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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역사 의식 (암 05: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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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탈 때나 특히 비행기를 탈 때 인간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어떻게 이런 자동차와 비행기를 만들어 뛰고 나는데 있어서 가장 무능한 인간이 그 어느 동물과 새 보다도 빠르게 달리고 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인간의 능력이 참으로 모든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능력이 뛰어남을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것들은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설교를 작성할 때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컴퓨터에 대해서 아직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헐씬 더 많지만 컴퓨터를 사용할 때마다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엄청난 기계를 우리 인간이 발명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우리 인간의 뛰어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한계는 주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치명적인데 나타난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인간의 한계중의 하나는 진리를 파악하는 능력입니다. 진리는 양면적입니다. 진리는 마치 원과 같아서 처음과 나중이 함께 있어서 처음이 곧 나중이요 나중이 곧 처음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파악하는 우리 인간의 능력은 단면적이어서 처음과 나중을 함께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은 절대로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는 개념을 함께 있는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처음과 나중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요 처음은 나중이 아니며 나중은 절대로 처음이 아닌 것입니다.
진리는 처음과 나중이 함께 있을 뿐 아니라 좌와 우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언제난 진리를 좌로 치우쳐 이해하거나 우로 치우쳐 이해하곤 합니다. 그리고 서로 우익과 좌익으로 나뉘어 서로를 정죄하며 서로 적이 되어 평생을 싸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답답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는 좌와 우가 함께 있을 뿐 아니라 위와 아래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위와 아래를 함께 동시에 이해하지를 못하고 위와 아래에 치우쳐 이해하곤 합니다. 신학사를 공부해 보면 그동안 우리 신학은 크게 두 주의로 나뉘어져 엎치락 뒷치락하면서 왔는데 그것은 초월주의 신학과 내재주의 신학입니다.
초월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며 그 궁극적인 관심은 하늘입니다. 그러나 내재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며 자연 그 궁극적인 관심은 하늘이 아니라 이 땅과 세상입니다. 초월주의 신학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반면 내 재주의 신학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신학적 진리는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나누어 대립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동시에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바로 그러한 능력이 없어서 양면적인 진리를 단면으로 쪼개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생각하며 서로 자기가 옳다고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쓸데 없고 무익한 논쟁에 빠져 낭비적이고 소모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이제 겨우 100년이 좀 지났을 뿐인데 장로교회만 해도 수십개의 교단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대부분은 교단의 정치적인 이권 다툼 때문에 분열했지만 더러는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해 차이 때문에 분열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교단적으로 볼 때 신학적인 특성과 차이가 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간단히 정리해 보면 그동안 고신측과 합동측이 초월주의적인 신학을 강조하였다면 기장측은 내재주의적인 신학을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고신측과 합동측의 그동안 신앙적 관심은 하늘이며 영적이며 개인적인 구원에 편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장측의 신앙적 관심은 세상이어서 개인구원 보다는 사회구원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장측의 신학교인 한국 신학대학은 한 때 그 어느 일반 대학보다더 더 열열히 사회와 정치의 부정을 규탄하고 데모하는데 앞장을 서서 한국 신학대학은 데모 잘하는 학교로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를 놓고 보수주의다 자유주의다하며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양면적인 진리를 단면적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우리의 한계에서 온 것들 입니다. 우리는 비록 동시에 그것을 이해하고 볼 수는 없다고 하여도 진리는 양면적인데 비하여 우리의 진리를 파악하는 능력은 단면적이어서 한 쪽 밖에는 볼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여
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해할 수 없는 자기와 반대되는 쪽의 주장에 대해서도 인정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반대쪽의 주장 쪽에 바로 자신의 약점과 단점이 강점과 장점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신앙에는 뜨거운 것과 차거운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그 두가지를 다 포함하여야만 합니다. 머리는 차거워야만 하며 가슴은 뜨거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보면 차거운 사람은 뜨겁지 못하며, 뜨거운 사람은 차겁지 못합니다.
뜨거운 쪽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차거운 쪽의 사람들을 냉냉하다고 비판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잘못된 것이고 교만한 것입니다. 차거운 쪽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뜨거운 쪽의 사람들은 광신적이라고 비판하고 잘못된 신앙의 소유자들이라고 단정합니다. 그것도 잘못된 것이고 교만한 것입니다.
서로를 인정하여야 할 것이고 자신의 단점과 약점이 자기와 다른 신앙의 사람들에게서 강점과 장점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힘써 상대방의 신앙적 장점을 받아들여 자신의 약점과 단점을 줄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통합측 장로교회인데 우리는 신학적으로 언제나 그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양면을 다 포함하는 중간에 서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통합측의 신학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통합측의 신학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좋은데 실제적으로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까딱 잘못하면 말만 그렇게 하고 실제적으로는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며 더 위험한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흐리멍텅한 회색주의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의 신학은 생각으로는 통합적인데 실제적으로 초월주의적인 신학에 치우쳐 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하게 있기 때문에 하늘과 개인구원을 강조하면서도 그쪽의 신학을 강조하는 합동과 고신측 분들에게 보면 저의 신학에는 초월주의적 경향이 부족하여 오히려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 무너졌지만 불과 얼마전 까지만 해도 저와 같은 목사는 합동측과 고신측 교회의 강단에 서지 못했
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장측과 같은 내재주의적인 신학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 눈에는 제가 초월주의적인 신학에 빠져 있는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쪽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이 없는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엄중히 제가 제 자신을 비판해 본다면 저는 내재주의적인 신학 보다는 초월주의적인 신학에 좀더 기울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 설교를 잘 들어보면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말을 많이 하는듯 하나 정말 중요한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전두환, 노태우 두 분이 우리나라의 대통령이었을 때에도 목회를 하는 목사이었습니다. 저는

