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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마음 (눅 15: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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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계신 제는 부모인 줄 모르더니 부모님 여읜 후에 부모인 줄 아노라 이제사 이 마음 가지고 어디다가 베풀리요" 부모를 그리워 하는 어느 옛 시인의 애절한 노래입니다. 이처럼 자식이 부모 마음을 안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자식 낳아 봐야 부모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됩니다. 또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조금 더 압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죠. 그래서 효자가 드문 게 아니겠습니까 뒤늦게서야 부모 마음 아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부모 살아생전 부모 마음 알고 그 마음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게 효도입니다. 사실 불효자와 효자는 종이 한장 차이입니다. 즉 부모 마음을 아느냐 모르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성숙한 신앙은 어떤 신앙일까요 연수만 오래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행하는 게 최고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인생 다 살고 나중에 죽어 보면 다 알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하나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죠. 이 세상 살아갈 때 하나님 마음을 알고 사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사실도 바로 이겁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성숙한 신앙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말씀입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신앙 생활 하신 분들은 아마 수십번 듣고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흔히 뭐라고 부르죠 '탕자의 비유' 혹은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좀 다르게 불러야 맞습니다.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아버지와 두 아들 비유' 혹은 '아버지 비유'라고 불러야 될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려는 촛점이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대개 둘째 아들에 관해서만 많이 생각했습니다. 물론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부분이 바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체 이야기 중에서 특별히 후반부만 봉독해 보았습니다.

먼저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나 그 배경과 동기를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복음을 죽 읽어보시면 중요한 흐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주로 만나셨고, 구원의 축복을 주신 사람들이 누군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일부러 사람을 차별하신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당시 천대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세리, 창기, 중병자, 장애인, 죄인 등이었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 유대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 자들이고, 장애인도 일반인과의 접촉이나 성전 출입이 제한되는 등 괄시를 받고 살았습니다. 창기나 죄인 등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은 그들과 가까이 하셨고,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식탁 교제)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같이 지도층에 있던 사람들은 절대로 천한 사람들과 식사는 커녕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누구라도 다 죄인이고 다 회개하고 구원받을 사람들입니다. 지도층 인사라고 자동적으로 천국 가는 것 아니고, 멸시받는 자들이라고 절대로 천국 못 가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죄인들이요, 예수님이 바로 인간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겁니다. 누가복음의 주제가 바로 이겁니다.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당시 자기 깐에는 신앙 생활 제일 잘 한다고 자처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몰랐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오해했고, 더 나아가 증오하고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십자가에 죽이는 지경까지 간 거죠. 눅15: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이게 잘못된 것이죠. 참 신앙이 아닙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15:에 세 가지 비유(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아버지와 두 아들 비유)를 통해서 잃어버린 영혼들(죄인, 세리, 창기 등)의 구원을 간절히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 당신의 마음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의 아버지와 두 아들 비유는 비유 속의 아버지의 마음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아버지는 하나님(혹은 예수님)을 나타내고, 둘째 아들은 세리나 죄인들, 맏아들은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나타냅니다.

둘째 아들이 어느날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물려달라고 조릅니다. 당시 율법으로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방식이 두 가지였습니다. 임종 시의 유언, 생전의 증여 방식입니다. 증여의 경우에도 재산권을 물려주지만 그 처분권이나 수익권은 아버지 임종 시까지 아버지에게 귀속됩니다. 즉 생전에 증여한다 하더라도 자식이 함부로 처분할 수는 없고, 그 재산에서 생기는 수익금도 아버지 몫입니다. 그런데 둘째는 처분권까지 몽땅 요구합니다. 초법적인 요구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 줍니다. 아마 율법 상(신21:17) 장남에게 두 몫을 주게 되어 있으니까 3분지 1을 주었을 겁니다. 그것 다 챙겨 가지고 외국에 가서 탕진한 둘째는 망하고 나니까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그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자기 몫을 다 가져갔으므로 아무 권리가 없지만 새옷을 입히고(신분의 회복), 반지를 끼워 주고(권리의 회복), 신발을 신겨 줍니다.(자유의 회복-종은 신분을 못 신었음) 그러면서 큰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잃어 버렸던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한참 그러는 중 맏아들이 밭에서 일하다 돌아옵니다. 그런데 평소에 못듣던 풍류 소리가 나고 이상합니다. 종에게 물어보고 사정을 알게 된 맏아들은 심통을 부립니다. 아버지는 그를 달래 보지만 그의 마음이 너무 완고합니다.
여러분, 아버지와 맏아들의 대화 내용을 잘 살펴 보십시오. 얼마나 다른 모습인가! 28절 이하를 보십시오. 맏아들은 자기 의를 주장합니다.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는 방탕하지도 않고 착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왔다는 겁니다. 방탕하고 재산을 다 탕진한 자식을 뭘 예쁘다고 그렇게 반기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는 맏아들은 돌아온 둘째 아들을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30절.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남 부르듯 부릅니다. 불평과 원망이 가득찬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물론 맏아들의 주장이 다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화가 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집 나간 탕자는 아니지만, ‘집안의 탕자’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겉으로는 착실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만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는 자기 몫(아직은 아버지가 권한을 행사 하고 있는 남은 3분지 2)가 줄어든다는 사실이 몹시 견디기 힘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마음가짐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리인 것 같습니다.

