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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계시다면 (시 2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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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째 이런 일들이
한때 시중 서점 베스트셀러 란에 YS 시리즈라는 책이 상당 기간 오래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YS 김 대통령의 억센 경상도 사투리의 애교 섞인() 표정을 빗댄 ‘우찌 이런 일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 신자들에게도 가끔씩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하는 의심과 회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심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라는 엄청난 질문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나도 그런 의심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밤이었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막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서 오늘 만큼은 몇 번 울리다가 멈추기를 바랬습니다. 몇 번이고 울리기를 기다리다 집어들었습니다.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사님 나집삽니다. 고집사가 약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약을 먹고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 채 안나 온지가 벌써 6시간이 넘는 답니다. 빨리 좀 와 보세요”
나는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황급히 뛰어 나갔습니다. 벌써 시계는 1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도착해 보니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습니다. 제 엄마가 죽는다는 생각에 애들은 사시나무 떨듯이 울며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나 집사는 칼을 들고 문을 따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서 베란다 쪽으로 가서 고시와 철망을 떼내고 창문을 뜯어내었습니다. 알루미늄 창과 나무 창을 뜯어내고 방안에 들어갔더니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시체처럼 누워 있었습니다. 맥박을 짚어 보지 아직 맥박은 뛰고 있었습니다. 업고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응급실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의사들이 위세척을 위해 고무호스를 넣고 펌프질을 해서 물을 넣어 위 세척을 하기를 30분 간신히 위기를 넘긴 채 의식불명인 고집사를 침대에 뉘어 링겔 주사를 꽂았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남편의 외도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녀는 남편의 외도를 눈치채고 마음 가눌 길이 없어 교회를 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서지 않고 외박하는 수가 길어지자 결국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까지 생긴 것입니다. 심방을 가서 여러 번 권고하고 또 책망도 했습니다. 또 나집사는 나집사대로 위로하며 하나님은 살아 계시니까 얼마 가지 않아 마음을 잡아 주실 것이라는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끝내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이혼을 요구해 오자 견디다 못한 고집사는 어린 자식들을 뒤로한 채 죽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자살은 미수로 그쳤지만 아직도 그 남편은 바람기를 죽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내가 선포했던 많은 설교와 선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상당한 충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데...:”
“그래서 진정 예수 영접한 사람은 자살을 하지 안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고집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가 고집사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란 무엇일까
참으로 삶이란 그렇게 간단히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고 복잡하다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실제로 산적해 있는 인생의 난제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이 신앙 속에서 매일처럼 갈등하고 설명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고집사처럼 짐짓 남편의 마음을 돌릴 양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사실을 보며 “왜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는가 꼭 고난을 주셔야만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가”라는 질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아프리카 우간다나 르완다를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하는가” 무조건 고난을 당한 사람 문제를 만난 사람들에게 천편일률적으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야 그러니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거야”라고 위로해 버리면 되는 것일까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버린 사실을 두고 “다 하나님의 뜻이야 참으라구 참아” 그렇게 말한다면 슬픔을 당한 그 사람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그 다음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 왜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는 그분을 만날 수 없을까”
“ 하나님은 항상 축복을 주시기 전에 고난을 주셔야만 하시는가”
이러저러한 질문은 결국 우리의 신앙 전체를 뒤흔드는 회의로 빠지게 만듭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신 것일까 괜스레 있지도 않는 하나님을 쫓아 온 것은 아닌가”
이 정도에 이르게 되어 이러한 신앙의 회의와 고민을 이야기 하게 되면 당장 다른 크리스천들은 ‘시험에 빠졌다’ ‘마귀가 들어갔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아’ 취급을 받게 되고 상상할 수 없는 파국으로 급직하 하게 됩니다.
① 고민들을 정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순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입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영으로 계시고 우리는 육신에 있기 때문입니다.
② 그러나 이러한 의심들이 우리를 더 깊이 하나님께 안내합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도 궁극적으로 이런 의심과 회의 속에서 하나님을 확인하는 체험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신가’라는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그 신앙의 더 깊은 성숙을 가져오게 하는 견인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3. 깊은 좌절 속에 방황했던 영웅들
좀더 확실한 이야기를 하자면
‘신앙은 의심과 확신, 회의와 믿음의 쌍곡선이다’할 것입니다.
