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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아버지 모델 (창 0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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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앞서 20절까지는 셋 계열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특징은 ‘낳았고’ ‘죽었더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죽음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고 한 대로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만약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그것처럼 큰 절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 이야기가 있습니다. ‘낳았고’이러한 생명 탄생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잇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러한 선언은 무려 스무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낳았고’ 사실 이것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만약 이 ‘낳고’가 없으면 인류 역사는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요
20절까지는 죽음과 출생의 이야기로 족보를 기록해 오던 전형적 방법에서 벗어나 한 인물의 생애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에녹입니다. 성경은 특별히 그의 사적을 기록해 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기적을 행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특별한 직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평범했던 한 인물에 대해 이런 관심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군다나 짧은 구절이지만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에 많은 부분이 할당되어 있다고 반드시 그 사람이 유명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긴 이야기이지만 불행한 인물들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아주 짧은 구절이지만 오늘 본문만큼 큰 감동으로 찾아오는 구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본문을 읽어 보십시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 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딩크족이 늘어난다
그리고 다시 21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에녹은 65세가 되어 자식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수백년의 수명을 지녔던 당시에 65세에 아들을 얻은 것 자체는 큰 화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야렛은 162세가 되어 에녹을 낳았고 심지어 므두셀라는 187세가 되어 아들 라멕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가 65세에 아들을 낳은 것이 그렇게 자랑거리도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21절의 영어 해석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When Enoch had lived 65 years. he became the father of Methuselah." 즉 에녹은 65년을 살고 나서야 비로소 므두셀라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질문해 보십시다. 왜 성경은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려고 했을까요 아버지 사역의 소중함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가르치고 싶어서였습니다. 종종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 되는 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아예 아버지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습니다.
제가 한 번은 러시아 코스타에 참석하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이것저것을 묻는데 제법 여행 상식이 많은 듯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신은 일년에 한두 차례는 늘 해외여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이 가능한 것은 자녀가 없어서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생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예 결혼할 때부터 아내와 자식을 낳지 않기로 약속을 했고 이 약속을 보증하기 위해 수술부터 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딩크족(DINKS:Double Income No Kids)이라 부릅니다. 결혼 생활의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 출산 자체를 미루거나 포기해 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비극입니다.
이러한 일이 중국에까지 번져 ‘딩커(丁克)’ 물결이 있다고 보도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딩커란 단어는 맞벌이를 하며 자녀가 없는 부부를 뜻하는 딩크를 중국식 발음으로 옮긴 것입니다. 베이징(北京)의 경우 지난 84년 이후 결혼한 부부 중 20퍼센트 이상이 고의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으로 집계됐고, 상하이(上海)는 지난 79-89년 혼인 신고를 한 113만 쌍 가운데 딩커 부부가 전체의 1

4.6퍼센트를 점하고 있으며, 광저우(廣州) 역시 86년 말 3만여 쌍에서 89년 말 10만여 쌍으로 늘어났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70퍼센트 이상은 교육 수준이 높고 생활도 중류층인 당정 간부나 개인사업가인텔리층이라는 데 있습니다. 부부만의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을 원해서입니다. 이미 개인주의 풍조는 후대를 중시하는 동양의 전통적 가치관마저 변화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피 메슨이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을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흔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이들로부터 해방됐다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휴양지에는 어른들이 자기네들끼리만 즐기려고 어린이들을 맡겨 놓는 장소를 마련해 놓고 있다 부모들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방학하는 것을 싫어한다.
어린이들을 싫어하거나 세상을 어린이 같은 눈으로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생활 태도에는 차가운 그 무엇이 있다. 어린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것같이 가지런히 정돈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들은 또 우리 어른들이 무시하려고 애써 온 정서와 본능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은 우리가 매일 얼마나 많은 기적들을 못 보고 지나치고 있는지를 깨우쳐 준다.”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악트 마이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 된 우리들은 자녀를 통해 우리 자신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즉, ‘우리는 완전하지 못하고, 화를 잘 내고 참을성이 없고 지쳐 있다. 세상 전체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한 사람의 삶을 인도하는 데 필요한 지혜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남의 잘못과 약점을 용서하는 마음이 크게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범한 모든 잘못, 특히 첫아이한테 범한 잘못을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찹니다. 나의 여러 가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가 훌륭한 성인이 되기까지 인도하시고 양육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자녀를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십대들의 쪽지」발행인인 김형모 씨가 쓴 글에 딸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라면을 끓여서 식히느라 젓가락으로 후후 불고 있는 아빠더러 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왜 라면이 서 있지 다리 아프겠다.”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는 “아빠, 나무가 무서운가 봐, 나무가 잠을 안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아이가 한 번은 어린이용 「매일성경」을 꼭 껴안고 누워 있기에 “왜 그렇게 무거운 성경을 껴안고 있니” 그랬더니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지금 하나님을 껴안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이잖아요.”
