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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 05: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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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예 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팔복(八福)을 말씀하셨습니다.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 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5:3) 심령 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4) 애통하 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6) 의 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 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 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 박하였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팔복에 한 개의 축복을 더 약속하였습니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믿음'과 '축복'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입 니다.'축복'의 헬라어는 '마카리오스(makarios)'인데 이는 '행복하다' 는 뜻입니다.이 단어는 내세적(來世的)인 용어가 아니라 지금 현세 (現世)에서의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예수를 믿는 사람은 오는 세 상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믿음'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 람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아 행복하고 축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 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미국의 코메디언이며 영화 제작자인 우디 알렌(Woody Allen) 은 "하나님이 내 이름으로 스위스 은행에 백만 달러를 예금해주시 면 믿기가 쉬워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이러한 믿음은 그 뿌리 가 약해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7개의 표적(sign)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이같 은 표적을 행하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 함이었습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 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 사마리아 여인(요4:4-38)은 예수님 을 구세주로 믿었습니다.그리고 그녀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듣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많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4:39-45).왕의 신하도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음으로 병들어 죽게된 아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요4:46-52).이들은 모두 유대인과 비교하면 이방 사 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들,그것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 수님을 믿기는 커녕 믿기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5:1-47).예수님의 고향 갈릴리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요6:1-15).

구약 성경의 '욥'은 하나님이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가 실 때 의심과 고민도 했지만 더 확실한 믿음을 굳혔습니다.아브라 함은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빼앗아가려 하실 때 그 순종과 믿음 이 확고해졌습니다.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이 믿음이라면 빼앗겨도 그 믿음은 변치 않는 것입니다.

방송인 데이빗 브린클리(David Brinkley)씨는 "믿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던진 벽돌에 걸려 넘어가도 그 벽돌을 주워 기초돌을 삼 고 집을 짓기 시작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이스 북부 산악지대에 가면 큰 수도원 20개가 관광지가 되어 있습니다.모두 1천년 전에 건축된 것으로 그 당시 기독교는 열렬한 기도운동이 일어났고 양적인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예수 잘 믿는다는 교인들은 모두 직업이나 가정 등 사회적 책임을 이탈하고 산에 들어가 금식철야기도회를 가졌고 대규모의 수도원도 모두 높 은 산 꼭대기에 지어 하나님과 가깝게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도사의 시대는 기백년도 가지 않아 쇠진하고 오늘날 그 웅장한 기도원들은 옛 건축양식을 보는 관광지에 불과하 게 되고 말았습니다.

열렬한 기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높은 산의 기도원이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여하한 노력으로도 하나님께 이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방법입니다.

익살맞은 K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어떤 청년이 와서 토론을 하자고 덤볐다고 합니다.

"목사님, 기독교는 불필요합니다.2천 년 동안이나 전도했다지 만 이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나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K목사님이 답변했습니다.

"물은 이 지구상에 수십만 년 동안 있는데 당신의 와이샤쓰 깃에 때가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이오" 물이 있어도 빨지 않으면 때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신 앙이 이론에 머물러 있는 한 나에게 도움이 안됩니다.보는 것이 믿 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그래서 믿음을 갖는 것은 어렵습니다.

옛 소련의 우주항공사 티토브(Titov)가 우주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나는 하나님을 찾았지만 우주에는 하나님이 없었다."라고 말 했습니다.

똑같은 우주여행을 하고 귀환한 미국 항공사 맥디비트 (McDivitt)는 "하나님의 모양을 볼 수는 없었다.그러나 천체의 신비 속에서 나는 창조자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함을 믿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우주를 보아도 육안으로 보는 자와 영(靈)의 눈을 뜨고 보는 자는 차이가 나는 법입니다.