만일 그가 매일 동구 밖에 나가 집 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자기도 아버지와 함께 동생이 돌아올 것을 간절히 소원하며 아버지를 위로했을 것이고, 돌아온 동생을 함께 기뻐하고, 함께 사랑했을 겁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당시에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을까 당연합니다. 사실 그들은 맏아들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외적으로 보면 그들은 분명 율법을 열심히 연구했고,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고, 십일조나 금식, 기도 등 종교적인 의무를 착실히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있던 결정적인 약점이 무엇입니까 맏아들과 같은 약점입니다. 즉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보시기에는 바리새인들보다 차라리 둘째 아들처럼 한때 방탕했지만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이 더 귀하게 보였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본문에는 후속의 이야기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그후에 둘째 아들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마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을 눈물로 회개하면서 이제는 아버지를 최선을 다해 기쁘게 해드리며 열심히 살았을 겁니다. 인간 생각에는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그를 기뻐하고 좋아했을 겁니다. 아버지로서는 당연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고, 교회 봉사 하고, 예배 의식에 열심히 참여하고, 헌금하고, 도덕적으로 살고, ... 다 중요합니다.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의 알맹이입니다. 이게 있으면 성숙한 최고 신앙, 이게 없으면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녀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녀일까요

1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감사하는 자녀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자식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생생하게 나타납니까 배반하고 가버린 아들이지만 매일 동구 밖에 나가 기다리는 아버지!(찬송가 317장 가사처럼!) 자식은 부모를 배반해도 부모는 자식을 배반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내 멋대로 살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사랑해 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특히 감동적인 것은 아들이 돌아올 것을 알고 미리 잔치를 준비했다는 사실입니다. 23절. 살진 송아지. 헬라어 원문에는 정관사(τον)가 붙어 있습니다. '그 살진 송아지'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제일 토실 토실한 송아지를 보면서 매일 아들 돌아오면 잡아 먹여야지 ... 그렇게 생각하며 점찍어 두었던 바로 그 송아지! 그래서 심지어 종들도 익히 알고 있었던 그 송아지! 이게 아버지의 사랑이
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무한 사랑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비단 둘째 아들에게만 향했던 것은 아닙니다. 맏아들이 화를 냈지만 아버지는 용납하며 그를 부드럽게 달랩니다. 31절. "얘야! ...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모든 것을 배푸시는 분입니다. 둘째 아들 사랑한다고 다 쏠려 버려서 맏아들에게 사랑이 덜 가는 게 아닙니다. 똑같은 사랑입니다. 다만 그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아들이 있고, 그 사랑을 모르고 불평하는 아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유명한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이 "하나님은 마치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라고 말한 바와 같습니다. 부디 이 큰 사랑 깨닫고 늘 감사하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아버지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이 맏아들의 역할을 잘 하라고 은근히 요구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맏아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에게는 장자의 특권 이전에 의무가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왜 아버지가 유산을 다른 아들 두몫을 주셨는가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것은 율법의 정신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몰랐습니다. 두몫을 주는 이유는 아버지를 대리해서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생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하라는 겁니다. 3분지 1은 자기 몫이지만 또 다른 3분지 1은 동생을 챙기는 데 써야 합니다.
마찬가지 우리도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을 사랑하는 데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특히 약한 자들을 ... 소외자, 연약한 자들은 소홀히 되기 쉽습니다. 정죄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돌아 오면 다 하나님 자녀입니다. 아무도 죽을 때까지는 지옥 갈 사람으로 단정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들에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나 이상으로 훌륭한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믿은 자로서, 먼저 직분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은 자로서 겸손하게 형제들을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축복은 책임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책임을 감당하는 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3 아버지의 기쁨으로 기뻐하는 자녀입니다.

비유 가운데 나타난 아버지의 기쁨을 느껴 보십시오. 가출했다 돌아온 아들을 얼마나 즐거워 합니까 눅15:7,10.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의 기쁨은 하늘을 찌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구령의 열정을 얼마나 품고 있습니까 새신자를 향한 소원을 얼마나 강렬하게 품고 있습니까 새신자를 향한 수고는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바로 아버지 마음입니다.
오늘 비유 가운데 나타난 두 아들 중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부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기쁨을 드리기 위해 남은 생애 열심히 신앙 생활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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