그래서 자녀들은 어른들의 스승이라 합니다.
분명 에녹은 상당히 긴 세월을 그렇게 소망하고 갈망했던 바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두란노서원 어린이연구원의 도은미 사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자로 태어난다고 다 남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성이 된다고 다 남편이 되지는 않습니다. 남편이 된다고 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이 있다고 아버지가 되는 것이 또한 아닙니다. 이는 남자라는 신분의 최고의 절정은 바로 아버지 됨입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도 교수가 되는 것도 사장이 되는 것도, 아니 이 세상의 어떤 신분도 남자로 태어나 아버지가 되어 보는 것 이상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신분은 없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또 하나의 대목이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을 때 므두셀라를 ‘낳기 전’이 아니라 ‘낳은 후’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 므두셀라를 낳은 후 그가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매튜 헨리는 이에 대해 65세가 되기까지는 신앙심이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해 보고 싶습니다. 아들 므두셀라는 아마도 아버지 에녹의 삶에 어떤 분수령 또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녀가 태어나는 것은 인생사에 있어 아주 평범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어찌 보면 부모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에녹에게 심판의 말씀을 주셨고 므두셀라는 그 표징이었습다. 에녹은 아들 므두셀라를 보며 세상을 심판할 하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므두셀라란 이름 속에 ‘창을 던지는 자’란 뜻으로 세상을 심판할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아들 므두셀라에게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자식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에녹은 이날부터 자신의 삶을 더욱 추스렸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경건한 삶은 세상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유다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아버지가 된 것을 감사해 보셨습니까 이 아이들이 없었다면 결코 우리는 인내를 배우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버렸을지 모릅니다. 실제 자식을 키워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자각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인지 모릅니다. 자녀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배우게 됩니다. 용서를 배웁니다. 사랑을 배워 갑니다. 제가 사랑이 가득해서 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족한 사랑을 가지고 아이를 사랑하면서 사랑을 키워 갑니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의 거울입니다. 아이가 있으므로 성숙을 배웁니다. 때문에 아버지가 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연구소에 ‘까비’란 강아지가 있었는데 아무데나 오줌을 싸 놓고 똥을 싸고 집안을 어지럽혀 놓기 일쑤입니다. 그리고는 계단까지 따라오며 촐랑대는데 하도 미워 발로 내려가라고 밀치는데 그만 강아지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찬이가 그래요. “아빠, 좀 심한 것 아녜요.” 순간, 그래 맞다. 심하다. 나에게는 그런 마음의 공간도 없구나 싶더라구요.
그래서 어떤 때는 자녀들의 말하는 것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릴 때도 있습니다. “아빠 천천히 모세요. 그러다 사고 나겠어요.” “아빠 교통신호 지키세요.” 만약 아이들이 없으면 어마나 내가 타락했을까를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40년 만에 이루어진 약속
그런데 에녹은 어떻게 아버지가 되었을까요 저는 이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라고 봅니다. 만약 에녹 시대에도 결혼 적령기가 30세를 넘지 않았을 것을 감안한다면 그는 무려 35-40년 간 아버지 되기를 위해 힘썼던 것 같습니다. 분명 40년은 적은 세월이 아닙니다.
후사가 없자 금방 아내의 충동질을 받아 첩을 취해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의 모습과 너무 대조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신이 오래도록 아이를 회임하지 못하니까 그 남편에게 자신의 하녀인 하갈과 동침해서 자식을 낳도록 요구했습니다(창 16:2). 아브라함은 그 아내의 말에 따랐습니다. 나중에야 아들을 얻었던 사라는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또 남편에게 하갈과 그 아들을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창 21:10). 그렇게 비극이 잉태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달랐습니다.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에녹의 믿음이었는지 모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11장 5절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런데 이 앞의 구절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가 되게 하실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눈 팔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라면 쉽습니다. 아니 한두 해라면 기다려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후사가 없다는 것은 하나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무려 40여 년 간의 세월을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랐습니다. 그는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바라는 바를 이루어 주실 것에 대한 확신과 믿음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그렇다면 그가 믿고 가만 있기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분명 동정녀 탄생은 한 번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보통의 생육 방법으로 므두셀라를 낳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도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성(性)이란 너무 알아도 탈이고 너무 몰라도 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애인 신드롬으로부터 시작된 불륜 등은 건강한 부부 생활 유지되지 않는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아버지는 건강한 부부 생활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에녹은 아주 건강한 부부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한결같았습니다. 과오가 없습니다. 성군 다윗도 한눈을 파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에녹에게는 이런 실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무흠할 수 있다는 것처럼 큰 축복이 없습니다.
