가 핍박이나 환난, 이단의 사설에 흔들리는 것을 보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 성도들을 굳게 하는 그들은 300년이 지나지 않아 로마는 기독교를 공인된 종교로 인정할 수 밖에 없던 지경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었다. 이것은 위대한 동역이 아니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④ 코카콜라 회사를 창립한 회사의 사장은 늘 말하길 “내몸엔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다”라고 했다. 결과 코카콜라는 미국과 국교가 수립되기 전이라도 먼저 상륙하여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오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은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은 감히 내 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바울과 디모데는 그렇게 말 할 수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제국의 모든 성과 소시를 넘나들며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모든 권리들까지도 유보해놓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⑤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하한 사실은 디모데의 충성됨이다. 그리고 의리를 끝까지 지켰다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시점에서 보낸 디모데후서에서는 보고 싶다는 전갈과 함께 옷과 책들과 양피 사본을 가져오라는 전갈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바울의 말년을 기억하지 않고 중요시 여기지 않았지만 디모데는 바울의 죽는 순간까지도 영적인 아들이요 동역자로서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4. 결론적으로
① 우리에게는 세계 복음화에 대한 분명한 목표와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랑방 전도이다. 사랑방 전도라는 아무리 좋은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일에 짐을 지고 헌신해 줄 귀한 동역자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진실된 동역 앞에는 내것 네것, 내돈 네돈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동역자가 될 수 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또 더 기도하여 이러한 일꾼을 더 많이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② 당신 몸에 과연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당신의 심장은 그리스도의 심장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오늘 우리의 지도자된 목사의 복음사역에 동역하지 않는가 이 질문을 늘 자신에게 던지고 확인하여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는 것이다.
③ 동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진실되고 충성되고 정다운 동역자로서 함께 짐을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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