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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에 이르는 병 (롬 08: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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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 2차대전이 끝난 몇년 후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채플에는 옥스포드 출신의 은퇴한 대 정치가의 연설을 듣기 위해 전교생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연단 한쪽에서 그 위대한 정치인은 지팡이를 의지한 채 천천히 걸어 나왔습니다. 채플에 모인 모든 학생들은 모두 일어나 환호와 갈채속에 이 지팡이 없이는 걷지도 못할 것 같은 노인에게 경의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 노인은 다름아닌 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엽합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윈스턴 처칠경 이었습니다. 이제 뚱뚱한 그 노인은 지팡이를 의지한 채 연단 앞에 섰습니다. 장내는 마치 물을 뿌린듯 조용해졌습니다. 채플안의 모든 학생들은 과연 자신들의 위래한 선배의 입으로 부터 어떤 위대한 말이 들려질까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옥스포드 출신의 이 노 정치가는 입을 열었습니다. “My lovely brothers, You never Give up!” 그는 이 한마디 말을 뒤로한채 서서히 단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너무 당황했습니다. 위대한 선배의 입을 통하여 어떤말이 들려질까를 기대하던 그들로서는 인사만 하고 내려가는 그 선배의 행동이 너무나도 황당했던 것입니다. 학생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그것은 연설을 계속해 달라는 의미였습니다. 당황한 옥스포드의 총장은 단을 내려가는 처어칠을 향해 후배들을 위해서 다시 연설을 계속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다신 연단으로 올라온 처어칠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Never Give up!”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단을 떠나버렸습니다. 전 세계를 전쟁으로 부터 구해 낸 위대한 지도자는 결국 자신의 사랑스런 후배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잃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을 남겼던 것입니다. 바로 이 포기하지 않는 소망이 처어칠을 위대한 정치인으로 만들었으며 온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부터 건져낸 것이었습니다.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처칠에게 있어서 전 생애를 통하여 가장 중요했던 것은 자신은 어떤 어려움에 처해있을 지라도 결단코 소망을 잃어 본 적이없으며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금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실존주의 철학가로 알려진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저서에서 절망 바로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스피노자는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려주고 있는 말들입니다.
기독교가리켜 우리는 한마디로 말할 때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에 버금가게 우리는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 소망의 종교”라고 부르곤 합니다.
이는 기독교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려 한다면 “긍휼을 베풀 일말의 가치도 없는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엄청난 고통속에 죽게하시는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고 그 일을 통하여 우리를 택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땅끝까지 전파하고 베풀것을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무런 가치도 소망도 없던 쓸모없는 나를 하나님께서 택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덧입혀주시고 종말의 날에 하나님의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궁극적인 소망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인들의 믿음 속에서 소망을 빼어 버리면 그것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헛된 미신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미닭이 부화하지 못할 골은달걀을 품고있는 것과 같은 것이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을 땅에 꽂아놓고 그곳에 파란 잎이 돋기를 바라는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의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봉독한 대로 사도바울을 통하여 로마교우들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소망을 다음과 같은 네가지로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첫째로 오늘의 어려움을 통한 다가올 날의 영광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제국의 박해때문에 아주 어려운가운데, 심지어는 교우들중 몇몇이 화형 혹은 사자에게 물려죽는 그러한 어려운 환란속에 굳굳히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경주하고 있는 로마의 교우들을 향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신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이며,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하신 로마서 3장3절,4절의 말씀을 그대로 증명하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요셉의 일생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은 항상 꿈이 많은 비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비젼으로 보여주신 하늘의 해 달 별이 자신의 별에 절하는, 그리고 형들의 낫가리가 자신의 낫가리에 절하는 그 비젼을 항상 마음속에 담아두고 살아간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소망은 형들로 인해 애굽으로 팔려가면서도 불평하지 않았으며,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도 구지 변명하려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꿈을 해몽하여준 술맡은 관원장이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을 때에도 오히려 그를 원망하거나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을 바라며, 자신이 맡은 임무만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런 소망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에 뿌리를 내린이래 수 많은 환란과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환란과 박해의 시대에 오히려 생명력을 발휘하여 놀라운 세력으로 성장했지 오히려 정부의 인정을 받아 편안한 믿음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부패하고 안일해지고 생명력을 잃고 침체되는 과정을 겪어왔습니다. 이는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환란과 박해의 시대에는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혜의 소망을 꽉 움켜잡고 오직 그것을 위해 한눈을 팔 겨를이 없이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생활이 평안한 여건을 가지게 되자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에 대한 소망은 어느덧 사라지고 오직 눈앞에 보이는 육적인 평안함과 쾌락앞에서 눈이 가려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서 하나님께서 주실 놀라운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환난중에 나를 돌아보시고 나를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소망을 항상 재 충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영원한 생명으로의 구원을 향한 소망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은 바로 눈 앞의 보이는 것에 대한 소망이 아니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 즉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소망이 아니요 오지 나와같이 아무가치가 없는 불쌍한 인생을 은혜로 택하여 주시고 또한 영원히 누릴 생명으로 나를 구원하여주심을 믿고 바라는 소망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에의 소망은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 이미 이루어 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눈에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자녀로 우뚝 서있는지 알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불확실 하지도 않고 매우 평안한 가운데서 이 세상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깊은 배려속에서나온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오늘 이 세상을 믿음의 삶으로 이어가고 있으면서도 과연 내가 확실한 구원을 받았다고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삶을 살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약속되어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미 붙을 사람과 떨어질 사람이 확정되어 알려져 있다면 그것은 이미 시험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말것입니다. 