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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능의 삶 (빌 0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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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적인 전도자 바울은 투옥(감옥) 생활 중에도 기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 준 향기로운 사랑의 제물(빌 4:18)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주의 사자 바울이 복음 때문에 옥에 갇혔을 때, 교회적으로 사랑의 연보를 해서 교회를 대표하는 에바브로디도로 하여금 로마까지 가서 바울을 수종들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과 감사의 낭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바울은 결코 그가 만난 투옥 생활의 궁핍 중에 위로를 받아서가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에게 있는 사랑의 싹(빌 4:10)을 보고, 또한 저들이 십자가의 고난(괴로움)에 동참한 일이라고 하는(빌 4:14) 차원적인 감사의 낭만을 피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 자신은 어떠한 형편에서라도 자족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풍부와 비천, 배부름과 배고픔, 궁핍과 부요에 대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빌 4:12).

그 가능한 삶의 비결이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고백입니다. 이는 바울의 인생고백입니다. 그것은 ‘가능의 삶’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본문에는 ‘능력’과 ‘모든 가능(할 수 있음)’이 서로 관계를 맺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능력(δναμι)과 가능(할 수 있음;σχ)을 말하고 있습니다.

Ⅰ.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능력이… 본문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능력(δναμι)’은 역학(dynamics), 발전기(dynamo), 폭탄 곧 화약(dynamite)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화약은 문명 개발 작업을 위하여 발명된 것입니다. 현대 문명의 개발 중에 철교 개설은 실로 지대한 공헌을 남겼습니다. 이런 철로 개설 작업 과정에서 수많은 암석을 분쇄하는 경우에 다이너마이트의 위력은 가히 측량 불가해의 위력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 속에는 이렇게 폭발하는 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적인 힘, 영적인 힘, 터지고 마는 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힘이 자기의 모든 삶을 가능으로 성화시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누구인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받은 율법주의의 힘인가 아닙니다. 그러면 날 때부터 받은 로마 시민권 곧 권력의 힘인가 아닙니다. 아니면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식(철학)의 힘인가 아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을 믿는 자들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박해 도상에 바로 그 분 예수가 그를 찾아 왔습니다. 예수는 정오의 햇빛보다 더 밝은 영광의 빛으로 그를 길바닥에 엎어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불러 주는 음성으로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시며 그의 죄를 찔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변화시켜 예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세계의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부여했습니다(행 9장). 이 위대한 다메섹 사건은 바울의 전생애를 지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바울에게 능력(δναμι)이었습니다. ① 살아계신 인격적 능력이었습니다. 역사적 사건의 사실로 나타난 힘이었습니다(부활의 힘). ② 사죄와 구원의 능력이었습니다. ③ 또한 영생의 능력이었습니다. ④ 그리고 사명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6절에 복음은 능력,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믿는 자,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사도된 직분이 능력이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에는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능력)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전도하는 메시지가 능력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사건은 바울 삶의 능력의 원천이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예수는 바울의 삶에 모든 용기와 힘을 제공하는 원천이었습니다. 바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삶의 원천입니다.

Ⅱ.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합니다.

본문 4장 13절은 다시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능력(δναμι) 안에서 …할 수 있다(σχ)」고 하였습니다.

앞에 나오는 「능력」은 내적인 힘, 영으로 폭발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요 그리스도 자신의 복음이 바울을 움직이는 내재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구원 은총의 힘, 사명 은총의 힘입니다.

그 다음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한 후자의 가능은 나타나는 힘, 방어하고 공격하는 발휘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삶에서 나타나는 행동하는 힘, 역사(役事)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자신을 재현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소원을, 목적을 재현하는 가능을 말합니다.