믿음은 영의 눈을 뜬 자만이 가지게 됩니다.성경은 육신의 눈 으로 읽는 책이 아닙니다.영의 눈으로 믿음을 가지고 읽을 때만 성 경이 됩니다.하나님은 인간의 논리나 과학의 방법으로 증명되는 존 재가 아닙니다.증명의 대상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실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떳떳하게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수 많은 모래를 삼켜야 영롱 한 진주가 탄생하며 여러 번의 정련 과정을 거쳐야 번쩍이는 순금 이 나오듯,숱한 우여 곡절을 거친 연단된 믿음의 소유자가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 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이루는 데 장애물들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악 한 마음,탐욕,방탕,시기심,무절제,성급함 등과 같은 죄악들이 있습니 다.그러나 현대 사회에 있어서 구조적이라 할 수 있는 더 커다란 믿음의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 중심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우리는 사 람을 더 많이 바라보면 볼 수록,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려 고 노력하면 할 수록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덜 생각하며 덜 중하게 여기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치명적이고 위험한 장애물은 무엇보다도 첫 째,인본주의(人本主義)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흔히 현대 문화를 이룬 업적을 찬양하고 획 기적으로 발달한 과학기술문명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뿐만아니 라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가 각 분야에 걸쳐 확대됨으로 써 인간 개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풍부한 물질 문명의 혜택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이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고 또 모든 면에서 세련되고 우아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우리들은 더욱 교양있고 예절이 있으며 남에 대한 동정심이 많아졌고 감수성도 예민해졌다고 생각합니다.자기 자신만 을 생각하는 구시대의 진부한 생각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모든 면 에서 우리들은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남에게 친절히 대하려고 합니 다.우리들은 서로 싸우는 것을 싫어하며 상대방에게 고통과 고민거 리를 주기 싫어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상호 협동하는 것을 존중하며 무뚝뚝하고 노골 적인 행동이나 말을 싫어합니다.우리는 명예를 추구하고 신사적으 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며 그와같은 사람을 존경하고 또 자신이 기꺼이 그러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명예로운 시민,자부심과 긍지 를 지닌 국민임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문화와 사회에서 통용되 고 존중되는 생활과 사고방식에 신경을 쓰는 한, 그밖의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해져 가게 됩니다.혹시 우리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이 나 위신 등이 실상 우리의 신앙이나 영적 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위 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우 리 자신만을, 즉 인간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풍조에 적지않 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자신도 모르게 그와 같은 인본주의 물결에 쉽사리 쓸려가고 동화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인본주의의 본질을 말한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 려고 하는 것이며(마6:5),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어서 (마6:2) 겉은 깨끗하고 고상해 보이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것이며(마23:25),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것입니다.

다음, 믿음의 장애물로는 세속화주의(世俗化主義)가 있습니다.

현대와 같이 결혼의 신성함이나 정조의 고귀한 가치가 무시되 는 시대는 없었던것 같습니다.겸손의 덕과 청렴의 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무엇인가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 또 이것을 유모어 있게 잘 할 때 이런 사람은 많은 대중들의 인기를 얻으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가장 무서운 우상은 절대적인 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 혹은 세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를 일반화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이 그토록 경시되고 독선적 인 풍자나 은유를 위하여 인용되며,하나님의 이름을 그토록 방약 무인(傍若無人)하게 들먹거리며,주일성수가 그토록 뻔뻔스럽게 와해 된 시대가 언제 있었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이 심각하게 무시당하고 있으며 유구 한 역사를 가지는 기독교의 고상한 원리들이 이렇게 경멸시된 때는 일찌기 없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더욱 더 자신만을 존중하며 하나님을 경시하고 있으니,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도리어 자신 을 합리화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하며 거룩한 것을 세속화시키는 방 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속화주의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사47:10-11) 자기 중 심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47: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사47:11)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이 없을 것이 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헤아리지 못할 것이 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신을 그렇게 많이 섬겼던 바벨론 사람 들은 바로 그와같은 세속화주의 내지 상대주의적인 삶을 추구했던 바, 그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사47:8,10) 라는 식으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화주의 결말은 파멸이요 재앙뿐임을 하나님의 경 고를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사47:11).

세번째 믿음의 장애물은 외면적인 정신 자세입니다.현대인의 생활과 사고의 습성 중 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일들을 복잡 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쉽게 넘어가는 것이며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마음 깊이 숙고하기 보다는 쉽게 생각하고 쉽게 살아가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때때로 우리의 삶 속에 필요하며 우리의 상황이 그러한 태도를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이 외면적인 태도가 우리의 생활 전반에 작용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 니다.단지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며,순간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쾌 락 가운데 던지고 싶어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상 강조되는 교훈을 지겹게 여기고 매번 반 복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며 좀 더 참신하고 획기적인 것은 없을 까 하고 물어보지 않습니까 신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철새처 럼 일정한 절기가 되면 하나님의 집에 겨우 찾아오다가 곧 사라지 고,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을 찾아 이곳 저곳 옮겨다니나 어 느 한 곳에서 만족할 줄 모르고 습관처럼 계속 하나님의 집을 찾아 헤맵니다.

우리들은 처음에 주님을 만나서 느낀 첫사랑을 잊어버린 채 이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발견해 보려 하고 손쉽게 무엇인가를 얻어 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 광은 찾지 아니하고 노력이나 수고 없이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에만 만족하려는 것은 외면적인 신앙 자세이며,이는 곧 믿음의 치명적인 적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인본주의와 세속화주의와 외면적인 정신자세의 공통점은 진실 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생각할수록,경건한 것보다 세상 것들을 사 랑할수록, 그리고 내면적인 것보다 표면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속에는 진실성이 없게 마련입니다.

진실성이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을 그리고 타인 을 속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인간의 마음의 본질을 꿰뚫 어 보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 세속적인 영광에 구애받지말고 오로지 진실된 마음으로써 유 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네번째 믿음의 적은 후기 근대주의,즉 포스트모던이즘 (Post-Modernism)입니다.후기근대주의(Post-Modernism)는 현대주의 (Modernism)도 거부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지금까지 내려온 기독교 진리 자체도 거부하는 사상입니다.

