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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침묵 (사 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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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어떤 시골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저녁때가 다 되었는데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아내가 밭으로 가서 보니 아직도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멀리 보입니다. "여보 그만하고 저녁 잡수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남편이 듣고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요 연장을 숨겨놓고 갈게!" 남편이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연장을 숨기려면 아무도 모르게 숨길 것이지 큰소리로 말하면 누가 듣고 연장을 훔쳐가면 어쩌려느냐고 하자, 남편은 곧바로 일어나 연장 숨겨놓은 곳으로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염려처럼 숨겨놓은 연장은 누가 가져가고 없었습 니다. 그는 불이나게 집으로 달려와 아내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여보 누군 가 벌써 연장을 훔쳐 갔구려, 당신만 알고 있어요" 하더랍니다. 작은 소리 로 해야 할 말은 큰소리로 하고 큰소리로 외쳐도 될 말은 작은 소리로 하 는 어리석은 남자였습니다. 언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특권입니다. 동물들에게도 의사 전달의 기능은 있지만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말 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지만 때로는 말 때문에 입는 피해도 큽니다. 말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말하다가 칼부림이 나는 것은 사람들만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은 고난받은 메시야가 인류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는 과정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 여",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7절)라고 예수의 침묵을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로 "예수의 침묵"이라는 주제로 말씀드 리고자 합니다.
먼저, 곤욕을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성인 군자라 하더라도 사람이 굴욕을 당하면서 입을 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줄 때, 사람을 깔보고 짓밟을 때 그 창피함을 견디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총회장까지 지내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노회석 상에서 그 목사님의 교회 장로님이 자기 교회 목사님을 사정없이 공격하고 비판하는 말을 했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민망해서 듣기 거북한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공격받은 목사님은 고개를 수그리고 가만히 앉아 듣기만 했습니다. 사회자 가 그 목사님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한마디하시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목 사님은 고개를 흔들며 사양하고는 아무 말이 없더랍니다. 그 자리에서 현장 을 지켜 본 목사님이 "큰 사람은 역시 다르구나" 느꼈고, 그 목사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 입니다. 침묵은 말없는 것과 다르고, 말은 지껄이는 것과 다릅니다. 바른 말 은 침묵에서 나오고 바른 침묵은 바른 말에서 나옵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모세는 돌로 치라 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땅바닥에서 글씨만 쓰셨습니다. 그리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있으면 돌로 치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아 싫어 버린바" 되었으나 참았습니다. 까닭 없는 모 욕과 조롱을 당하면서도 말이 없으십니다. 사람이 멸시를 당하는 것은 채찍 보다 더 아픕니다. 사람이 역경을 견디어 낼 수는 있어도 멸시를 견디기는 어렵습니다.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를 멸시하고 있는데 도 예수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처럼 견디기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데도 그분은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였습니다. 채찍에 맞으며 육체에 고문을 가해오고 있 는데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아파도 아프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털을 깍 이는 양이 털을 깍아도 가만히 있듯이 입을 열지 않는 겁니다. 군병들이 자 기의 옷을 벗겨가도 침을 뱉으며 저주받은 자라 외쳐도 예수님은 말하지 않 았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변명하거나 자기가 당하는 곤욕을 피하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은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들은 침묵으로 성장합니다. 침묵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고 침묵 안에 하나님의 신비가 머뭅니다. 나는 어디 까지 침묵할 수 있을 까요 침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그리스 도의 침묵은 신앙을 버린 자들에게 내리는 포기입니다. 진실을 버린 자들에 게 대한 심판입니다. 침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힘을 기르시기 바랍 니다. 연설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위대합니다. 침묵의 힘을 길러 더욱 위대해 지시기 바랍니다.