발전기의 힘은 에너지를 보급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영적인 작은 발전기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능력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단히 공급받을 때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의 힘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익나티우스(Ignatius)는 말하기를 “완전한 인간이신 그 분 자신이 나를 힘있게 하시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배부름과 배고픔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마초(馬草)나 목초(牧草)가 많은 말들이 배부르게 먹는 장면과 목초가 전혀 없어 굶주리는 장면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또 풍부와 궁핍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강물처럼 넘쳐흐르거나 사막처럼 건조한 경우에 사용한 말입니다. 그런 극단의 경우들에도 자족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원천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가능의 삶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통 생각하기를 사람들은 동물보다 우수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태고의 원시인들은 사람이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동물들도 정글 속에서 언어를 갖고 자신들의 거처(도시)를 건설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상 새들도 두 발을 가지고 걷고, 원숭이도 손이 있고, 벌도 언어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벌은 춤을 춤으로 먹이가 있는 곳의 방향과 거리를 서로 알리고 있습니다. 개미들도 자기들 고유의 질서와 국가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의 원시인들은 사람보다 동물들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인 히론(chiron)은 아킬레스와 그밖에 다른 영웅들에게 목초 재배법과 거문고 연주법을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호머(Homer)의 시에도 ‘히론은 영웅들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고귀한 스승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대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로부터 문화생활을 배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새들의 지저귐에서 인간은 노래를 배우고, 거미가 거미줄을 쳐서 먹이를 잡는 것을 보고 인간은 그물을 쳐서 동물 잡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새들이 하늘을 나는 것을 보고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물속으로 잠기는 것을 보고 잠수함을 만드는 힌트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퀴니코스(Kynikos) 학파에서는 동물들이 인간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낭만주의자들도 지성화된 반신적(反神的) 존재인 인간들보다 오히려 동물들이 자연의 신비를 한층 더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지상에서 인간 중심 사상의 등장은 문서상으로 볼 때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말한 프로타고라스에게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인간이 동물보다 월등하고 우월하다고 여겨 왔습니다.

반 기독자 니체는 인간만이 과거를 보존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프레스너는 인간만이 웃을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쿤스는 인간만이 부정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부버는 인간만이 미래를 지향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블로흐는 인간만이 희망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로젠쯔바이하는 인간만이 자살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자 데이빗 흄은 동물에게도 인간과 같이 이성, 감정, 도덕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런데도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사회의 덕택’이라고 하는 반기독교적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내용들이 사람이 동물보다 우월한 이유가 되기에는 약합니다. 사람은 결코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피조세계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창 1:26). 그때의 사람은 모든 가능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렘 17:9).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시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그 마음에 다른 신이나 명예나 물질들이 하나님을 대신해 버렸을 때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동물이나 식물보다 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생존의 가능이 절단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저주만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삯인 사망이었습니다(롬 6:23). 그 사망의 힘이 저들을 지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인생에게 언제 가능이 주어졌는가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신 그때부터였습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습니다(고전 1:30). 그리스도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골 1:15). 그리스도만이 개인과 인류 역사의 가능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우월적 존재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가능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부터였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모든 삶의 가능입니다. 아니 그가 가능의 원천이었습니다.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따르는 헬라주의자들은 인간 자신이 모든 가능의 원천이라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헬라의 스토익학파는 인간 자신의 수양을 믿었습니다. 저들은 인간이 만족을 얻기 위하여는 모든 욕구와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글로버(T. R. Glover)는 ‘헬라의 스토아인들은 마음을 사막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라고 비꼬았습니다.

스토아인들은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의식적으로 행동화함으로 만족한 가능에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가능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스토아인들의 만족은 인간의 소원 성취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인간의 만족은 하나님 자신의 선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스토아인들은 자급자족(自給自足)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급자족(神給自足)을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능력(δναμι)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는 가능이 있습니다. 과거의 가능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사죄의 은총입니다. 현재의 가능은 풍부와 비천,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의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을 대처할 수 있는 가능의 은총입니다. 미래의 가능은 바로 죽음 건너편에 있는 영원한 소망의 가능 곧 천국과 영생의 확신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로 말미암는 불사조와 같은 가능한 삶의 힘입니다.

세기적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은 ‘나에게는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다.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낱말이 없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배지인 저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나는 실패자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이 승리자이다.’라는 독백을 남겼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무단정치가(武斷政治家) 크롬웰 장군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는 이 본문을 외우고 또 외우면서 임종하였다고 합니다.

가능의 삶!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줍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줍니다. 어둠을 빛으로, 불순종을 순종으로, 원망을 감사로, 약함을 강함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좌절을 용기로, 궁핍을 풍부로, 무질서를 질서로, 불안을 평안으로 바꾸어 줍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온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께 “당신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청하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2-23)고 하셨습니다.

모든 가능의 원천은 그리스도 자신의 능력입니다. 그 가능의 능력을 할 수 있는 가능의 능력으로 바꾸는 비결은 믿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만난 I.M.F.를 대처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족의 비결이 아니겠는가!-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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