5. 18 광주 민주항쟁도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분노하며 거리에 뛰쳐나와 데모를 하며 항거를 할 때 저는 저들이 왜 그러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주된 관심은 하늘에 있었고 세상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피를 흘리고 희생을 하여 이땅에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아직도 부족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이 땅에 실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를 하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데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언제나 그것이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물론 저는 저 나름대로 매우 중요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한쪽이 늘 비어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의식과 관심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저 뿐만 아니라 양심있고 의식이 있는 복음주의자들의 한결같은 고민입니다.

3. 1 운동 당시 우리 개신교는 나라와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였습니다. 참여한 것이 아니라 주동하였습니다. 그때 천주교는 오히려 이 일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참여도 거의 없었습니다.
의식이 있는 천주교인들은 그것을 늘 후회하며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경향이 서로 바뀌었습니다. 천주교는 우리 개신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사회와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전통적인 개신교는 오히려

3. 1 운동 당시 천주교처럼 교회 안으로만 숨어있습니다. 사회에 대한 관심도 정치와 역사에 대한 관심도 거의 가지지 아니하고 그저 교회의 성숙과 성장만을 이야기하며 세상과 역사를 외면한채 세상에 대한 담을 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3. 1 운동 당시 백성들은 천주교보다 우리 개신교를 사랑하였습니다.
지금은 민중들이 우리 개신교보다 천주교를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선교 백주년이 되는해 부터 정체하기 시작하여 지금 퇴보하는 길을 걷고 있는데 천주교는 그해 부터 성장하기 시작하여 최소한 곱절 이상의 발전을 한 것으로 보여지며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교적인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의식이 없는 교회는 민중들로 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한 동안 잠잠하던 학생들과 학원이 다시 요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토요일자 신문을 보니 전국 120개 대학이

5. 18 동맹 휴업을 결의하고 전국에서 한 밤중까지 가두 시위를 벌였다는 기사가 실려있었습니다. 이번 학생들의 시위에는 많은 교수들도 뜻을 같이하고 있다는 기사도 실려있었습니다. 지난 7월 검찰이

5. 18 고소 고발 사건에 대하여 불기소 처분을 결정한데 대한 항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8월 29일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서울대 교수 221명이 기자회견을 갖고 검찰의