둘째, 불법 재판을 받으면서도 침묵하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갈 때 어찌 참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굴레를 씌울 때 말없이 가만히 있기란 불가능합니다.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말을 해야 할텐데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안 합니다. 빌라도가 묻습니다.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 죄목을 들어서 고발하고 있는데 그 말이 들리지 않느냐" 다시 물었지만 총독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말이 없었습니다(마27:13). 잘못 되어져 가는 역사 속에서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옳은 말을 해야합니다. 그것이 언론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권리와 자유는 그릇된 자들과 더불어 말하지 않는 침묵입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침묵이 흐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부당하게 비판하고 죄인으로 낙인찍으려 할 때 나의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체의 말 이없습니다. 슈바이쳐 박사가 아프리카 밀림 속에 들어가 헌신할 때 신문이나 각종 언 론이 위선자라느니, 몽상가라느니 하면서 그를 비웃고 헐뜯었습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자기 신념대 로 묵묵히 자기 할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수바이쳐는 침묵 속에서 의료 선교 를 통해서 위대한 구원의 사역을 펼쳐 아프리카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침묵은 위대한 것들을 창조하는 요인이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언중에 인류 구원을 창조하셨습니다. 위대함은 옹졸하지 않고 사람의 잘못된 판결에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성급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느냐에는 무관심하고 사람들의 편견에 의 한 비판에는 귀가 막혀 있습니다. 의사도 오진하기 쉬운데 의학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무얼 알겠습니까 판 사의 판결도 잘못 될 수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리석은 군중들은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 물을 때 "바라바를 놓아 달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손들어 주고 의 인을 죄인으로 죽여 없애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예수는 침묵하셨습니다. 아삽은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시83:1)라 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침묵이 예수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습 니다. 침묵이 진정한 지혜요, 최선의 대답일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재판은 여 론으로 판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수가 찬성한다고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침묵임 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차마 네가 죽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어 서 침묵하셨습니다. 네가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침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도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고 순종하는 표현이 침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침묵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침묵으로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십시다.
그 다음은, 사형을 당하면서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어떤 굴욕을 당해도 참을 수 있고 어떤 억울함을 당해도 견딜 수 있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달라고 할 때는 참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죽여도 목 졸라 죽이던가 독살을 해서 죽인다면 참혹해 보여도 죽음의 고통은 길지 않아서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피를 말려 죽이는 십자가의 처형은 가장 견딜 수 없는 고 통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는 사형 방법은 가장 잔인하고 가혹한 사형 제도입니다. 그야말로 피를 말려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장 깔보고 경멸 하여 생사람을 나무에 못을 박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는 데도 예수는 말이 없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불평없이 끌 려갑니다. 요한이 본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 다(요1:29). 그는 폭행을 저지르거나 불법을 행한 일이 없는데도 죄인과 함께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가 정글 속에서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 다. 무심코 강을 들여다보니 무서운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빨 이 강해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물에 들어오기만 하면 달려들어 뜯어먹는 무 서운 벌레들입니다. 강을 건너기는 해야겠는데 어떻게 강을 건너야할지 고민 하고 있었는데, 원주민들이 가축을 몰고 강을 건너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교 사가 어떻게 이 무서운 강을 건널 수 있겠느냐 물었더니 강을 건너고 싶으 면 자기들을 따라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양 한 마리를 벌레들이 우글거 리는 강물 속에 던졌습니다. 강속에 있는 벌레들이 모두 양에게 달라붙어 양을 뜯어먹고 있을 때 원주 민들은 무사히 강을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양 한 마리의 희생으로 모든 사람 과 짐승들은 무사히 강을 건너게 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 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 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갔거늘 여호 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53:5,6)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피 흘리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살리는 일을 위해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죽어도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아무에게 무슨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 엘리 사마 라박다니',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래도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의 강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침묵은 유능한 두뇌의 봉인(封人)에서 나옵니다. 비밀이 없는 가슴은 공개 된 편지와 같습니다. 침묵은 훌륭한 자제에서 나옵니다. 침묵은 자신을 극복 하는 참된 승리입니다. 마음으로 침묵을 지켜 신중하십시오 침묵은 결코 우 리를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침묵은 결코 후회하게 않습니다. 말이 어질지 않으면 그 말은 침묵만 못합니다. 예수는 해서는 안될 말은 죽어도 하지 않 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침묵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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