저의 친구중에 매주 주택복권을 한장씩 사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요행을 바라고 저 주택복권을 살까, 그리고 이왕살려면 확률이 높게 한번에 여러장 사지 왜 한장만 살까 어느날 저는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도대체 예수믿는 사람이 복권은 왜사니 또 이왕살려면 여러장 사야지 왜 한장만 사니 그친구는 저에게 대답했습니다. “ 모르는 소리 하지마라 나는 이 한장의 복권 때문에 매일을 희망가운데 살고 있다. 여하간에 추첨이 끝나는 순간까지 항상 1억원을 가지고 다니는 기분이고 또한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되거든.” 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5백원짜리 주택복권 한장 속에 소망이 살아있을 때 그것은 인생의 엄청난 활력이 될 수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어떤 약속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죽여가면서 까지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 바로 우리의 삶을 가치있는 삶으로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우리의 연약하심을 도우심으로 우리가 도저히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나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의 순간 순간마다 부족함과 왜소함을 느끼게 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면서도 맨손으로는 호랑이는 커녕 여우한마리에게도 질 수 밖에없는 존재이며, 심지어는 바퀴한마리를 보고도 기겁을 하고마는 연약한 존재임을 자인할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를 위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우리가 우리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태산 준령같은 시험에 처하게 될 때, 어떻게 빌어야할지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나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며, 의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한두번쯤은 내 힘으로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사면초가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나를 인도하여 그 어려움으로 부터 건져내 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저의 삶 역시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이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를 받아 본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아무리 어려운일이 닥치더라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나를 놀라운 인도하심으로 보호해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순간에도 나를 지켜주시고 또다른 내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를 또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인도에 대한 소망이 없으신 분들처럼 불쌍한 성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당신의 자녀가 된 모든 자들의 삶을 인도해 주시겠노라 약속하셨으며, 우리가 감당 못할 어려움은 주시지도 않고 혹은 우리가 도저히 그 위기를 못넘길 때에는 반드시 피할길을 주시리라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보통 풀무불보다도 일곱배나 뜨거운 풀무속에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담대히 죽음의 길을 태가려 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소망의 삶이 오늘 우리의 삶속에 녹아 스며들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어떤 어려움과 유혹이 있더라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안고, 또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 때 그 모든것을 이용하셔서 선함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십니다.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하는 모든자들에게 비록 지금 눈으로 보기에는 손해보고 잘못되는 것 같으나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당신의 의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앞의 이익에 현혹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정한 의와 선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소망의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으로 눈을 돌려 봅시다. 과연 우리는 이 놀라운 소만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순간에도 때로는 환란속에 승리를 주시는 분으로, 때로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시시각각 이루시는 분으로, 때로는 갈길몰라 방황하고있는 어리석은 인생의 한줄기 빛으로 모든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의 앞에서, 나의등뒤에서 혹은 나의 옆에서 그리고 나의 속에서 함께 하시고 계신 궁극적인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는 이 소망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마련입니다.
오헨리의 단편들중에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생명을 바쳐 불후의 역작을 남기고 죽어간 늙은 화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병상에 드러누워 창밖에서 한잎한잎 지고있는 담쟁이잎이 다 떨어지는 순간이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이라고 믿는 한 소녀에게 생명의 소망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잎을 그려놓아 새생명의 소망을 갖게 해주고 조용히 죽어간 한 늙은 화가의 모습 말입니다. 그는 한 소녀의 생명에 다시 불을 붙이겠다는 소망으로 자신을 던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바로 아무 희망없이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던 우리에게 새 생명의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귀한 생명을 주셨고, 우리는 또한 그분의 역사를 통하여 귀한 새생명의 소망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소망을 가진자는 그 소망을 이룰 때 까지 최선을 다하게 마련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까지 결단코 이 소망을 잃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소망이 있는 성도답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입니다.
소망을 잃어버린 믿음은 결단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소망을 잃어버린 삶이 바로 죽음이나 다름없는 삶이듯이 소망을 잃어버린 우리의 믿음 역시 죽음으로 인도하는 믿음임을 깨달읍시다.
구원의 소망안에서 어떤 어려움도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통하여 평안함을 누리고 능히 이기는 능력의 삶과 모든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소망하며 소망을 가진자 답게 여유있는 믿음의 삶을 누립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안에 있는 이 소망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실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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