5. 18 관련자 '공소권 없음' 결정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날 저녁 7시 고신측 장로 교회인 서울 영동교회 청년부실에서는 '역사를 위한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고신측인 영동교회와 합동측인 남서울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9개 교회의 청년 대학부 학생들이 130여명이 모여 기도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라고 하는 교계잡지에 그 기사가 '기독 청년이여 역사에 눈을 뜨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에 찔림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동안교회의 대학 청년들이 자랑스럽고 언제나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목사인 저의 신학적 한계와 신앙적 편견 때문에 사회정의 실현과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이와같은 중요한 일에 초청 받지도 못했고 참여하지도 못했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동안교회의 청년들과 교인들이 역사에 눈을 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의에 대하여 무심하고 침묵함은 본의는 아니지만 불의에 동조하며 저들을 도와준제 목:열심히 전도하는 교회
주 제:전도
성 경:고전9:16-27
설 교 자:김동호 목사
날 짜:
비 고:동안 교회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주 조심스럽게 영동교회에 모였던 기독청년들의 성명서를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리려고 합니다. 그 성명서를 읽는 것이 오늘 저의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5. 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기소. 처벌을 위한 기독청년학생 성명서

1. 우리는 '공평한 추의 적용'을 원하시는 하나님(잠 16:11, 20:10, 23)을 따라, 검찰이 헌법의 성역 없는 공정한 적용에 위배되는 '공소권 없음' 결정을 취소하고 책임자를 기소할 것을 촉구한다.

2. 우리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잠 21:3, 미 6:6-8, 암 5:21-24)을 따라 이땅에 '강자의 힘이 정의'라는 그릇된 가치관 대신, '정의가 힘'인 것을 실현하기 위해, 사법부에

5. 18 관련 책임자들에 대한 법적인 처벌을 촉구한다.

3. 우리는 아벨의 무고한 피로부터 시작하여 역사 속에 있어왔던 숱한 억울한 피흘림에 대하여 계속해서 귀기울이시는 하나님 (겔 35:5-6, 겔 24:8, 사26:21)을 따라 광주에서 흘려진 억울한 피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기를 촉구한다.

4. 우리는 불의를 적극적으로 행한 악인들뿐만 아니라 불의에 침묵하고 순응하며, 경고를 하지 않은 자들까지도 심판하시는 하나님(겔 33장)을 따라,

5.18 관련 책임자들에게 조찬기도회를 통해 정권을 정당화 시켜 주었던 목회자들과,

5.18과 같은 불의에 침묵했던 대다수 한국 교회에 회개를 촉구한다.

5. 우리는 우리 역시 회개에 있어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따라 역사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위치를 찾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기도하며, 그 일환으로 앞으로 계속적인 '역사를 위한 기도회'를 통해 우리 한국 교회가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저는 이와같은 설교를

5. 18 당사자들이 아직도 권력을 잡고 있을 때 하지 못하고 이제 저들은 약자가 되어 이런 설교를 해도 아무런 피해가 없는 지금에야 하게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저 자신과 우리 동안 교회의 교인들 특별히 사랑하는 우리 동안 교회의 청년들이 역사에 대하여 의식이 없는 무지한 자가 되거나 용기가 없는 비겁한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이 세상의 학생 청년들과 같이 이 문제를 가지고 거리로 나가는 것을 원치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청년들이 이와같은 역사의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 한채 교회 안에서 찬송만 부르는 무기력한 청년들이 되는 것 또한 원치 않습니다.
정말 이 역사의 문제를 끌어 안고 우리 식대로 울며 기도하는 열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죽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만큼이나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이땅에 하나님의 공법이 물과 같이 하나님의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게 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역사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줄 아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동안의 청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와 우리의 청년들이 또 잘못하여 하늘에 대한 경건한 삶의 관심과 자세를 다 내어 버리고 역사와 세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치우칠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세상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아닌 것은 아니라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항거함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데에도 한 몫을 감당하는 의식있는 크리스챤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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