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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을 벗으라 (출 03:4-5, 엡 0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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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 여 '감추어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은 자 신을 계시하신다고 하여 '드러내신 하나님'(deus revelatus)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 게 비로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성경은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이란 하나님의 보통명사가 함께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라고 하 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자존 자, 영원한 자란 뜻입니다. 반면에 엘로힘은 전능자, 위엄을 가진 자란 뜻입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신이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절대자이며 다른 신이 없 음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아덴 사람들은 신을 많이 믿고 있었습니다. 얼 마나 신이 많은지 이름 없는 신까지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신앙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그들을 미신적이라고 합니다. 일본도 신을 많이 섬기고 있습니다.

8백만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신이 많은 것은 신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하 나님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는 거룩한 땅입 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는 그 어디나 거룩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이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자리인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님의 눈을 피하여 삼촌의 집 으로 도망을 갑니다. 도망가던 날 밤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약속하고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이것이 벧엘의 체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자리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장소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거룩한 곳입니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우 리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면 얼마나 달라질까요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면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롯이 살던 소돔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있던 불풀무 속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베드로가 갇혀 있던 감옥 속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임재하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 시고, 지시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이 삶의 자리에도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로랜스형제라 불리는 니콜라스 헤르만은 17세기의 평신도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얼마나 거 룩한 삶을 살았던지 부엌의 성자라고 불렸습니다. 그의 열망은 늘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는 "영적인 생활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연습으로 이루어진다", "우 리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필요한 연습은 곧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다 ",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기술도 필요하지 않고 지식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오직 필 요한 것이 있다면 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분께만 드려진 마음이 라 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그의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았습니다.

일전에 로버트 모건이 쓴 '홍해의 법칙'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시련을 당 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시련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복이다. 지독한 시련의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보다 더 달콤한 것은 세상에 없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지금 가장 달콤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40년의 미디안의 생활의 위대한 끝은 하나님 의 임재를 맛보는 달콤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순간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멋진 순 간입니다. 왕궁에서 바로를 알현하는 것에 비할 수 없는 감격이 있습니다. 어떤 세상의 사람 을 만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순간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가까이 오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난 불꽃을 보려고 나아갑니다. 그 불꽃을 보려고 나아오는 모 세를 하나님은 보십니다. "보려고"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라아입니다. 이 말은 '관찰하다', ' 깊은 주의를 기울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관찰하는 자세로 깊은 주의를 기울 이며 하나님께 나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라아라는 말을 명사로 사용하면 독수리라는 뜻 이 됩니다. 독수리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먹이를 향해 내려올 때보 면 먹이에만 집중하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의 눈이 독수리의 눈이었습니다.

지도자의 요건 가운데 하나는 세심한 통찰력과 집중력입니다. 지도자는 어느 하나도 적당히 보거나 흘리지 말고 세심히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동작을 통하여 지도자의 자질 을 주시하고 계십니다. 미국의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유명한 포수 가운데 요기 베라라 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였 습니다. 관심을 가지게 되면 눈을 통하여 수많은 것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을 보려고 오는 것을 하나님도 보셨습니다. "보신지라"란 말은 모세가 보려고 오는 것같이 하나님도 보셨다는 뜻입니다. 두 말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서로 응시하며 집 중적 관찰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 야". 하나님이 모세를 두 번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다급하심과 관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 함을 부르실 때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사무엘을 부르실 때도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십니다. 괜히 부르신 것이 아니라 소명을 주시기 위한 초대였습니다. 소명을 수행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것은 일을 위한 초대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친밀하게 아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직 하나님의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친밀하게 아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이 름도 아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라고 말씀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이름으로 아십니다. 친밀하게 아십 니다.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가 내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나 아내나 남편이 나를 아는 것 보다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신 자이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 8:29)라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롬 11:2)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 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고 합니다.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를 때에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 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겸양으로 하나님께 응답하였습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위대한 선교 업적을 이룩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선교단체에서 그에게 편지를 보냈 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도울 선교사를 파견할 예정입니다.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쉬운 길이 있으면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편지를 받 고 이렇게 회신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쉬운 길로 오려는 선교사들을 파송하려면 나는 그들 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전혀 길이 없어도 오려는 사람들을 원합니다." 전혀 길이 없어도 오는 사람이 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전혀 길이 없어도 올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 사람을 부르시고 찾으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가까이 하지 말고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지 말 라고 하십니다. 죄악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가 에덴에서 범죄한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볼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동산 쫓아내시고 화염검으로 둘려 쳐 접근을 금지하셨습니다. 이 전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둘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 간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구별된 곳입니다. 모세 는 아직 하나님의 자리에 가까이 갈 만큼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19:12에도 하나님 은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왜 신 을 벗어야 합니까 경외와 존경의 표시로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성경은 신을 벗어야 하는 경우를 여러 번 말씀합니다. 여호수아 5:15에는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신을 벗 으라 하신 명령을 듣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발의 신이란 세속에 살면서 더러워진 인간성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워진 인간성을 다 벗어야 합 니다. 신명기 25:9에는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 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신명기에서 신은 지위와 권리를 표시합니다. 신을 벗기웠다는 것은 지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기 4:7-8에는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 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 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라고 합니다.