모범 가정을 이룬 에녹
성경에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인물 두 사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녹과 노아입니다. 창세기 6장 9절입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리고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에 들림을 받았던 두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을 보십시오. “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그런데 이 두 조건을 충족시킨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다. 에녹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느냐는 점입니다. ‘자녀를 낳으며’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가정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스펄전은 이 대목을 무척이나 강조했습니다. 그의 하나님과의 동행은 수도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은둔 생활에서 주어진 경건이 아니었습니다. 가정에서였습니다. 가정은 경건이 실천되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聖) 가정이어야 합니다.
참된 경건이 이 땅 위에서 최고의 생활과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던 청교도들은 믿음과 거룩한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이들에게 있어서 가정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훈련 기관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가장 위대한 축복은 자녀들이었고 자녀들을 기도함으로 보살피며 돌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육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가정을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과 비교하여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에는 설교자가 있듯이 각 자정에는 가장이 목사 역할을 하며 가족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가정예배를 인도하되 하루에 적어도 두 번은 해야 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청교도 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진짜 신자는 가정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바깥에서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에서가 더 중요합니다 에녹이야말로 예언자이기 이전에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모범 가정을 이룬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가장의 소중함이 가진 무게가 얼마가 큰 것인지를 가르쳐 준 첫 번째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이십니까 어쩌면 아버지는 제사장의 직임보다 더 앞서며 중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말해 가정 안에서 제사장이 되지 못한다면 어디서도 제사장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식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쩌면 자식들로 더불어 신앙생활하는 것보다 더 쉬울 수 있습니다. 특별히 화낼 필요도 없고 짜증낼 이유도 없으며 속상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참아야 할 일도 없고 흥분할 일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만 잘 챙기면 됩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있으면 모든 몸가짐부터가 힘들어집니다. 아이들 때문에 고민하는 밤도 많아집니다.
에녹의 생애야말로 아버지로 살면서도 얼마든지 경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진짜 경건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생애는 가정 안에서 경건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며 가정 안에서의 경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타내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가끔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불 받은 증거로 방언이나 하고 신유은사만 있으면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가정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더구나 삼백 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자로서 역할에도 충실해야 했습니다. 그는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이런 공적인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게 뒤따랐던 문제는 자녀 양육이었습니다. 뜻밖에도 에녹이란 이름 속에는 ‘가르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식을 가르치는 일에 그의 생애를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로서 사역에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왜 에녹인들 보통의 아버지들처럼 자식들로 인해 속상한 일이 없었을까요 그도 괴로운 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가슴 저미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한계에 부딪혀 울부짖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들과 씨름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훌륭한 것은 자녀양육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제사장 일에 매달려 자식을 돌보지 못한 비극의 아버지로 기록된 것과 너무 대조적입니다. 무능력한 아버지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그 삼백 년 동안 부부관계에서 마음이 갈라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유혹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루해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한결같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경건함이었습니다. 레아와 라헬 두 자매를 동시에 아내로 얻은 야곱은 자신이 누구의 방에서 자느냐 하는 것까지도 아내들의 결정에 따르는 유약한 남편이었습니다(창 30:15,16). 그해서 집안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한결같았습니다. 그의 이런 생활은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짧은 구절에도 이 말이 두 번이나 기록되고 있습니다. ‘동행하며’ ‘동행하더니’ 그래서 하나님과의 동행은 에녹의 삶을 특징짓는 중요한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걸었다는 말이 단순히 보행을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기준을 따랐다는 의미입니다. 또는 표준을 따라 행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을 바라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 하나님과 함께’ 즉,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과 생명을 다루시는 그 하나님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동행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삶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미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6:8)
이렇게 경건하게 살았던 에녹은 365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수명과 비교하면 이는 다른 이들의 중반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족장들은 에녹의 나이의 곱절을 살았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를 속히 데려가셨을까요 노아와 같은 노년의 실수를 거두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데려감을 당했을 때는 5장에 언급된 족장들이 모두 살아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를 데려가심으로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미래의 소망에 대한 증거를 삼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이 시대 아버지의 표상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는 특별한 기적을 행한 기적의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능력을 행한 불의 사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범했다면 평범한 아버지일 뿐이었습니다. 분명 에녹은 평범한 인물에 불과했지만 결코 평범하지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오늘날 이 시대의 아버지의 표상이 되고 있습니다. 에녹 시대와 지금의 시대에는 6천 년이라는 간격이 있지만 아버지로서 에녹이 보여 준 삶의 표본에는 전혀 간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아버지들을 부끄럽게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창세기가 시작의 책이라고 했을 때 여기 모범적인 가정 생활의 시작이 있습니다. 모범 가장인 에녹과 같은 삶을 살려고 몸부림칠 때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에 들림 받은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나라에 이를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 노릇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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