의심 없는 신앙이 없고 회의 없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러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① 성경 속의 모든 인물들은 회의에 빠져 고민했던 경력자들입니다.
오늘 교회를 나오면서도 하나님을 의심하는 당신이라면 그리고 이 의심에 시달리는 사람이 나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의심 가는 아무래도 욥인 듯합니다.
욥은 사람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난에 휩싸였습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날을 비추지 말았었더라면....(욥 3:1-4)
욥의 이러한 탄식과 울부짖음은 급기야 불신으로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나는 막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욥 3:23-26)
욥은 진정 사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였고 결국 형언할 수 없는 탄식 속에 신과 운명을 저주하였습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표출일 것입니다.
② 다윗도 신앙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실재(實在)에 대하여 의심할 수밖에 없는 회의와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1-2)
자신의 장인 사울의 시기로 정적으로 몰린 채 다윗은 이십 수년간을 정처 없는 방황과 투옥, 그리고 망명으로 형극의 길을 걷게 됩니다.
처음 한 두 번은 그가 신앙의 힘을 의지하여 극복하려 하였으나 이해되지 않는 고난의 시간, 고통의 순간이 길어지자 의심이 찾아오고 결국 “하나님이 나를 건지시지 않는다면 나를 버리신 건가 아니면 나를 구원하실 수 없는 무능한 분이신가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일까”라고 회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③ 십자가에서의 예수님도 깊은 좌절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고통을 호소하였습니 다.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큰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3-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과연 나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십니까”
이 한없이 안타까운 절규와 독백은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뱉어 내는 모습입니다.
까닭 없이 자식이 차례차례 죽어 나가고, 양떼와 소떼들이 벼락을 맞아 죽어 벌릴 때, 장인이라는 사람이 정적으로 몰아 죽이려고 쫓아올 때, 그리고 죄 없는 자를 고소하여 재판정에 서게하고 십자가의 처형장으로 몰고 갈 때 그러한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잠잠히 그 고통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죄를 짓고 당하는 고난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데 고소를 당하여 법정에 서게 되고 까닭 없이 직장에서 모함을 당하여 쫓겨나면, 보증을 서 주었다가 전 재산을 잃게 될 때, 그것 뿐입니까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세상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 산다고 살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올까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고통을 나에게 허락하실까 하고 회의가 어찌 생기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이러한 회의는 어찌 보면 너무나도 정당한, 연약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분이 잠잠하시고 침묵하실 때에는 분명히 계획이 있습니다.
오늘 의심과 회의 속에서 하나님을 의심하던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만나시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려면 이 첫번째 걸림돌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기적이 일어 날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① 고통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유명한 여류 소설가인 박완서씨의 장성한 아들이 죽었습니다. 어미보다 먼저 죽는, 그것도 다 키운 아들이 죽는 것을 본다면 그 감정이 어떻겠습니까
한 지성인의 고뇌와 방황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꺼져가는 아들의 생명을 붙잡고 절규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계십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그녀에게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쓴 자전적 소설이 “한 말씀만 하옵소서”였습니다.
인간의 생애에 진정 이 질문을 던져 보지 못한 영혼이 있다면 가장 저주 받은 자일 것입니다.
죽음과 이별 앞에 설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라’는 하나님께 맡기고 의탁하는 겸손함, 즉 피조물의 겸손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통,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② 둘째, 고통에는 진정한 성숙이 있습니다.
인생을 모르는 자는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미숙의 증거는 내일 일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숙함이 실수를 불러오고 실수들이 쌓여서 인간을 깊은 고뇌 속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하나 뿐인 것과 조심해야 한다는 것과 인간은 오직 한 가지의 목표, 즉 내세를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통들은 인간을 성숙되게 합니다.
상처로 인하여 나무에 옹이가 생깁니다. 그럼으로써 더 단단해집니다. 인생을 의지하고 헛된 영광을 구하며 자기의 명철과 지혜를 의지하는 자는 자기 꾀에 넘어집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는가”라고 절규해 본 자는 하나님의 섭리, 예수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을 의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시는가”라고 절규해 본 여러분 절규하십시오.
만나 달라고, 지혜를 달라고 인도해 달라고 그분께 의지하십시오. 회의는 바로 우리를 진정한 신앙인 되게 하는 밑거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시고 더욱 성숙해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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