"현대 계몽주의,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현대주의를 과감 히 거부해야하며 현대주의의 발전체재와 전통주의 절대가치와 절대 이데올로기 등을 완전히 배격하는 사상입니다.이제 더 이상 절대가 치,절대 진리,절대 전통,절대 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 다.

그러므로 후기 근대주의(Post-Modernism)자들은 가장 중요한 교리인 십자가의 피의 구속을 부인하면서 "예수님의 피나 짐승의 피나 같은 것이지" 무슨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예수님의 신성(神性)도 부인하면서 술주정뱅이 취급까지 하고 부활의 역사성 도 부인합니다.

"부활은 하나의 예시행위다"라고 하고"기독교 신앙은 생물학 적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서의 예 수 부활이요,그것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임마누엘에 있다."고 하면 서 교활하게도 의미상의 부활론을 말하고,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 활을 믿지 못하며,동정녀 탄생,대속의 죽음,구원론,부활론,재림론을 정면으로 도전하여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다섯번째 믿음의 적은 종교 다원주의입니다.이 신학사상은 1960년 부터 미국에 소수민족이 많이 이민해 오면서 그들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들어가 문제들이 야기되면서 생겨난 사상입니다.다 원화된 사회 속에서 모든 종교는 공존해야 된다고 하는데서 시작된 것인데 발전하다보니까 "특정 종교만이 절대 진리,절대 구원을 주 장하는 시기는 지나갔고 종교는 궁극적으로 단순히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구원,같은 진리에 도달한다."라고 논리를 전개하기 까 지에 이른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유일성도 부인하고 십자가의 피 의 구속도 부인하며 부활도 부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마리아가 낳은 예수가 종국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며 모든 종교에 다 그리스도 가 있고,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정면으로 도전 하는 세력들입니다.

자유주의 신학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는 이단 신학사상 으로 오늘날 여권 신장을 들고 일어나는 소위 여성신학이 있습니 다.

미국 연합감리회에서 행했던 수양회에서 어느 여자 목사가 여 성신학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기도할 때도 "Dear Mother"로 불렀다고 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바꾸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쏘피아 하나님(sophia God)"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하워드(Harward)신학교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아주 행 복한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도 착하고 부인도 얌전했는데, 그 얌전 한 여자가,여성신학을 배우기 시작하더니 얼굴 모습이 사나와지고 눈빛이 달라지더니 남편을 사랑의 대상인 배필로 생각하는 것이 아 니라 적대감정을 품고, 공격의 대상, 복수의 대상으로 삼더니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성신학의 권위자 메리 데일리(Morrydaly)는 말하기를 "적 그리스도(Anti-Christ)가 오기전까지는 여성이 해방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미국 연합감리교회가 1965년까지는 1,200만까지 교인수가 증가되었으나 그 이후 1990년도 까지 400만명 이상이나 교인수가 감소되었고,매일 350명짜리 교회 하나씩 문을 닫고 있는 형편입니 다.1993년 8월의 어느 호 뉴스위크지는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 슬레의 고국인 영국에서도 감리교회가 1930년에는 14,000교회였는 데 지금은 8,000교회가 없어지고,6,000교회만 남았는데 그나마도 계 속 문을 닫고 없어지고 있는 형편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런던에 있는 모 전통있는 큰 교회가 술집으로 팔려 서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라고 기록했습니다.그외에도 가구전시장, 누드 그리는 화방 등으로 팔리거나 전세를 놓고 있는 형편입니다.

영국의 모신학교는 목사 지원자가 없어서 재정도 모자라니까 회교 에서 1년에 100만불씩 받아 운영하면서 회교의 통제를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최근의 한국 교회도 7,80년대의 교인 증가추세가 90년대 에 들어와서 감소추세로 돌아서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이유는 모든 성경의 권위 자체를 부인하고,예수가 하나 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됨을 부인하고,십자가의 피의 구속의 부활을 믿지않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때문인 것입니다.

이같은 자유주의 신학과 사상이 성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 하는 사랑이 식어지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의 어느 심리학자가 많은 임상 케이스를 기록한 가운데 30여세가 되도록 사람을 전혀 믿을 수 없고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고아 출신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의심을 가지고 대합니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한 번도 없습니다.세상에서 너무나 심한 천대와 학대와 사기를 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그 부인의 고민은 자기가 사 랑한다는 진정을 남편이 믿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3,4년이 걸 려서야 비로소 자기의 진실과 사랑을 그의 마음 속에 깨우쳐 사람 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자기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선 사람을 믿지 아니하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하나님을 아는 것은 둘에다 둘을 더하면 넷이라는 자명의 진리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무한하시고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 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하여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믿 을 수도 있습니다.그것을 진실이라고 받아 들이고 하나님이 말씀하 신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인 인식인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 즉 구세주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없 어지는 곳에 악마주의가 발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그가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지 않은 유대인들은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엄청난 파멸의 결과를 가져왔습니 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 하지 아니하는도다 (요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 라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 라 (요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 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5:44) 너 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 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영이 충만하시 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사람과 세상의 영광을 바라기보다는 하나 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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