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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은 인생의 닻 (히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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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6장 19절에 보면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다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 소망을 "영혼의 닻"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아주 좋은 암시입니다.
닻이라 하는 것은 항해 가운데서 특별히 위험을 당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배가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닻이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해는 언제나 잔잔한 순풍만은 아닙니다. 짙은 안개가 끼기도 합니다.
폭풍이 몰아칠 수 있습니다. 미친 물결 이 뒤덮을 수 있습니다. 암초에 걸리는 일도 있습니다. 항구에 다 들어 왔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다른 배와 충돌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에 꼭 필요한 것은 닻인 것입니다.
소망이 그렇습니다. 인생이라는 항해가 평온하게 진행될 때에는 희망이 없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번 광풍노도(狂 風怒濤)가 일어나듯이 위험과 고난이 닥쳐왔을 때는 소망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불우와 역경을 당할 수 있습니다. 사업 실패,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死別), 난치의 질병이라든지 친구 이웃의 배반이라든지, 시기 질투 갈등 온갖 충돌, 모두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소망입니다 . 보다 좋은 날을 바라보는 희망으로 온갖 불행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고난을 견디고 참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같은 이는 제 1세기에 복음을 전파한 분입니다. 당시 세태야말로 광명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이방인들 은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동족 유대인들은 강렬하게 배척 핍박했습니다.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25, 6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 하여 이 비밀을 모르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될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게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수중에 아무것도 가지지 아니하고 그 험악한 조건하에서 희망이라는 증서 하나만 가지고 담대하게 일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고통과 역경이지만은 이스라엘 민족도 다 구원 얻게 된다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담대하게 일한 것입니다. 암흑이 짙을 때일수록 희망이 뚜렷해야 합니다. 그런 희망 속에 일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닻이라는 것은 사용할 때에 해저 깊이 깔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닻이 튼튼하게 내려져 있으면 배는 안전한 것입니다. 참 소망이 그렇습니다. 사람의 눈에 얼른 나타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소망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파도가 뒤덮이고 환난이 닥쳐와도 흔들릴 수는 있지만 결코 넘어지거나 파산을 당할 염려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큰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세 가지 반응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 번째 타입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모두 다 마비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파멸을 당하고 맙니 다. 이런 사람은 언제까지나 그 당한 고난의 쇼크를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새로운 삶의 방법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는 정신적인 폐인이 되고 그저 미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가지 타입은 현실과 타협하려고 하거나 체념하려고 하는 타입입니다. 자살을 해 버리거나 아니면 환난을 도피해보려고 합니다. 술을 자꾸 마시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범죄자가 되어 버린다든지 또 신경성 환자가 된다든지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다른 한가지 타입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이상의 능력자를 의지하여 그래서 모든 고난을 이기는 타입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겉보기에 초라한 필부(匹夫)들이었습니다. 때리면 맞습니다. 가두면 갇힙니다.
자르면 잘리웁니다. 그러나 그들 가슴에 는 보이지 않는 큰 소망이 깊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옥중에 갇히어도 찬미 드리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참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삼키지 못했습니다.
또 이 닻은 닻 그 자체가 귀중하기보다는 닻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위험할 때 선체가 상하지 않게 합니다. 목표하는 항구에 안전하게 가게 하기 때문에 닻은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소망 그 자체가 귀한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인생이 목적하는 항구까지 소망이 우리를 인도해서 그곳에 도달하게 함으로써 소망은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모든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바른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바른 사랑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소망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은 그 소망, 바른 소망만이 우리를 구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4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헛된 소망, 잘못 된 소망, 해독되는 소망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런 소망 때문에 도리어 쓰러지고 넘어지는 일 많습 니다. 그러므로 소망의 가치는 그 소망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른 것입니다. 파스칼이 말하기를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사고력, 생각하는 사고력을 가지고 있는데 있다. 그리고 인간의 의무는 바로 생각하는 데에서만 나온다. 그래서 먼저 자기에 대해서, 그 다음은 창조주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목적을 생각하는 것이 생각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결코 그런 순서로 생각하지 아니한다. 세상 사람은 춤추는 것을 생각한다. 그저 비파(琵琶) 타는 것 생각한다. 노래하는 것 생각한다. 시를 짓는 일, 말 타는 일, 전쟁하는 일, 왕이 되는 일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왕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소망은 무 엇입니까 우리 민족이 가져야 할 소망은 어떤 소망이어야 할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희망을 과학에다 둡니다. 과학자들이 우리 인생을 가장 편하게 하기 위해서 문명의 이기(利器)를 연구하고 만들어 내고 하지마는 인생들이 편해지기보다는 인간이 만들어 낸 그 이기들 때문에 가장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 들은 정치에 희망을 둡니다. 정부는 나라를 흥왕케 하고 백성을 잘 살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 사회 는 이상적 사회로 가기보다, 행복한 나라가 건설되는 것보다 도리어 반대 현상 더 많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국제 기구에 희망을 둡니다. 2차 대전 이후에 세계적인 평화 기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기구들을 조직해 가지고 세계의 분쟁 문제를 다루도록 하고 특별히 평화 복지를 위해서 노력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에 평화가 왔느냐, 아닙니다. 오히려 전쟁이 그치 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더 고도화되고 있습니다. 더 격렬해진 이 전쟁 양상은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우리 인생이 소망을 둘 만 한 것이 못 됩니다.
그러면 참 소망은 무엇인가 시편 39편 7절에 "나의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아모스 선지는 외쳐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사회도 사는 길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참된 소망이 확실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편78편 7절에 "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그 열족(列族)은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나 님께 소망을 둘 때만 이 완고하고 패역하고 부정직, 불 충성, 죄악으로 가득한 세대 이것을 변화있게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참 소망은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현실은 이상에 맞지 않습니다. 모든 현실이 기대와 꼭 같 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복음 16장 12절에 예수님께서 나약한 제자들에게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제자들을 무한히 사랑하셨어요. 지금은 감당치 못하는 제자들의 현실을 장차 모든 진리를 나타내는 사람이 되리라는 희망 속에서 극진히 아껴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당면한 현실은 만족하지 못 할 수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산업 교육 문화 예술 사회 모든 부면이 만족하지 못할 수 있습 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실망을 줄 수도 있습니다. 또 가장 아름답고 순결하여야 할 교계도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적인 면, 복음 운동, 선교 사업, 교회 운용.... 다 만족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 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하는 자세로서 참 소망을 가지고 이 현 실을 무한히 사랑하며 최선껏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한히 젊어지는 것입니다. 무한히 발전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무한히 전 진하는 동시에 승리하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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