신을 벗었다는 것은 권리를 양보하거나 권리를 이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었습니다. 세속에 살면서 더러워진 인간성을 벗었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포기 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이양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애굽의 왕자로서, 양치기로서 모든 지 위와 권리를 다 포기하고 이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신 발 하면 필리핀의 전 대통령부인 이멜다를 생각합니다. 이멜다는 의상이나 구두에 욕심이 많아 2천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백만 원대를 넘는 구두만도 그 중의 반 이 넘었다고 합니다. 오래 전 황영조선수의 운동화는 특별히 제작하여 만든 것으로 당시 돈 으로 1억 원이 넘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비싼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편한 것이 좋은 것입 니다. 신은 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벗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이 그들이 회당인 모스크에 들어갈 때는 신을 벗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 올라갈 때에 신을 벗습니다. 인도인들은 간디의 무덤에서 신을 벗습니다. 그들의 경외와 존경을 표시하는 것입 니다. 성경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엡 4:22)라고 합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골 3:9)라고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히 12:1)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벗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더러워진 우리의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더러워진 신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 놓기조차 부끄러 운 것입니다. 벗어 던져야 합니다. 사람의 다리는 수천 년간 노출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제 2의 치부라고 여겼습니다. 특히 여성의 다리가 그러합니다. 영국의 상류 사회에서는 오래 전 에는 피아노 다리도 그냥 나와 있는 것이 상스럽다고 양말을 만들어 신겼습니다. 지금도 영 국에서는 숙녀 앞에 닭다리를 내놓으면 실례가 된다고 합니다. 18세기 영국의 작가 헨리 필 딩은 "여인이 신발 벗은 발을 노출시키는 것은 죽음에 버금가는 수치다"라고 했습니다. 이 것이 전통이 되어 그런지 서양 사람들은 신을 잘 벗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침실에서도 신발 을 신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신발을 벗습니다. 비행기에서도 앉으면 신발부터 벗습니다. 신발을 잘 벗은 우리가 모세를 더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결론 어떤 취객이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에 타자마자 옷을 벗기 시작합니다. 택시 기사가 "손님, 옷은 왜 벗습니까 입고 계세요"라고 했더니 취객은 "아, 여기가 우리 집 아닙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여기는 댁이 아니라 택시 안입니다" 그랬더니 취객은 "그럼 진작 얘기하시지, 나는 우리 집 방안인줄 알고 들어올 때 신을 벗고 왔잖아요" 그랬답니다. 서양사람들은 신 발을 잘 벗지 않으니 이런 염려는 없겠지요. 아무데서나 신발을 벗는 생활의 습관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늘 신을 벗는 신앙적 의식을 가지세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우리의 자아를 벗어 던지세요. 신은 벗기 위해 신습니다. 신은 벗기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언제든지 벗어 던질 수 있는 신발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못된 구습, 더러워진 인간성, 쥐꼬리만한 자신의 권리, 알량한 지위를 언제라도 벗어 던집시다. 하나님 의 거룩한 곳에 설 자는 더러운 신발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신을 십자가 앞에 벗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부활을 향하여 나아가는 고난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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